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차 러시아, 동유럽 문학․예술 탐방기
(2003년도 여름 한국동유럽발칸학회 소피아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며)
블레트 호수(Blejsko jezero)는 슬로베니아 북서부 율리안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빙하호로 블레트와 접한다. 이 지역 일대는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손꼽힌다.
블레트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있는 교회Church on an Island in the middle of Lake Bled
성모 마리아 승천 순례 교회Pilgrimage Church of the Assumption of Mary 또는 호수의 성모Our Lady of the Lake로도 알려진 성모 마리아 교회는 블레드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여행 잡지에 정기적으로 사진이 실립니다. 이 교회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1534년 파도바의 프란체스코 파타비노가 만든 소원의 종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종을 울리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소원은 하나만 들어야 합니다.
외대유학생 박정현양, 김흥규처장, 안병만총장부부 김흥규교수부인 필자
골프 천국 슬로베니아: 알프스를 향해 멋지게 샷도 날려보다
32. 여행 천국, 알프스 산자락의 아름다운 소국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
슬로베니아는 구 유고슬라비아 중 가장 서구화된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아름다운 나라다. 수도 류블랴나(Ljublijana, 인구 33만 명)는 여느 서구의 도시를 닮아서인지 깨끗하다.
외대 안 병만총장 부부, 김 흥규처장 부부 일행과 함께 프랑크푸르틀 거쳐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도착하니 류블랴나 대학 요제 멘찌게르(J. Menciger) 총장과 이반 레반(I. Leban) 부총장이 손수 차를 몰고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저 먼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사업을 하는 외대 유고어과 출신 동문 황 진덕씨와 류블랴나 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박정현도 함께 나와서 편안하게 호텔로 향했다. 이렇게 머나먼 발칸반도의 작은 도시에서의 첫날밤도 친절한 만남의 덕분에 편안했다. 외대 졸업생이 이처럼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 총장님은 어디를 가나 외대 졸업생 덕에 편안한 여행을 하게 되어 무척 자랑스럽다고 하신다. 류블랴나 시내로 가는 공항도로는 깨끗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슬로베니아는 옛 공산권 국가 중 지리적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고 알프스 자락에 자리하여 일찍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나와 함께 타고 가는 류블랴나 대학의 부총장님의 말씀에 슬로베니아는 티토가 지배하던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도 상당한 자치가 허락되었고 서구로의 여행 등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들의 친절과 도시의 첫인상이 주는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허기사 벌써 개방 된지 14년이나 지났으니 여느 자본주의국가와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체코나 헝가리 폴란드보다 훨씬 잘 사는 분위기다. 국민소득이 구 공산권 국가 주에서 가장 높고 물가도 만만찮다.
류블라나 거리
류블라나 거리 청과상
류블라나 거리
류블라나 거리 이색적인 디자인의 가로등
이튿날 양 대학 총장님과 대학 간의 자매결연 체결을 끝내고 시내 관광, 디너파티 등 즐겁고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광장의 분위기도 좋다. 시인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류블랴니차라 강이란 작은 개울에 다리 3개가 하나로 되어 있는 트롬모스트브예(Trmostovje)가 운치가 있다. 이 다를 건너니 작은 광장에 이름다운 분수가 여름 더위를 식혀 줄것 같다. 이 분수는 1751년 이탈리아 장인 로바(F. Robba)가 만든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이 화려하다. 정면에 시게가 달린 건물이 시청이다. 구시가지 의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프라하의 한 쪽 광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세련 된 도시구조다.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 환경이 깨끗하고 인간적이다. 과학 기술과 예술이 발달한 슬로베니아지만 환경보호에도 정성을 쏟는 것 같다. 트롬모스트브예다리 쪽에서 보면 서울의 남산 같은 높은 언덕 위에 성이 장엄하게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성으로 향하는 언덕길이 가파르다. 성으로 가지 전에 왼쪽 길을 따라가니 광장이 나온다. 바로 보드니코프 트르그(Vodnjkov trg)라는 다양한 과일, 채소 시장이다. 채소와 꽃도 팔고 있다. 동유럽 어디를 가나 생활수준에 비해 꽃의 소비가 많은데 이 나라도 꽃을 많이 파고 사는 모양이다. 남유럽에 가까워 과일이 풍성하고 다양하다. 형형 색깔의 양초들도 팔고 있다. 길가에서 만나는 아릿다운 슬로베니아 여인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니 즐겁다.
