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2. 발칸의 문화도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매혹

Kyuchin Kim 2019. 4. 11. 20:44

   

 

22. 발칸의 문화도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매혹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사원 1924년 8.24일 봉헌 러시아불가리아 화가들 참여:

Famous Russian and Bulgarian artists were involved in painting its icons and frescoes: Viktor Vasnetsov, Vasily Savinsky, Grigoriy Myasoyedov, Alexander Kiselyov, Nikolay Bruni, August Rosenthal, Anton Mitov, Ivan Mrkvička.

네프스키Alexander Nevsky는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대공후(12521263)

 

 

 

 

 

                               이콘화

이콘(ikona)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미지(image)라는 뜻역시 불가리아의 이콘 그림을 이해하면 불가리아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콘(ikona)은 원래 그리스어로 이미지(image)라는 뜻으로 성인의 초상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의 정교회 즉 동방정교회의 성상화의 총칭이다. 초기 기독교 전파시기에 성경의 번역과 이해에 한계가 있어 일반 신자들이 성당이나 교회에서 그림을 통해 성자와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수단으로 벽화나 목판화로 전래되었다. 일명 이콘화는 색채속의 신학, 성경이라고도한다. 기독교 초기에는 성화나 성상을 제작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이슬람사원은 지금도 성인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러 민족에게 퍼지자 성경의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교리나 성서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화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콘화

 

불가리아는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남쪽, 발칸반도에 자리한 남한 크기의 조그마한 나라다. 1차대전시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선 덕분에 인접국가인 터키, 유고, 루마니아 등에 영토를 빼앗겼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동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 인구는 800만여 명이다. 그중 남슬라브 민족의 하나인 불가리아인이 대부분이고 회교를 믿는 터어키족의 후예들과 아르메니아 민족과 그리스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종교는 비잔틴 시대의 러시아처럼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여 민족 종교회한 불가리아 정교를 믿고 있으며 이 동방 기독교 문화의 특징인 수도원 건축과 벽화, 이콘 성화가 불가리아 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4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 문화를 끈질기게 유지한 것도 수도원 덕분이다. 수도원은 불가리아 역사를 통해 기독교 문화 뿐만 아니라 세속 문화, 민족 교육의 중요한 기관이었다. 불가리아는 다른 슬라브 나라에 비해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의 하나이다. 하지만 따뜻한 발칸반도에 자리한 덕분에 푸른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트라키아지방, 북쪽의 하얀 눈이 쌓이는 높은 산맥, 특산물로 여행객의 관심을 끄는 장미향기 넘치는 카잔루크의 계곡, 하얀 모래밭, 푸른 물결의 바다가 있는 흑해의 연안의 휴양지 등 천연적인 혜택을 받은 나라다. 지난 40여 년 간 이 나라를 지배한 공산주의 도그마에서 제대로 헤어나지 못해 비옥한 평야, 잘 정돈된 경작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1년도 소피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앞에서 필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거리는 현대 도시 면모를 갖추었다. 깨끗하고 넓은 거리들, 아름다운 연인들, 가로등, 교통신호, 넓고 잘 꾸며진 공원, 야외 카페 등, 먼지의 도시 서울과 비교하면 마치 천국같이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비록 호화찬란한 백화점이나 고급 레스토랑과 술집이 많지는 않지만. 소피아는 지난 세기말부터 터키로부터 해방된 후 본격적으로 수도로 개발된 도시다. 터키식 모스크가 시 중앙에 남아있다. 풍부한 이콘화의 보고와 현대 서양화의 맥을 잇는 미술관, 화랑들이 많다. 집시 백파이프연주자의 오묘한 선율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 넘치는 소피아의 거리, 저녁 고급 호텔 앞 야외 카페에는 꽃을 든 여인들의 눈길이 매력적이다. 먼저 말을 걸때까지는 끼리끼리 모여 코코아나 커피를 즐긴다. 터키계의 까마잡자한 처녀들, 불가리아 특유의 미를 자랑하는 매혹적인 미인들이 많은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팔등신 미녀들을 제외하면 이곳 아가씨들의 아름다움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더 상냥해 이콘 속의 성화의 화신 같다. 인형 같은 처녀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반면에 키는 작지만 혼혈족의 가슴이 벌어진 불가리아 남성들은 활동적이다. 불가리아 여인의 빼어난 미처럼 이 나라의 아름다움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이콘, 회화, 건축, 음악, 시 등에 잘 표현되어 있다. 소피아는 특산물인 장미향수와 더불어 예술과 미의 도시다.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 속 창작 고전문학 복간 작업 활발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는 우리 한국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나 물자의 부족으로 신간, 잡지, 신문 발행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가 소피아 대학의 불가리아 문학 교수 촐라코프와의 인터뷰에서 받은 인상은 급변하는 자유화, 민주화 과정에서 지식인 봉급자들은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동부, 중부유럽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덕분에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작가, 예술가들이 창작생활을 활발히 하고 있고 지난 반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복간되고 있어서 20세기말의 불가리아 문학, 예술상황은 고무적이라고 한다.

불가리아 반체제 소설가 겸 극작가였던 게오르기 마르코프의 작품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68년도 체코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에 고무되어 선동적인 풍자극을 썼다가 정부의 검열에 걸려서 작품활동을 중지 당하자 망명하여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8년 당시 공산당권력자 지프코프(1989년 실각)를 비판하다가 영국에서 암살당했다.

