영화이야기, 서평

<일본을 생각하다>를 읽고, 知彼知己면 必勝인데...

Kyuchin Kim 2021. 4. 7. 00:14

<일본을 생각하다>를 읽고

學山 金圭鎭

 

 

코로나 19 때문에 오랜만에 운중회가 청계산 줄기인 운중동 올레길을 산보하다.

최재철교수님이 최근에 출판한 <일본을 생각하다>를 한 권씩 주면서 읽어보고 재미가 있어, 독후감을 써서 보내면 선착순으로 상을 준다고 한다. 한국외대에서 여러 해 동안 세계문학전집 편집, 책 출판 등 학교일을 함께 하고 사이좋게 지낸 최 교수님이다. 은퇴하시고 열심히 집필을 하시고 계시다. 선물하신 책은 아드님이 하는 한음출판에서 펴낸 <일본을 생각하다 – 목근춘추3> 인데 종이 질도 좋고 잘 만든 책이다. 손에 책을 들면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우리 세대는 아마도 종이 책이 영원히 좋을 것 같다. 요즘 가끔 e-book을 보기는 하지만.

 

책을 선물 받으면 예의로 어느 정도 읽어보는 게 나의 습관이다.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하여 며칠 동안 읽었다. 한국의 일본학계에서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시다가 정년퇴임한 교수들의 모임인 ‘목근회’에서 편찬한 에세이집이다. 이 문집은 학술적인 에세이와 평소 관심을 갖는 소재 등의 수필로 이루어져 있다. 은퇴하고 평생 동안 가르치던 전문분야를 팽개치지 않고 이렇게 수필 형식으로 글을 써서 기록에 남기고 독자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모습이 무척 바람직하다. 이번호가 제 3집인데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어 좋다. 일본은 이웃나라로, 이때까지 소홀히 했었는데, 일본에 대한 이야기와 상식이 있어 일본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오래전에 한,중,일 슬라브학자들과 일본 호카이도대학에서 국제학회를 하러 갈 때 이어령교수의 <축소지향형 일본>을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이번에 이 책도 무척 감명 있게 읽었다.

 

필자들로는 모두 10명인데, 그 중 4분은 한국외대 명예교수님들로 친숙한 이름이다. 목차는 5가지 분류 아래 다양한 글이 들어 있다. 그들 중에서 우선 흥미가 가는 것부터 읽어봤다.

 

황윤주 교수의 “죽음의 미의식‘에서는 왜 일본인들이 자살을 멋진 죽음으로 생각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김종덕 교수의 “한일 고유문자의 발명과 여류문학”에서는 일본의 가타가나(かたかな)와 한글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최재철 교수의 “모리 오가이와 한국, 그리고 나”에서는 인생에서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신근재 교수의 글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과 관련한 미스터리”에서는 금동보살상의 역사적 의의를 알 수 있었다. 이종덕교수의 “가극 「나비부인」에 대하여”에서는 오페라 <나비 부인>의 주역을 맡은 전설적인 일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의 위대함을 알게 해주었다. 이덕봉 교수의 “꽃 싸움 놀음”도 퍽 흥미롭다. 이종덕 교수의 “일제말 창씨개명의 실제”를 읽고도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덕봉 교수의 “82년 생 김지영 신드럼” 글 또한 재미있고 전문가답게 접근하고 있고 일본에서 이 소설과 영화가 인기를 끈 이유가 놀랍다. 유상희 교수의 글 “친일 반일 극일”은 일본전문가로서 예리한 안목으로 쓴 글이다. 원로 박희태 교수님의 글 “기독교 신자가 되다”과 김태정교수의 <나의 가족사 단편>에서는 느낀 바가 많다.

 

 

 

         

안락사와 죽음의 미의식

 