세련되고 깨끗한 류브라나 전경
민속공예품
류블라나 성은 이 시를 조망할 수 있고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12세기 로마네스크와 고딕으로 시작 된 성인데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성이 있는 언덕 아래에도 옛 건물들이 아름답다. 또 시가지의 건물들 지붕이 흙벽돌 색이라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성 박물관상점에서 슬로베니아 토속 목각을 하나 샀다.
류블라나 성
류블라나 성
디너파티에는 그곳 현지인 한국 명예 영사도 참석하여 질 좋은 슬로베니아 와인을 소개해주어 멋진 와인 맛을 즐기다. 낮에 잠시 짬을 내어 유학생 박양과 함께 슬로베니아 민속 박물관을 찾았다. 일 년 동안 유학중이지만 이런 박물관에 오기는 처음이라 한다. 어디를 가나 그 나라 민속박물관을 가보면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아니면 성당이나 교회, 미술관을 찾아도 그 나라의 고유한 예술 전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여름철 휴가 기간이라 박물관을 모두 개방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를 보고 자료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후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온 황진덕 동문 덕분에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그림 같은 필드에서 운동을 하는 여유도 가졌다. 저녁에는 각종 자료를 뒤적이며 일기를 썼다.
그다음 날은 아드리아 해안과 유명한 동굴 탐사도 했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긴 카르스트 동굴로, 그 길이가 무려 21km에 달하며 이 중 5km구간이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는 일반인이 동굴을 관람할 수 있는 가장 긴 코스다. 이 동굴 속에는 100여종이 넘는 동물들이 서식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올름(Olm)이라고 하는 동굴도롱뇽붙이다. 일명 장님도롱뇽. 올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양서류로 몸길이는 20~30cm로 가늘고 길며, 눈은 퇴화하여 피부 밑에 파묻혀 있어 명암만 겨우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휴먼피시 (Human fish)라고 불리는데, 사람 피부 색깔과 비슷하고 수명이 100년 정도로 인간만큼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대한 규모의 동굴은 여름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아드리아 해안의 푸른 바다가 나를 유혹했다. 몇 년 전 에게 해에서 보던 그런 쪽빛바다의 유혹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물만 보면 뛰어 들고 싶은 심정이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음은 고향 낙동강 강가에서 자란 탓이리라. 몸은 늙어가도 마음은 젊고 싶다. 나 말고는 일행 아무도 수영복을 가지고 오지 않아, 카메라가방과 옷을 맡기고 혼자서 헤엄을 즐겼다. 모두 들 바닷가에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바다와 내가 번갈아가며 유혹하지만 아무도 물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들어 올 수가 없다. 나는 갑자기 외롭기도 하고 혼자 즐기기가 민망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김 처장님을 손짓으로 불러 물 가까이 오게 하고 물속에서 수영복을 벗어 던졌다.
아드리아 해변: Flying Swimming Pants!
갑자기 날아 오른 수영복에 놀라더니 내 의도를 알아채고 수영복을 주어서 갈아입고 들어온다. 어릴 때부터 수영복이 아니라 옷 하나 걸치지 않고 강에서 헤엄을 즐겼으니 내게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체코에서는 강이나 호수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가 수영을 즐기는 곳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모두들 수영복을 입고 있다. 총장님 일행은 바닷가에서 폭소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물고기처럼 헤엄을 즐겼다. 김 처장은 수영을 제대로 배웠는지 바다 멀리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곳까지 여유 있게 갔다 온다. 내 수영복을 입고 있는 김 처장에게 총장님도 이런 방식으로 수영하러 오시라고 여쭤보라고 하니, 수영복 하나로 여러 사람이 물속에 들어 갈수 있는 내 아이디어는 좋지만 참으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아드리아 해변에서 즐거운 해프닝의 추억을 만들고 해안 식당에서 통 탁 두 마리와 질 좋은 슬로베니아 맥주로 저녁을 즐기다. 저녁 늦게 호텔로 들어와 슬로베니아에 대한 안내서를 펴고 글을 쓰기 시작하다.