고대 불가리아 문학은 그리스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인 보리스왕 때(852-889) 시작됐고 불가리아 대제국을 건설한 시메온 황제(893-927)가 프레슬라프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작가, 신학자, 문헌학자들에게 연구할 기회를 부여했다. 당시로 볼 때 계몽된 이 군주는 이런 학자들과 함께 수도원을 통해 불가리아 장래의 문화적, 정신적 공동체를 실험했고 새로운 슬라브-불가리아 문학의 수준을 높였다. 보리스왕이 세운 플리스카 도시와 더불어 불가리아에서는 플리스카-프레슬라브 학파라 불린 첫 고대 불가리아어 학교가 세워졌다. 슬라브 나라에 문학과 성서를 전한 찌릴(키릴)과 메토디우스(메포지)가 번역한 교회 관련서적의 필사본이 나오고 그들의 제자인 나움은 새로운 고대 불가리어 문학을 만들었다. 이는 현재 불가리어의 기본이 된 키릴 문자이다. 이후 약 14세기 터어키 족에게 독립을 빼앗기기까지 불가리아는 남 슬라브 특유의 민족문화를 이룩해 왔다.

촐라코프 교수에 의하면 불가리아 현대문학은 불가리아가 독립한 1878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주도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 예는 상징주의 시를 쓴 트라야노프, 바조프, 디미트로바 등이다. 특히 양차 대전 사이 불가리아 문학은 다른 중부유럽국가들처럼 서구수준의 문학창작에 열을 올렸는데 주로 문학잡지 황금뿔이 문학계를 주도하며 대부분의 주요 작품들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요프코프는 장편, 단편 소설 및 희곡을 썼고 서정시인 바그fi나는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모더니즘과 인터내셔널리즘 입장을 견지했다. 라이쩨프는 적나라한 성 묘사로 뛰어난 작가로 많은 단편을 써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불가리아 지식인들은 유태인들을 제외하고는 나치 전쟁 시기에 큰 수난은 겪지 않았다. 1944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요되고 이 노선을 따르지 않는 문학가, 예술가는 어느 정도 수난을 받았다. 작품발표의 기회를 상실 당하고 몇몇은 처형되었다.

스탈린 사후 다른 동구라파 나라처럼 문학, 예술계도 해빙기를 맞이했다. 달체프를 비롯, 스탈리니즘에 동조하지 않고 침묵했던 작가들이 빛을 보았다. 60-70년대 젊은 시인들이 이런 선배작가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감을 받고 열심히 외국 문예사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당시 역사소설이 크게 번성했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탈례프, 스타네프가 있으며 돈체프는 터기 지배하의 불가리아인들의 이슬람교 전향문제를 다룬 명작 이별의 시대를 썼다. 현대사회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운 작가로는 베쥐노프, 하이또프 등이 있다. 그들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불가리아 민족 전통문화를 문학창작 속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넵스키 성당의 위용

소피아 관광은 중앙에 있는 레닌 광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광장 남쪽에는 성 일요일 성당 (Tzarka Sveta Nedelya)이 자리하고 있다. 비토샤산을 향해 나 있는 비토샤 대로를 따라가면 불가리아 역사 유적의 보고가 있는 민족 역사 박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로마시대 불가리아 모자이크부터 오토만 제국시대에서 살아남은 종교적 성화인 이콘화가 독특하다.

그 다음 루스키대로 (러시아 대로) 시작되는 곳, 데베티 셉템브리(99일이란 뜻)광장에 파르티니야트 돔(Partiyniyat Dom, 옛 공산당사 건물)이 있는 광장 건너편에는 대 모스크가 있는데 현재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불가리아의 여러 민족의 문화 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그 다음 루스키 대로를 좀 따라 올라가면 국립 미술관 (Natzionalna Hudozhestvena Galeria)가 있는데 이곳에는 불가리아 미술의 보고와 유럽 미술의 콜렉션이 볼만하다. 특히 현대 불가리아 그래픽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다. 소피아는 곳곳에 러시아의 거리이름,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딴 정교회, 기념관이 있다. 이는 1878년 러시아 군대가 터어키 족을 몰아내고 불가리아를 500여년 만에 해방시켜 동방 정교회 문화권에서 독립을 유지하게 한 덕분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금세기 초 해방군 러시아인을 기리기 위해 불가리아인이 세운 거대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기념 성당이다. 이는 번쩍이는 금색 돔 지붕을 가진 신 비잔틴 건축양식이며 정교회의 신비함을 띄고 있다. 이는 현대의 소피아 시의 상징이며 관광객의 입이나 글에 항상 오르내리는 명물이다. 그 내부에 진열된 수많은 이콘화는 장관이다. 내부는 석고(雪花), 얼룩마소(onyx), 이탈리아 대리석, 베네치아 모자이크, 5천여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회당이 있다. 일요일 예배 때 장엄한 합창단(러시아 정교회처럼 일체 악기를 사용하지 않음)의 찬송가는 신비롭기조차 하다. 지하 박물관(Crypt museum)의 이콘화 걸작 콜렉션 규모는 불가리아 최대다. 반면 광장 건너편 모퉁이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작은 규모이나 6세기 건축 양식을 띄고 있고 소피아 도시 이름이 유래된 곳이며 소피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의 하나이다.

소피아는 유럽에서 오래된 도시의 하나지만, 현대적 감각이 넘친다. 소피아 시민들의 코트에 박힌 문장에는 영원히 성장하나 결코 늙지 않는다.라는 모토가 바로 이 도시의 전형적 특징인 젊음과 활력을 표현하고 있다. 탈공산주의 이후 다른 동부, 중부유럽의 도시처럼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나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