황윤주 교수의 “죽음의 미의식‘을 읽고 왜 일본인들이 자살을 멋진 죽음으로 생각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최근에 스위스 등 몇몇 유럽 나라에서 자기 죽음을 스스로 택할 수 있다는 안락사를 행하는 이유도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자기의 자유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태어나지만 죽음은 자기의 자유의지 데로 택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중에서 일본 고대 문학에 나타난 여러 자살 중에서도 정사(情死, 일본말로 心中)가 퍽 흥미로웠다. 그리고 일본작가로 첫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을 한 사건을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았는데 이해가 된다. 내가 일본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감동적으로 읽은 그의 대표작 <설국>에서도 사랑하던 여인 게이샤가 화재로 죽은 것을 환상적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것 같다. 또 일본의 다른 소설을 읽은 첫인상은 일본 소설은 사랑의 심리묘사가 약간은 퇴폐적이지만 섬세하고 뛰어난 것 같다. 유럽 문학 중에서 프랑스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궁금하다. 또 동경대 출신 미남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인기가 절정일 때 활복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수 차례 오를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는 천재 소리를 들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ㆍ1925~1970)가 45세이던 1970년 11월 25일 할복(割腹)으로 죽음을 맞이 하였다. 미시마의 할복 자살극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고,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던 군국주의를 준동케 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보통 자살은 생의 의미를 잃거나 우울증이나 병적으로 정상이 아닐 때 자살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명예가 더렵혀지거나, 생활의 중압감 등으로 자살을 한다. 한국에서 최근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 몇몇 유능한 연예인들의 자살 등이 그러한 이유였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자살을 미의식으로 생각한다니 우리와는 죽음에 대한 문화의 차이가 크다 하겠다. 일본 고대문학에 나타난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자살을 통해 아름답게 죽는 묘사는 그래도 이해가 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이루지 못하는 애절한 사랑 때문에 자살은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유명한 햄릿의 <로미오 줄리엣>에서처럼, 학창 시절 본 스웨덴 영화 <엘비라>에서도 처자가 있는 청년 귀족이 서커스의 줄타기 처녀 엘비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사회문제로 사랑을 성취할 수 없게 되자 두 사람은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한다. 이처럼 고금에 못 이룬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더욱 미화시킨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를 찬양하는 풍습이 있긴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가 학생과 사랑에 빠져서 물속에서 꼭 껴않은 채 동반 자살한 사건을 다룬 ‘철학정사’도 흥미로웠다. 철학자는 죽기 전 일기에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자를 속인들이 알 턱이 있겠는가, 제 아무리 세론이 떠들어대고 비난하더라도 우리들의 세계, 우리들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라고 기록하면서 젊은 연인과의 자살을 정당화한다.

2000년도 빈에서 처음 본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에서 미 주둔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결혼 까지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가. 그 미군의 배반에 일본 여인의 구차하게 사느니 자살로 영광스럽게 죽는 장면이 무척 비극적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렇게 자살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런 비극적인 자살 외에도 희극적으로 다룬 죽음도 있다. 가부키 교겐의 ‘도리베야마 정사’는 동반 자살을 약속하고 여자가 죽자고 하니 갖은 핑계를 도망가는 남자의 모습이 코믹하기 그지없다.

특히 이글을 통해서 알게 된 할복(割腹 일본말로 切腹)이라는 거창한 의식이 일본에 그처럼 발달한 것이 놀랍다. 장소와 시간과 순서를 정해서 할복한다. 일본인들은 정말 장렬한 죽음이 인간의 인격이나 결백성 또는 그 사람의 성격이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고 믿는 모양이다. 명예를 더럽히니 차라리 거창하게 배를 십자로 갈라 심장, 폐, 위 등에 밀려서 저절로 밀려나오는 장기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숨을 거둔다는 끔직한 이야기도 있다. 어찌 보면 야만스럽기 그지없으나 일본에서는 위대한 죽음으로 칭송되니 놀랄 일이다.

일본인들은 명예 때문에 자살하는 할복이나 무사들의 싸움에서 참살 같은 죽음은 서양이나 동양 다른 나라에서처럼 패배가 아니라 명예로운 자유의사의 극한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 같다.

 

가타가나(かたかな)와 한글의 우수성

 

한국외대에 근무할 때 자주 뵙던 김종덕교수가 은퇴 후 멋진 글을 썼다. 김교수는 “한일 고유문자의 발명과 여류문학”이라는 글에서 동아시아 중국 권에서 고유문자를 만들어 발전시킨 민족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하면서 두 나라 다 그 고유문자로 문학을 발전시킨 예를, 궁중에서 근무한 궁녀들이 창조한 것을 다루고 있다. 무척 흥미롭다. 필자는 한국의 여성들의 가사문학은 옛날 양반 규수들이 만든 것만 있는 줄 알았었는데 우리나라 궁녀들도 훌륭한 많은 가사를 썼다니 놀라운 발견이다. 어릴 때 동네 친척 아주머니들과 어머니가 호롱불 등잔 밑에서 가사를 읽고, 읊고, 베껴 쓰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조선시대에 궁녀가 되려면 한문으로 철저한 교육을 받는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는 궁녀들이 한글로 가사를 쓰고 읽을 수 있었다니 우리나라 궁녀들도 대단하다.

일본의 고유문자인 가나가다는 조선의 한글보다 5세기나 앞서 만들어져 우리보다 더 많은 다양한 고유문자로 기록한 고대문학이 발달했고 현존하고 있다.

 

김종덕 교수는 이 글에서 조선시대(1392-1910)의 궁정 여류문학 중 계측일기(癸丑日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伝), <한중록>(閑中錄) 등은 궁녀들이 궁중 생활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것을 기록했는데, 잘못하면 필화사건으로 본인은 물론 집안이 멸족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한문으로 기록하기 어려워 한글로 기록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한다.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쓴 대단한 작품이다. 기록문화의 소중한 예이다. 일본의 헤이안시대(794-1192)에 일본 궁녀들의 계급은 좀 복잡한데, 그 중에서 궁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 집안에서도 활동한 여성들인 뇨고(女御)는 헤이안시대에 궁정여류작가 된 여성들로 뛰어난 학문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한시와 한문뿐만 아니라 서예와 와카(和歌: 노래), 음악 등에 특출한 조예가 있었다. 오락으로 향 겨루기, 그림 겨루기, 조가비 겨루기, 바둑 등을 즐겼다고 한다. 일본의 이러한 뇨고 여류작가들은 이혼녀가 많았는데 궁중이나 황족, 귀족 가문에 근무하면서 그들과 사랑도하고, 결혼도 하고 퇴직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조선의 궁녀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글을 썼다. 후비와라 모로타다가 딸 센요덴 뇨고에게 습자, 음악, 고킨슈(古今集) 20권을 전부 암송하게 했다고 하니 뇨고의 교육과정이 얼마나 철저한 지 알만 하다.