남쪽 슬라브의 나라: 유고슬라비아의 유래
동물조각 분수대
류블라나대학교
아름다운 슬로베니아 소녀들
여유로운 선술집에서
거리의 청과장
슬로베니아요리사들
슬로베니아 해물요리 맛이 최고예요
와인의 천국
스코쯔얀 동굴:
슬로베니아가 속했던 구 유고슬라비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발칸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국가로써, 국명인 유고슬라비아(Jugoslavija, 영문표기: Yugoslavia)는 ‘남쪽’을 뜻하는 단어 ‘jug’와 ‘슬라브인의 나라’라는 뜻의 slavija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그 주변국으로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가 있다. 오늘날까지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政體는 역사적으로 3개가 있다. 첫 번째 유고슬라비아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성립된 불가리아인을 제외한 남슬라브족 통합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처음에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으로 성립하였으나,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것이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 정체의 탄생이었다. 두 번째의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성립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며, 세 번째의 유고슬라비아는 1991-2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가 차례로 탈퇴한 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결성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다.
이렇듯 유고슬라비아는 시대적 의미에 따라서 민족구성에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을 둘러싸고 많은 민족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한 결과,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오랜 터키와 외세의 지배이후 민족간의 종교와 관습의 차이 때문에 자주 갈등이 있어왔다. 강력한 티토의 지도력 하에서는 그런데로 함께 잘 살았는데 개방 이후 민족구가로의 독립과정에서 급기야는 민족간의 전쟁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민족주의자 밀로세비치의 타민족에 대한 학살 정책에 대한 댓가로 세르비아 공격으로 구 유고슬라비아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했다. 다행히 슬로베니아는 큰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복잡한 민족 간의 갈등 문제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탄 세르비아의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러한 상황이 현대에도 벌어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고어(語)? 또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일반적으로 유고어는 구(舊)유고연방 내에서 민족구성상 대다수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쓰는 언어를 가리키는 편의상의 명칭이다.
유고어라는 것이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언어를 의미할 경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를 모두 포함하게 되고, 또한 소수민족집단(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유태인, 아랍인, 롬(집시)족 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의 언어를 구 유고연방이 해체되기 이전까지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serbo-croatian)라고 칭했으며, 구 유고연방으로부터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한 이후로는 각각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로 구분해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유럽과 영·미권 국가들의 대학들에서는 이들 언어를 각각 독립된 과로 구분하고 각기 다른 언어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고어과 김성환교수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유고어에 대한 가장 오래된 명칭은 ‘세르비아어’나 ‘크로아티아어’와 같은 단일 명칭이며 각각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일리리아어’는 19세기 슬라브의 언어학자들이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자국어를 달리 부르거나 또는 남슬라브의 언어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였던 명칭이다. 한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라는 명칭은 19세기 초반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단일어로 간주하던 독일계나 헝가리 계통 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에서는 처음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에서 이 명칭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부크 까라지치의 「세르비아어 문법」(1818년)의 서문에서 독일의 야콥 그림(Jakob Grimm)이 사용한 ‘das heisst serbisch-croatishce'이며, 이 서문의 세르비아어판(1826년)에는 야콥의 용어가 ‘세르보크로아티아어'(serbo-hrvatski)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런데 세르비아는 러시아가 사용하는 끼릴문자와 라틴문자를 동시에 사용하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어 등은 라틴문자를 사용한다.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 약사
발트 삼국처럼 슬로베니아는 작은 나라고 500여 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고유한 언어와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인은 6세기 후반 다뉴브강 분지의 계곡과 동부 알프스산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748년 프랑크 왕국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카를대제 때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후 9세기 무렵 신성로마 제국의 지배 하로 편입되었고, 이후 1278년에는 오스트리아 밑에서 독일인의 지배를 받아 서유럽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16세기 초에는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슬로베니아 교회의 대부분은 이 지역 지배 군주인 게르만인들의 영향에 따라 ‘신교’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슬로베니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는 게르만어를 선호하는 지배 계급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슬로베니아어 사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슬로베니아어로 된 신약성경이 출판되었고, 이후 슬로베니아어 문법을 위한 소책자가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슬로베니아 민중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反)종교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슬로베니아인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게르만 영향권 하에서 계속적으로 피 지배 상태로 처하게 되었다.