“첫 번째로 습자를 배우세요. 다음으로 칠현금을 다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연주하려고 노력하세요. 그리고 그다음은 고킨슈의 와카 20권을 전부 암송하는 것을 학문으로 생각하세요.”라고 했다. 여기서 아버지가 딸에게 존칭을 사용한 게 특이하다. 이 하나만 예를 들어도 일본 궁중에서 궁녀가 되려면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영주 우리 무섬마을에서도 새로이 며느리를 데려 오기 전에 정혼한 며느리 될 여성에게 시조부 될 사람이 두루마기 한지를 수십 미터를 보내면서 <사씨남정기>, <한중록>, <부인언행록>, <단종애사가>, <계녀가> 등을 필사해오라고 했다. 우리나라 양반 가문에서도 이처럼 부인들의 교육을 중요시하기도 했지만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가나문자로 써진 최초의 여류문학인 954년부터 24년간 기록한 <가게로 일기>, 무라사키시키가 쓴 이상적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겐지 이야기>나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처럼 고대 일본들이 창조한 방대한 문학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니 대단하다. 게다가 그러한 작품을 두고 귀족 남자와 궁중의 뇨고가 와카로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논쟁분위기가 있었다니,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궁녀들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내려오니 현대 일본의 문학과 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김종덕 교수의 좋은 글을 통해서 많이 알게 되어서 기쁘다. 좀 더 작품들의 내용을 더 인용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아쉽다. 아쉬우니 다음에 그런 원전을 읽고 싶다.

 

 

인연의 소중함

 

이 책 편집을 책임 진 최재철 교수는 “모리 오가이와 한국, 그리고 나”에서 19세기말 20세기 초 위대한 사상가, 작가 모리 오가이를 접하게 되고 전공하게 된 것을 중심으로 오가이의 한국 체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일본의 명치유신 시대에 그런 위대한 학자, 작가가 존재해서 많은 동서 문화를 수용하고 재창조한 일본의 저력을 보여준다. 현대판 일본의 백과사전파 격인 오가미의 문학, 평론, 시, 사회도시개량, 자연과학 등 각 분야에서 38권의 저서를 저술한 것 만 봐도 그의 사상의 폭과 깊이를 알 수 있다. 일본이 대하 역사소설이 번창했는데 벌써 오가이가 이 분야에 독특한 역사소설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오가이가 평론 “양학(洋學)의 성쇠를 논함”에서 근세에 조선과 중국이 앞선 서양의 박물학을 멸시하는 학문을 고수하여서 수동적 위치에 서게 되었고, 일본은 서양학을 수입했기 때문에 경하할만한 능동적 지위에 서게 되었다, 고 진단한 것은 놀라운 혜안이다.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켜 동심원이 점점 멀리멀리 퍼져나가듯 하나의 작은 인연의 파장이 점점 널리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반갑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 발전이라는 이름의 진보가 있다고 한다면, 초석을 놓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 위에 누군가가 돌 하나씩 꾸준히 쌓아갈 것이라는 것, 작은 물결이 일어 그 다음의 물결을 부추기고, 다시 그 다음으로 퍼져 더 큰 물결이 어딘가로 누군가로 전달되어 간다면 그것 또한 뜻있는 일이 아닐까." (152-153쪽)에서처럼 최교수는 인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가이와의 인연이 우리 인간사이이의 인연이 절묘하고 중요하다 것을 보여준다.

 

 

 

금동보살상의 역사적 의의

 

금동보살입상

신근재 교수의 글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과 관련한 미스터리”도 무척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보물을 두고 일본 양국의 태도도 알 수 있었고 전설 같은 위대한 우리문화 지킴이 간송미술관의 창립자 전형필의 혜안 덕분에 우리는 많은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문화 유산을 되 사온 것도 많다. 이어서 필자는 우리나라 금동보살입상이 일본의 불상에 영향을 주어서 일본의 보물 ’구세관음보살상‘을 소개한 것도 흥미롭다. 고대 일본 문화는 한반도의 백제, 신라,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문화재대관 보물- 불교조각> 책에서 인용한 금동보살입상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고 절묘한 묘사가 불상의 예술적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불상의 의미를 알게 되어 부척 행복하다.

 

“이 금동보살입상은 토착적으로 한국화 된 특이한 얼굴, 긴 장신형의 원통 체구, 소박한 목걸이와 묵직하면서도 장려한 X자 영락 장식, 전신거리, 정연한 좌우균제의 날카로운 날개 형 옷깃 등에서 6세기 삼국 공통의 도상요소가 혼합된 6세기 후반의 토착화된 보살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 된다.” (160쪽)

 

덕분에 보살상이 손에 잡고 있는 중생구제의 상징인 보주(寶珠)의 의미와 사상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두 보살상의 사진이 이 글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이처럼 다른 글도 가능하면 사진을 곁들여 설명하면 더욱 좋은 글이 될 것이다.

 

 

 

구세관음보살상

 

 

오페라 <나비 부인> 전설적인 일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

www.youtube.com/watch?v=4Uy1vJkQ_b0

이종덕교수의 “가극 「나비부인」에 대하여”는 아주 좋은 글이고 몰랐던 정보이다. 2000년도 겨울 빈에서 처음으로 <나비 부인>을 보고 감동하고 그 이후 푸치니의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함께 간 소프라노 아내는 나비부인의 아리아에 몰입하고 너무 노래가 슬프지만 좋다고 한다. 특히 나비부인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창”, “어느 맑게 갠 날” 그리고 “허밍코러스”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사랑의 이중창”은 모든 오페라에서 나오는 이중창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아리아의 하나다. 마지막 장면에 나비부인이 아들의 눈을 가리고 병풍 뒤에서 자살하는 장면은 당시에는 이해가 잘 안되었다. 남편한테 버림받았다고 자살하는 가련한 일본 게이샤 출신 부인의 운명이 불쌍하지만 자살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온 “죽음의 미의식”을 읽고 나니 나비부인의 자살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게 이해가 된다. 일본 사람들 죽음을 미화하는 의식 독특하다는 것을 이해할 것 같다.

또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 <나비 부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적인 일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Damaki Miura)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그녀가 40여 년간 일생동안 전 세계 극장에서 2,000번 정도 공연했다니 놀라운 기록이다. 특히 푸치니가 <나비 부인>의 초연에 실패하고 미우라 다미키의 주연을 통해 첫 성공을 거두고 그녀를 극찬한 이야기도 새로운 사실이다. 이탈리라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일본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을 오페라로 성공시켜 일본인들의 삶과 죽음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많은 오페라가 주로 한두 명의 주인공 중심으로 전개 되지만, 특히 <나비 부인>은 소프라노 한사람의 노래와 연기에 의해서 오페라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나비 부인>의 주인공 역을 일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가 수 천 번 15살의 처녀 기생 역할에서부터 결혼한 남편이 삼년 동안 소식이 없고 주위에서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고 기다리는 젊은 여성역할,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키우던 아들까지 데려가려하자 일본식으로 장렬하게 칼로 할복자살하는 역할을 해낸다. 이 모든 역할을 프리마돈나 혼자서 해낸다. 천부적인 노래기술과 연기력을 가진 미우라 다마키의 오페라 <나비 부인>에 얽힌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제1막”에서 핀커턴과 나비부인이 부르는 이중창 “ 저녁이 온다네, 꽃의 듀엣”은 아마 푸치니의 그 많은 이중창 중에서 가장 매혹적일 것이다. “제 2막”에서 3년을 기다리며 언젠가 나타날 것을 기다리며 독창으로 부르는 “어느 맑게 갠 날”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슬프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다. 또 “제 3막”에서 밤새도록 마루에서 나가사키로 돌아온 남편 핀커턴을 기다린다. 이때의 심정을 표현한 “허밍코러스” 애처로운 나비부인 초초상의 심정은 관객들을 감동 시킨다. 미국과 체코에서는 이 장면을 보고 할머니들이 눈물을 연신 훔쳤다고 한다. 푸치니의 천재적인 오페라 작곡의 원작 소설보다 훨씬 일본 여성의 심리를 잘 표현하였고 오랫동안 오페라 팬들의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이종덕 교수 덕분에 “오페라는 나의 로망이다. 언어가 달라도 시대를 뛰어넘어도, 마음을 하나로 묶는 매직이 있다.” 라고 말한 전설적인 일본의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와 오페라 <나비 부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오페라 가수가 일본에서보다는 미국 유럽에서 더 활약하고 성공했다고(?) 일본에서 제대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니 일본인들의 이상심리가 이해가 안 된다. 이 글에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더 자세히 다루지 않았는데 왜일까 궁금하다.

 

 

Damaki Miura in Madam Butterfly

노름과 놀음

 

이덕봉 교수의 “꽃 싸움 놀음”도 퍽 흥미롭다. 우리가 그렇게 즐기는 고스톱이, 화투(花鬪: 꽃 싸움) 놀이가 일본에서 유래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세세세한 일화는 모르고 그냥 고스톱을 즐겼다. 사실 나는 고스톱도 집구땡도, 두장삐이도, 민화투도 조금밖에 해보지 않았고 잘 모르지만, 아마 전 국민적 놀이가 아닌 가 싶다. 필자는 하투가 일본에서 1세기 이전에 들어와서 한국적 풍토에 맞게 개선되어 재미있는 놀이 또는 노름으로 확대 발전되어 일제식민지 문화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고향 영주 마을 무섬에서 하투 때문에 패가망신 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이런 풍토는 곧 사라지고, 지금은 주로 할머니들이 눈이 어두워 가사 읽는 것도 힘이 들어 소일거리로 즐긴다. 그러면서 규방가사가 발달 된 우리 마을에서 이웃아주머니가 화투가사를 흥얼대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자 화토나 치면서 노래나 해보세