슬로베니아인의 민족의식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1809년에서 1813년 나폴레옹이 세운 일리아 속주로 편입된 이후부터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합스부르그 제국을 아드리아 지역으로부터 고립시키고자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일부 지역을 포함한 일리아 속주를 건설하고 현재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를 속주의 수도로 삼았다. 나폴레옹 통치하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슬로베니아는 교육, 행정, 법률체계 등을 서유럽 체제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무엇보다도 슬로베니아어가 공용어로 채택됨으로써 민족의식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특히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다시 합스부르그 제국의 지배(1866년 합스부르그 제국과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합스부르그 제국이 패배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지배 하로 편입)하로 들어갔으나, 1848년 파리 4월 혁명의 영향이 슬로베니아에도 파급되면서 슬로베니아인들은 자치를 요구하는 수차례의 시위를 조직해갔고 정치 및 민족의식을 확대시켜갔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슬로베니아인들의 민족 의식이 다시 일어난 시기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해체되고 이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이 건설된 이후부터이다. 양차 대전 사이 슬로베니아는 세르비아의 주도 하에 있던 최초의 남슬라브 왕국에서 나름대로 자치권을 가지며 민족의식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슬로베니아의 상당 지역은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이웃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로 들어가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의 파르티쟌과 함께 슬로베니아 대독 저항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이 결과 제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구축군의 패배로 돌아간 후 1945년 티토하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하에서 6개 공화국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하에서 슬로베니아는 구성 공화국중 하나로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하고 난 후 유고슬라비아 구성 공화국들 사이에선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갈등들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일련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 1987년 코소보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 사이의 소요사태를 조사차 내려갔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쉐비치가 강한 민족주의 발언을 통해 세르비아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코소보에 대한 자치권 폐지와 더불어 연방 내에서 세르비아 공화국의 정치 주도권을 가시화하려 하자, 슬로베니아의 불안감은 더욱 증대되게 된다. 이러한 불안 심리는 슬로베니아가 1980년 티토 사망이후 계속적으로 추진해 온 연방 탈퇴 의지와 서유럽으로의 접근 전략을 더욱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에서도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게 된다. 1990년에 있었던 다당제 선거와 국민 총선을 통해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탈퇴와 사회주의 청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어 슬로베니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밀란 쿠찬 대통령은 1991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슬로베니아의 연방탈퇴를 선언하였다. 독립선언 직후 슬로베니아에선 슬로베니아 시민군과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 간에 10일간의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슬로베니아 내 영토적 요구와 세르비아 소수 민족문제등과 관련한 요구조건이 미흡하였던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군(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장교 중 세르비아 출신이 약 70%를 차지)은 당시 EC의 중재 하에 슬로베니아로부터 연방군의 퇴각을 비롯한 휴전협정안에 동의하게 된다. 이어 슬로베니아는 독립 공화국을 위한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고, 1992년 1월에는 유럽 연합 공동체로부터, 이어 1992년 5월에는 UN 가입을 통해 국제 사회에 주권국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이어 슬로베니아는 1993년에 IMF와 세계은행에 그리고 1994년에는 WTO와 GATT에 가입함으로서 국제 경제에 있어서도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2004년부터는 EU에 가입하기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참으로 작은 나라 독립에 우여 곡절이 많다. 이에 비하면 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아주 민주주의적으로 독립하였다. 이 피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분리 독립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벨벳 이혼’이라고 부른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11월 27일 구 공산권정부로부터 자유화 될 때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벨벳 혁명’이라고 불렀다.
프란체스카 성당 내부
류블라냐 프레세레노브 광장. 시민과 여행객의 휴식공간으로 주말마다 다채로운 콘서트와 이벤트가 개열린다. 프란체스카 성당과 슬로베니아의 민족시인인 프란체 프레세렌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광장 주변에 즐비한 노천 선술집과 카페에서 요기를 떼우자.