 

어절씨구 지화자 좋고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정월 솔솔 부는 바람

이월 매조 맺아 놓고

삼월 살구 산란한 맘

사월 흑싸리 흩어 놓고

오월 난초 나부끼고

유월 목단 춤을 추네

칠월 홍돼지 홀로누어

팔월공산 달밝은 밤

구월국화 굳은 맘

시월 단풍 떨어지니

공산 삼십 비 삼십은

그 수가 많아서 내가 먹고

오동동추야 달밝은 밤에

비 온단말 웬 말이요

어절씨구 지화자 좋고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이교수가 소개한 한국과 일본의 화투에서 열두 달 비교하면서 그림의 차이와 풍습, 문화행사의 다양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정말 자그마한 화투 열두 장에 흥미가 가득하다. 화투에는 또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함께 어우러진 생명의 향연으로 가득하다고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다. 화투는 그냥 돈놀이와 오락으로 즐기지만 그 화투 속에는 자연과 문화의 조화를 디자인한 예술 작품이다, 라고 하는데 정말 자세히 보면 화투의 그림은 멋진 민속 나이브 예술이다.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타문화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시각을 길러 보다 유연하고 의연하게 외래 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문화에 대한 이러한 자세를 통해서만이 이질적인 외래문화를 우리의 전통 사회구조에 맞게 접목시켜 우리의 문화로 소화 수용하고, 다시 창조된 새로운 문화를 주변 국가에 전파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2쪽)에서처럼 이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타문화를 적극 수용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특히 일본은 그런 면에서 어느 민족 못지않다. 이 어령교수의 <축소지향형 일본인>에서 일본인들은 세계문화를 수용하여 자기 나름대로 작게 만들어 꽃피운다고 했는데 대단한 민족이다.

필자는 돈에 의존하는 ‘화투 노름’이 놀이문화인 ‘꽃 놀음’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글을 맺는데 그렇게 만 되면 화투놀이도 건전한 우리국민의 놀음이 되리라. 다만 이글에서 일본은 화투로 얼마나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고, 한국은 얼마나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는지 예를 들어가며 좀 데 상세하게 설명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화투에 그려진 12월의 상징을 설명할 때 양국의 대표적인 화투 그림을 실었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었을 것이다. 요즘 세대는 글보다는 아이콘 문화에 더 친숙하니까. (물론 채색 사진을 넣어야하는 책 출판의 한계는 있겠지만?)

 

몬주고꾸민 각교 다이로크 가쿠렝 김게이징(문수초등학교 제6학년 일반 김규진)

 

또 이종덕 교수의 “일제말 창씨개명의 실제”를 읽고도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일본이 일제 강압시기 말에 그렇게 철저하게 우리민족의 혼을 없애고 그들 말대로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의 서약(皇國臣民誓約) 등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구한 사실이 놀랍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옆 나라 강국에게 언제 또다시 수난을 받을지 모른다. 알제의 강압적 통치 시기가 정말로 세계에서 유래 없는 가혹한 지배였다고 일본 학자도 인정할 만큼 우리민족에게는 역사 이래 최대의 수난기였다, 는 것을 이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앞서 있고 더 많이 아는 민족이 그보다 못한 옆 나라 민족을 탄압, 수탈하는 것은 세계역사의 흐름에 어느 정도 있어 왔지만, 우리 민족이 못나서 36년 간 그처럼 철저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종덕 교수의 좋은 글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82년 생 김지영>과 젠더문화를 변화

 

그 다음 이덕봉 교수의 “82년 생 김지영 신드럼” 글 또한 재미있고 전문가답게 접근하고 있다. 필자인 이 교수가 아마 이런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가르친 경험 덕분인 것 같다. 필자도 2020년에서야 이 작품을 읽고 영화도 봤다. 마침 번역원에서 이 소설의 체코어판을 평가해달라고 부탁이 와서 한국어판도 체코어판도 읽고 감상문을 써봤다. 체코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일본에서 그처럼 크나큰 반향이 일어난 이유를 필자 이 교수는 자세히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아직 여성에 대한 인식이 유럽만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이 작품이 성별과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의 확대는 젠더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진단한다. 본래 젠더문화의 변화는 긴 시간을 요하지만 이 작품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으로 그 시간이 단축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전문가다운 예리한 진단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김지영 씨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어처구니없이 부당한 상황을 당하면 거의 대부분 항의하지 않고 참아버리고 혼자서 고민한다. 이러한 그녀의 무언의 항의가 무섭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성들은 그런 상황에서 참아버리는 현실이다. 김지영 씨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참아오다가, 어느 때부터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부당한 대우를 말함으로써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특히 아이를 낳고 엄마로써 가정에 유폐되면서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물론 이전에 딸, 여학생, 여자친구, 여직원, 아내, 며느리로소의 삶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되고부터는 완전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도, 일도, 꿈도, 인생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느낌을 경험한다. 매사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육아 우울증 같은 증세를 경험한다.

생활 속에서 남자들은 잘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말로 아기를 돌보는 가정주부 김지영 씨를 “맘충”이라는 등 여성혐오적인 말을 내뱉는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김지영 씨의 삶에 영향을 끼쳐서 결국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끝은 과연 김지영의 딸 세대에는 사회의 통념이 좀 많이 바뀔까하고 의문을 제시하면서 끝난다.

이 교수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정규대학 출신 이상은 그런 데로 젠더문제 등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지만, 단대 이하의 출신 여성들은 생활에서 임하는 자립심은 강하지만 젠더문화에 응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이런 일본들이 아마 이 소설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무튼 한국문학 작품이 일본에서 이처럼 관심을 끈 사건은 특이한 경우다.

 

"딴 나라는 몰라도 왜놈들한테는 이겨야 된다."

 

유상희 교수의 글 “친일 반일 극일”은 일본전문가로서 예리한 안목으로 쓴 글이다. 조선말부터 일제가 강압적으로 우리를 지배할 때가지 우리민족은 친일파와 반일파 그리고 대다수의 민중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일본을 좋아하면서 친일적일 수 있고 싫어하면 반일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체코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늘 체코에 대해서 우호적인 발언을 한다. 또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세계질서와 정치에 관여하는 제국주의적인 미국의 태도는 비판을 한다.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관계는 좀 특수한 상황이다. 체코는 나치한테 6년간 전쟁동안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당연히 나치 독일이 체코인들의 감정에 좋지 않게 비쳐졌다. 그러나 전후 독일은 이웃나라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해서 체코국민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독일에 우호적으로, 이웃나라로 함께 지낸다. 반면에 1968년도 프라하에 정치적 자유화바람이 일 때 소련이 바르샤바조약군대를 동원하여 탱크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정치적 자유화를 무너뜨렸다. 물론 그때 일어난 피해는 나치의 6년간 점령 동안 행한 것에 비하면 수백배분의 일도 안 된다. 그런데도 체코국민들은 오늘날 독일에 대한 것보다 러시아에 더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체코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을 때 체코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 국민들이 국경일 보다 더 큰 경축 행사를 했다. 나는 체코에서 축구나 아이스하키나 뭐든지 러시아 팀과 붙으면 체코인들이 “다른 나라 팀한테는 져도 러시아 놈들한테는 이겨야 된다.” 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우리나라가 한일 전 축구시합이 벌어지면 "딴 나라는 몰라도 왜놈들한테는 이겨야 된다." 고 하듯이. 왜 그럴까? 설명하기가 좀 복잡하지만 독일 나치는 전쟁 중이었고, 소련의 경우 같은 공산권 블록으로 믿고 있었는데 탱크로 침략해서 체코인들의 자존심을 무시한 것이 하나의 큰 원인이다.

우리는 역사상 중국민족한테 많이 당해왔고, 최근세사에 일본한테 강압적인 지배를 받으며 너무나 큰 고통과 민족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받아왔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진정한 사과 없이 한일과거사가 나오면 늘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유 교수의 진단대로 일본은 여러모로 보아 우리나라와 비교 안 될 정도로 부유하고, 우수하고,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앞선 나라다. 그런데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는 늘 거만하고 강국답지 않게 너그럽지 못하다. 한마디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대한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 그런 것을 극복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민족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나쁜 사람이 별로 없었고, 친절하고 예의발랐다.

역사에 만일이 없다지만 아래 나열한 친일파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 우리나라는 혼을 완전히 빼앗겼을 것이다. 적극적인 친일파들, 유교수가 몇몇 이름을 나열한 예컨대, 이광수, 최남선, 안익태, 이흥렬, 김성수, 박정희, 백선엽(256쪽) 등의 친일파들의 행적을 면밀히 검토하여 공과 사를 가려서 인정해줄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 인물 중 자신들이 단순히 살기 위해서 한때 젊은 시절 세상사를 잘 모를 때 행한 것은 이해가 된다. 누구나 젊을 때는 과오를 범하고 나중에 회계하고 개과천선하면 누구나 용서하니까. 그 당시 일본제국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와는 상대 안 될 정도로 여러 면에서 앞서 있고 지배국가가로서 무식한 피지배국가의 사람들에게 악선전을 통해서 우리민족을 호도하였다. 늘 대동아전쟁의 승리가 코앞에 있다하면서 일제 앞잡이들을 내세워 우리민족의 혼을 빼고 눈멀게 해서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으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친일하면서 살아가야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서정주. 이광수처럼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우리국민들을 일본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도록 설득한 적극적인 친일파들,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18년간 독재를 할 동안 인권은 엄청나게 탄압했지만 경제적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장군 대통령, 젊은 시절 일본인이 되고자 일본 천황에게 두 번이나 혈서로 맹세하고, 일본의 장교로서 우리 독립군을 때려잡던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중위, 그리고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라고 창씨개명(윤봉길 의사가 목숨 바쳐 폭사시킨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 일본군 대장의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항일독립군들을 토벌하는데 앞장 선 백선엽장군도 육이오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자기 과거에 대하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봐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 것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죽기 전에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은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진정한 후회의 말이라도 한마디 했다면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데. 과거사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또 이웃나라에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교수가 조정래 작가의 발언을 일부 신문에 왜곡보도 한데로 믿고 비판한 것은 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조정래 작가가 강조한 친일파청산 문제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지만 왜 그런 위대한 우리나라 국민작가가 그런 발언을 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된 지 70여년이 넘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일제 강압시기에 독립운동 했던 후손들은 사회의 주류에 잘 끼지 못하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 마을에서도 어릴 때부터 목격했다. 반면에 친일했던 후손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득세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아직까지 우리정부는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정권시절 폐지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하여 일제 강압시대의 친일 기업가였던 박흥식, 일본군 입대 선전에 참여한 최남선, 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친일파들을 색출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반공을 위해 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이승만 정부의 반대로 활동이 지지부진하였고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였다. 곧 국회 중도파가 특위기간을 단축하였고 동년 10월에 완전히 해체되었다.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70) 참조