구비문학의 나라
발트의 소국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들과 슬로바키아 등이 구비문학의 천국이 듯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한 슬로베니아를 비롯하여 구 유고지역은 구전문학이 풍부한 나라다. 19세기까지 마케도니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구전되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외대 유고어가 김상헌 박사에 의하면 유고슬라비아 구비문학의 갈래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여러 민족은 수세기를 걸치며 정치적인 분열을 겪었고,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로 매우 밀접한 영향 관계 속에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수세기를 걸치며 유고슬라비아 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던 주민들의 잦은 이동에 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쓰이는 언어들은 서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한 언어로부터 또 다른 언어로의 이동, 그리고 한 방언에서 또 다른 방언으로의 이동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 구비문학 작품이 쉽게 유고슬라비아의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5세기부터 세르보크로아티어가 쓰이는 지역에서는 방언의 경계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 출신이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서로 간에 별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구비문학작품을 하나의 체계로 엮고,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그리고 한 민족에서 또 다른 민족으로 전파·전승될 수 있도록 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밖에도 유고 구비문학 자체가 작품내용의 근본에 있어서 하나의 전체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전승을 쉽게 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근본적인 작품내용이 하나의 전체적 체계를 이룬다는 사실은 광역성을 지니는 모든 유고 구비문학갈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즉, 구비서사시에 있어서 그리고 대부분의 구비산문에 있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모티프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통해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구비서사시(epska pesma), 민담(bajka), 우화(basna), 일화(anegdota) 등에서 보여 지는 작품내용들은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국내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티프를 비롯한 내용적인 면의 유사성이 유고 구비문학작품의 모든 갈래가 유고 국내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구비영웅서사시(narodna junačka pesma)의 경우에 그 발전의 근거지가 되는 곳은 15세기 이후 가부장제 문화를 가지고 있던 지역과 변형된 가부장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 즉, 오스만 투르크(터키)에 대항하여 전투를 치루었던 코소보지역을 그 근거지로 삼는다.
중세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강하고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하이두크(Hajduk: 유고슬라비아가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당했을 때, 산과 숲에 숨어 지내며 오스만 투르크군의 학정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일반 민중들을 보호했던 의적집단으로 조선의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인물이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구비영웅서사시의 발원지인 그 지역으로부터 점차 주변지역으로 구비문학갈래의 하나인 구비영웅서사시는 퍼져나가게 된다.
일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전통악기와 함께 노래하는 방식을 택하는 구비서사시류는 특히 지중해문화권 지역, 아드리아 해안지역, 도서(島嶼)지역,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가부장제 문화권, 슬로베니아인들과 마케도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창작되었고, 그들 지역으로부터 다시 내륙의 가부장제문화권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민담과 우화는 구비문학의 갈래 가운데서도 오래된 갈래로써 유고슬라비아의 전 지역에 걸쳐서 전체적인 내용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과거 6개의 공화국(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로 구성되어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1990년대의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을 통해서 서로 다른 국가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개별 국가로의 독립이라는 외적인 영향이 같은 남슬라브인이라는 문화적·언어적·역사적 동질성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다. 특히 같은 남슬라브어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언어적 유사성이 이들 독립 공화국들의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유대관계를 보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언어는 외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언어가 살아있고, 우리가 그 언어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언어로 말하고 쓰며, 정제하고 풍요롭게 하고 꾸미는 한 민족은 건재하다. 그렇게 한다면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단결할 수 있으며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거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은 없다.” (부끄 까라지치)
민중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공통된 말과 문자로써 유고슬라비아 민족의 단합과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던 부끄 까라지치는 민중언어의 중요성을 위와 같이 강조했다. 이는 또한 민중들의 언어로 된 구비문학작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동유럽의 작은 어느 나라를 가나 나름대로의 문화와 언어 독립을 유지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러한 것은 역시 언어다. 내년부터 EU에 슬로베니아가 가입하고 또 먼 훗날 세계가 지구촌으로 한데 묶일지라도 민족의 고유성은 유지되고 존중되어야한다. 누구나 모국어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요 민족문화 창조의 기본이다.
슬로베니아 민족 문학
1518년 달마틴(Jurij Dalmatin)은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최초로 번역.
성경번역은 민족의 중흥을 가져온다.
체코는 독일 문화, 유태인 문화, 슬라브족인 체코문화 등이 어울려져 독특한 문화의 보편성 속에 민족문화를 꽃피웠듯이, 슬로베니아는 역사적으로 인근의 오스트리아(독일권)문화, 로마문화, 슬라브문화의 교차지로서 인접 3개 문화와의 연계된 요소가 많다.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처럼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슬로베니아인들의 문자해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킨다. 1518년 달마틴(Jurij Dalmatin)은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최초로 번역하고 보히리치(Adam Bohiric)는 슬로베니아어 문법서를 저술하여 문화적 기초를 세웠다. 체코의 크랄리쩨 성경, 독일의 루터판 성경처럼 성경이 민족어로 번역되면 그 민족의 언어는 획기적 발전을 한다. 희곡 및 시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 융성하였으며, 시인으로는 보드닉(Valentin Vodnik), 희곡작가로는 린하릍(Anton T. Linhart)가 유명, 이들은 작품을 통해 불란서혁명과 계몽주의의 자유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변호사겸 시인이었던 프레세레(France Presere)는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민족시를 통해 슬로베니아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그의 시 「축배」(Zdravljica)는 슬로베니아국가의 가사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슬로베니아에서도 소설이 널리 인기를 얻었으며, 당시 소설가 중에서 유리쯔(Josip Juric)이 유명한 바, 문화평론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세기 초 문학작품은 유럽의 상징주의와 퇴폐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인으로는 알렉산드로프(Murn Aleksandrov), 케테(Dragottin Kette)가 저명하고, 희곡작가 짠카르(Ivan Cankar)는 산업화 및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범 유고슬라비아 사상을 전파하였다.
인구 200백만도 채 안되고 우리한반도의 1/10도 안 되는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는 구 공산권 민족 중 가장 서구화되었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류블랴나 시 언덕에 자리한 고 성곽의 분위기도 너무 좋다. 나무 장식이 민속 공예품이라 작은 것을 하나 샀다. 음식도 풍부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유창한 영어 또는 러시아어도 잘 한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만의 민족어를 잘 다듬고 발전시키고 살아가고 있다. 내일은 일찍이 비행기 편으로 빈을 경유하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가야한다. 소피아에서 한국동유럽발칸학회 제 3차 국제학술 대회가 있고 총장님일행과 소피아대학과의 자매결연도 있다. 학회는 내가 회장을 맡고 있어 기조연설문을 총장님께 보여드리고 교정도 좀 봐야한다. 잠이 쏟아진다. 여행 중에는 머니마니 해도 잠이 최고다. 잠은 보약 같은 존재다. 좋고 싼 먹거리, 알찬 볼거리 그리고 휴식을 위한 잠, 내일의 다양한 스케줄을 감당해야하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잠, 이는 여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오늘은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의 밤은 깊어간다.
언젠가 한국에 아주 소중한 철학자가 왔었다. 유럽이 오늘날 철학의 위기라고 하는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에 지젝이 바로 그다. 서구와는 색다른 환경,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갈등 등 서유럽과 중부유럽 또는 동유럽 문화의 충돌을 경험한 그에게서 서구는 새로운 사유세계를 기대하는 걸까? 작은 나라 헝가리 태생의 수많은 과학자와 발명가, 작은 나라 체코 태생의 음악가, 아이디어맨과 스포츠 선수들 다들 인류 문명에 공헌하고 있다.
김상헌 박사가 번역한 세르비아 이야기와 민요를 읽으며 잠들다. 세르비아는 언제나 자기들을 지배했던 터키인들에 대한 저항정신이 이야기나 생활에 배여 있다. 유럽에서는 유태인들에 대한 일화, 미국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농담, 한국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조롱, 체코에서 러시아인들에 대한 에피소드 등이 흔하듯이. 아래에 소개하는 일화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김상헌 박사의 번역에 감사하고 싶다.
저 세상에서 온 에로 이야기
한 터키인이 남자가 터키인 여인과 함께 옥수수를 수확하고 있었는데, 정오가 되자 그 터키인 남자가 말을 끌고 먹이를 주러 갔고, 터키인 여인은 그늘에서 쉬려고 남아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에로(에로Еро는 헤르쩨고비나 지역 출신의 사람을 일컫는다)가 나타났다.
“안녕하시오, 부인!”
“당신도 안녕하시오! 그런데 어디서 오는 길이시오?”
“부인! 난 저 세상에서 오는 길이라오.”
“정말! 거기서 몇 달 전에 죽은 나의 무요를 보지 못했소?”
“오! 어떻게 보지 못했겠소! 그는 나의 바로 이웃이라오.”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살고 있소?”