 

바로 반민특위가 폐지되고 얼마 안 되어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 근대사는 꼬이기 시작했고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역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고, 지금까지 국론분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심한 일이다. 언젠가는 마무리 지어야 된다고 본다. 아마도 조정래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발언을 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자기발언이 잘못 왜곡되었다고 여러 매체와 대화를 통해서 밝혔다. 유교교수는 이런 왜곡되어 잘못되었다고 한 작가의 그 이후의 발언은 언급하지 않아 독자들이 조정래 작가의 발언을 곡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토착왜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주어부를 분명히 설정했다”며 “그 주어부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뒷부분만 씀으로써 제가 일본 유학 갔다 오면 다 친일파라고 말한 것처럼 왜곡했다”는 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다시 라디오에 출연해 '토착왜구' 부분을 해명했다. 15일 오전 7시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진행자가 “그냥 딱 들으면 마치 일본 유학파는 무조건 친일파라는 건가 이렇게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하고 묻자 “‘토착왜구’라고 하는 주어부를 빼지 않고 그대로 뒀다면 이 문장을 그렇게 오해할 이유가 없고 국어 공부한 사람은 다 알아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또 “토착왜구로 부르지 않은 사람들 거기는 해당이 없고 일본 유학 갔다 와서 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강화된 분들 많겠죠. 그분들은 토착왜구가 아니다”라고도 덧붙였다.“ [출처: 중앙일보] 진중권 "광기" vs 조정래 "무례"…원문으로 본 토착왜구 진실

 

위와 같은 조정래 작가의 말(변명?)로 볼 때 어떤 사람의 발언 중 앞뒤를 빼고 인용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하겠다. 유 교수는 또 조정래의 <아리랑>에 묘사된 일본인들의 만행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는데 역사 자료에 나오는 자료이다. 좀 더 확인 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미가와준페이가 경험한 자서전 일본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에서 보더라도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 동안 얼마나 잔혹한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수원 제암리 교회 및 인근 마을 학살 사건 등등. 독일 나치들이 체코슬로바키앙서 행한 집단 살해 사건과 너무 비슷하다. 체코는 아직도 근 현장을 보존하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 있고 독일은 이 사건에 정중히 사과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 비극적인 역사현장이 잊혀져가고 있고 그런 짓을 저지른 일본은 아직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외 유 교수는 꼴통 보수주의자들의 저서와 글을 용기 있다고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있는데 이런 시각도 문제가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글도 옳을 수 있지만, 잘못된 견해일수도 있다는 것을 동시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혁명의 하나인 광화문 촛불혁명과 지난번 대선에서 여당이 압도적 다수가 된 것은 한국에서 주류사회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자가 되다”라는 원로 박희태 교수님의 기독교교인 된 이야기도 짤막하나 감동적이다. 덕분에 한국의 토착 믿음과 불교 의식, 일본의 토착 종교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온 의식이고 일생동안 경험한 한국불교 정신을 가진 기독교인이라 참 건강한 교인인 같다.

 

 

한국외대에서 가끔 뵙던 김태정교수의 <나의 가족사 단편>에서는 느낀 바가 많다. 우여곡절과 한 많은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그리는 모습이 초월한 모습 같다. 일부는 나의 인생과 유사하여 더욱 공감이 간다. 좀 더 자세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서전을 쓰시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다음을 기대해본다.