“신께 감사하오! 건강하지만, 용돈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지요. 담배를 살 돈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실 돈도 없다오.”
“다시 돌아갈 거요? 그에게 용돈을 좀 보낼 텐데, 가져다줄 수 있겠소?”
터키인 여인은 남편이 더위 때문에 옷을 벗어놓은 곳으로 달려가, 돈주머니를 잡고 그 안에서 잡히는 대로 무요에게 가져다주라고 에로에게 주었다. 에로는 돈을 받아들고 가슴에 품고 냇가를 따라 도망쳤다. 에로가 냇가를 따라 도망쳤을 때, 물을 먹이려고 말을 데려갔던 터키인 남자가 나타났고, 그의 앞에는 터키인 여인이 있었다.
“여보! 그쪽으로 지금 저 세상에서 온 한 남자가 지나갔소. 우리 무요가 용돈이 없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구려. 담배를 살 돈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실 돈도 없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에게 전해주라고 당신의 주머니에 있던 돈을 주었소.”
그러자 터키인 남자가,
“어디로 갔소? 어디로 갔단 말이요?”
부인이 그에게 냇가를 따라 가버렸다고 가르쳐주자, 그는 안장도 없는 말에 뛰어올라 냇가를 따라 말을 몰았다! 에로가 뒤돌아 터키인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에로의 뒤를 쫓았고, 에로는 달아났다! 언덕아래의 한 물레방앗간에 다다랐을 때, 그는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물레방앗간지기에게 소리쳤다.
“도망쳐, 너의 어미는 불쌍하기도 하지! 저기 터키인 남자가 당신의 목을 베려고 오고 있소. 그러니 나의 모자를 당신에게 줄 테니, 당신의 모자를 나에게 주고 물레방앗간 근처, 저기 언덕 위로 도망치시오.”
말을 타고 달려오는 터키인 남자를 본 물레방앗간지기는 겁을 먹고, 왜 자신의 목을 베려하는지 물어볼 사이도 없이, 에로에게 자신의 모자를 주고, 에로의 모자를 자기가 쓴 채, 물레방앗간 위 언덕으로 도망쳤다. 에로는 물레방앗간지기의 모자를 쓴 채, 밀가루를 조금 뒤집어쓰고, 진짜 물레방앗간지기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때 물레방앗간 앞에 도착한 터키인 남자는 말에서 내려 물레방앗간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지금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온 이러이러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로 갔소?”
에로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언덕 위로 달아나는 그가 있지 않소.”
그러자 터키인 남자가,
“내 말을 좀 잡고 계시오.”
에로가 말을 잡고 있는 동안, 터키인 남자는 언덕 위로 물레방앗간지기를 따라 이리 저리로 냇가의 숲을 따라 쫓아갔다. 터키인 남자가 그를 붙잡았을 때,
“빌어먹을 놈, 어딜 도망치려고! 내 아내를 속여, 저 세상의 무요에게 가져다준다고 한 돈은 어디 있지?”
물레방앗간지기는 십자가를 그으며 우물우물 말했다.
“어르신, 신이 함께 하시길! 난 당신의 부인도, 무요도, 돈도 보지 못했소.”
그렇게 그들이 제정신을 찾을 때까지 한 시간 가량이 흘렀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터키인 남자는 물레방앗간의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갔을 때, 에로는 이미 말을 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터키인 남자는 지팡이를 감아쥐고 걸어서 부인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혼자 돌아 온 그를 본 부인은 소리쳤다.
“어디 갔었소, 당신! 무슨 일을 한 게요?”
그는 말했다.
“빌어먹을, 당신은 그에게 커피와 담배를 살 돈을 보냈지만, 난 걸어 다니지 말라고 말을 보내주었소.”
어둠의 세계
어떤 황제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세상의 끝,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떻게 다시 돌아 나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 어둠으로부터 암말을 따라 나올 수 있도록 망아지를 입구에 남겨놓았다. 암말을 따라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발아래에 어떤 조그만 돌들이 느껴졌고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돌을 가져가는 사람은 후회하게 될 것이고, 가져가지 않는 사람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후회할거라면, 왜 가져가야 하지?”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만 가져가자.”