 

知彼知己면 必勝

 

한·일 관계 가까운 면서도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이웃사촌과 잘 사겨야하는데 우리는 일본과 그런 관계가 아닌 게 아쉽다. 1910년-1936년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서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라서 그런가 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서로 문화와 문명을 주고받고 해왔는데, 고대문명은 분명 우리가 중국에서 더 일찍이 받아들여 앞섰지만 근세 이후 현대문명은 어디로 보나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아쉽다. 知彼知己면 必勝이라 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속이 좁은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가 많다. 일본은 1905년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 당시 벌써 일본은 러시아제국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한테 지지 않으려면 남을 잘 알아야하는 데 우리는 경제, 문화강국 일본을 더 잘 알고 대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몇 년 전 한국슬라브학회, 중국슬라브학회, 일본슬라브학회 공동 학술 세미나 차 일본 호카이도 대학에 갔었는데 처음 일본 간 교수들이 일본의 발달된 환경에 놀라면서 일본은 세계에서 일등국가에 속하는 이유를 목격했다고 한다. 인프라가 너무 잘되어 있고,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데 놀랐다고 하는 게 새삼 새롭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게 부끄러웠다. 그때 일본 나리타공항 매점에서 뜨거운 라면 먹을 때 사용하는 미니 선풍기가 달린 나무젓가락과 비올 때 쓸 수 있는 안경에 달린 미니 창문 닦기와 손가락 크기의 볼펜 세트를 보고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형 일본인>이 다시 생각났다. 이어령 교수는 정말 일본다운 것은 '무엇이든 작은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일본문화의 기본적인 흐름을 '축소'라는 한 마디로 수렴하여 일본인을, 일본문화를, 일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축소지향을 무시하고 조선반도 침략이나 대동아전쟁 등 대국지향을 하면 전쟁 같은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것 같다.

몇 년 전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본 도자기 전시회에서 필자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17-19세기 일본은 16세기 우리 도공들을 데려가서 일본식 도자기문화를 발전시켜 유럽에 수출해서 경제적 부를 이루었다. 독일도 일본 도자기를 수입하고 마침내는 일본으로부터 도예기술을 배워서 찬란한 마이센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런 예는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몇몇 국가가 일본으로부터 도예기술을 배웠다. 그때부터 일본은 유럽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일본 경제와 근세문명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쇄국정치로 세계와 교류하지 못해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다. 드레스덴에서 이런 이야기를 알고 눈물이 날 뻔 했다.

 

목근춘추 3권 <일본을 생각하다>는 일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어 기쁘다. 다음호가 기대된다. 20210305

 

이 글에 대해 최재철 교수님이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내왔다.

 

아래:

 

최재철/崔在喆 오전 1:00 (22시간 전)

 

김규진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졸공저 [일본을 생각하다 -목근춘추3]을 정독하시고 보내주신 독후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바뀐 e메일을 너무 늦게 확인하여 답신이 늦어진 점 양해 바랍니다.

관심 있게 읽으신 각각의 글에 대해 일일이 내용 소개와 코멘트 의견, 평가를 해주신데 대해 편집 담당자로서 경의를 표합니다.

대부분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단지, 관심 방향과 전공 여부, 사전 지식 정도 등에 따라 관점과 흥미 방향이 다르리라고 봅니다.

한 가지, 편중된 견해의 글에 대해서는 고충이 있었음을 담당자로서 토로한 바 있습니다.

에세이집 공저로서, 각 필자들의 의견,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글은 필자들 개개인의 몫으로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지요.

국내 일반 독자들에게 전공자들의 에세이를 제공하여 일본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궁금증이 얼마간 해소된다면 다행입니다.

이웃나라인데, 너무 모르고 지낸다는 사실이,

정년 후이지만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교수님의 장문의 구체적인 독후감은 저희 필자들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앞으로 코로나가 수그러들면, 필자들 모임을 갖게될 때,

귀한 독후감을 공유하고, 참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격려와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최 재 철 답신 드림.

 

 

20240424 <일본근대문학의 발견> 중에서 제6치유가 되다는 감동적이다.

 

최재철교수의 일본 근대문학의 발견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일본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본 기록문학이 오랜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덕분이다. 다양한 일본 기록문학에 정말 감탄했다.

3-4여 년 전에 목근춘추 제 3일본을 생각하다를 정독하고 감상문을 쓸 때도 일본문학의 저력을 느꼈지만 이번에도 많은 것을 느꼈다. 최교수님의 완벽주의자 다운 책 쓰기도 놀라웠다. 일본 문학자 못지않은 기록과 철저함을 본받을 만하다.

작년에 작고한 오에 겐자부로의 회복하는 가족을 잘 분석한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노벨 문학상을 탄 겐자부로가 장애인 주제를 문학으로 잘 형상화시켰다. 장애아들과 치매 장모와 더불어 사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 수필 형식의 글 번역본을 읽고 싶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견해나 삶은 절대로 다른 게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사는 가족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장애 아이를 도와주면서 온 식구가 깨달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자의 세밀한 관찰과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럽다. 장애아이 주치의의 조심성 있고 정직한 유머덕분에 장애 아이와 식구들이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주치의에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장애아이가 주치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재롱을 떨었다는 이야기는 환자와 의사가 더불어 도와주는 멋진 모습이다. 미국에서 장애 아이를 다루는 의사의 유머가 생각난다. 한국 의사의 무뚝뚝한 태도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문학이 원래는 재미와 엔터테인먼트가 주목적이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문학 같은 예술을 통해서 생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무척 신선한 접근방법이다.

소설이라는 언어의 모델로 소설을 완성하는 것은 자신의 장애아인 아들을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수용하여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학산 김규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체코.슬로바키아어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