어둠으로부터 세상에 나와 보니, 그것은 보석이었다. 그러자 그것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인간이 어떻게 팔십 년을 살게 되었을까?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단지 삼십년만을 살도록 하려고 했었다.
“너는 내가 만든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황제로 군림할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했다.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하게 단지 삼십 년을 살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황제로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지만, 짧은 삶은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 다음으로 당나귀를 만들고서 말했다.
“너는 가장 안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고, 절대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너의 이름은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고, 무거운 짐을 끌고 열심히 봉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으로 인간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맞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삼십 년을 살게 될 것이다.”
당나귀가 대답했다.
“신이시여,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거라면 삼십 년은 저에게 너무나 깁니다. 십 년만 살수는 없을까요?”
신이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그걸 보고 있던 인간은 헛기침을 하고 안달하며 말했다.
“신이시여, 당나귀가 원하지 않는 그 이십 년을 저에게 주시지요.”
신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네가 갖도록 해라!”
인간은 이십 년을 더 얻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너무나 기뻐했다.
그 후 신은 개를 만들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지 너를 부르면, 계속해서 그 사람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위험을 느끼자마자 짖어야 하며, 그 위험은 멀리서도 느끼게 될 것이다. 꿈도 휴식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른 시간에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지 못할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하게 될 것이다. 너도 삼십 년을 살 것이다!”
개가 말했다.
“신이시여, 제 인생이 그렇게 평탄치 못하다면, 십 년만을 살면 안 될까요?”
신이 말했다.
“좋을 대로 하거라, 원한다면 십 년을 살거라.”
인간은 또 다시 헛기침을 하며 다가서서 말했다.
“신이시여, 개가 버린 그 십 년을 저에게 주십시오.”
신이 말했다.
“이러이러한 십 년을 너에게 주마.
자신의 일생이 그렇게 길어진 것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나 속으로 기뻐했다.
마침내 신은 원숭이를 만들었고, 원숭이에게 말했다.
- 인간과 많이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가 될 것이다. 나무를 따라 기어 다니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다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는 채, 따라 할 것이다. 너도 삼십 년을 살게 될 것이다!
원숭이가 말했다.
- 신이시여, 그런 인생이라면 이십 년이면 저에게 충분합니다. 삼십 년을 저에게 너무 많아요.
신이 원숭이에게 대답했다.
-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인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신이시여, 원숭이가 원하지 않는 그 십 년을 저에게 주십시오.”
신이 말했다.
“이러이러한 십 년을 너에게 주마.”
민요
가장 아름다운 향기
“오 여인이여, 나의 사랑스런 이여,
당신의 가슴은 어떤 향기가 나는가?
마르멜로 향기인가, 오렌지 향기인가,
밀짚꽃 향기인가, 나륵풀 꽃향기인가?”
“오, 신이시여, 젊은 영웅이여,
나의 가슴은 향기가 나지 않아요
마르멜로 향기도, 오렌지 향기도,
밀짚꽃 향기도, 나륵풀 꽃향기도 -
단지 여인의 영혼의 향기만이.”
세르비아 여인(愛情詩)
밀리짜의 긴 눈썹,
그녀의 붉은 광대뼈,
광대뼈와 흰 얼굴.
난 그녀를 삼 년 동안 지켜봤네,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네,
검은 눈도, 흰 얼굴도,
벌써 여인들이 콜로를 위해 모였네,
콜로 속에 여인 밀리짜도 -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네.
풀밭 위에서 콜로가 시작되었을 때,
날이 맑았네, 하지만 먹구름이 끼었네,
구름사이로 번개가 쳤네.
모든 여인들이 하늘 쪽을 바라보았네,
여인 밀리짜만 바라보지 않았네,
자기 앞의 푸른 풀밭을 바라보았네.
여인들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네,
“오, 밀리짜여, 우리들의 친구여,
미친 것인가, 아니면 너무 현명한 것인가,
넌 푸른 풀밭만을 바라보는구나,
우리와 함께 구름을 바라보지 않고,
구름 사이로 감아 도는 번개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고?”
그러자 여인 밀리짜가 말했네,
“미친 것도, 너무 현명한 것도 아니라오,
구름을 휘감고 있는 요정도 아니라오,
단지 자신의 앞만을 바라보는 여인이라오.”
류블라나 전차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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