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2. 정교회 문화가 꽃핀 남 슬라브의 유혹: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Kyuchin Kim 2019. 4. 15. 16:34

12. 정교회 문화가 꽃핀 남 슬라브의 유혹: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

 

 

베오그라드 야경

 

 

 




 

세르비아 예술과학 아카데미 (Serbi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 아르누보 양식의건물

 


성 사바 성당 hram Svetog Save

베오그라드의 브라촤르(Opština Vračar)에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정교회 건축물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성 사바 성당(Hram Svetog Save / Saint Sava Temple)이 위치하고 있다. 발칸반도에서 제일 큰 성당,

 

 

성 사바 내부

 

 

 


 

유고의 인종문제, 새로운 정치제도와 경제문제 등을 다룬 英字주간지 정치’(Politika)를 다 읽기도 전에 바르샤바를 떠난 비행기는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공항에 도착했다. 비자가 없어 걱정했으나 즉석에서 무료로 비자를 발급해 준다. 자유여행을 추구하는 변모하는 유고슬라비아를 실감했다.

외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데레티치 교수의 아파트단지가 있는 신 베오그라드까지는 택시로 15분이 걸렸다. 침실하나, 거실하나, 작은 부엌과 작은 식당으로 구성돼있는 데레티치 교수의 아파트는 유고문학서적과 미술관계서적으로 가득하다. 다른 사회주의국가와 마찬가지로 지식인인 교수의 살림은 초라하게 보였다. 여대생인 딸과 함께 이 작은 아파트에 어떻게 사는지 의아스러웠다.

 

 

  크네즈 미하일로바(Кнез Михаилова) 거리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보행자 전용 거리다.  식당, 카페, 기념품점  등 베오그라드의 다양한 상점들이 모여있다. ‘하얀 도시’라는 명칭 답게 회백색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공화국 광장 중심에 세워진 동상은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로, 1867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킨 민족의 영웅

 

가지고 다니던 라면이 떨어져 밀가루와 감자 양파 등을 사서 수제비를 끓여먹고 베오그라드중심가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로 갔다. 천천히 다니는 전차와 함께 수많은 인파가 따스한 저녁 공기 속에 맥주를 마시며 여름밤을 즐기고 있다. 까만 머리를 한 키 큰 서양인의 모습, 갈색머리에 키가 작은 터키계 사람의 모습 등 시민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처럼 민족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물론, 그들이 창조한 문학 미술 건축 등 예술품도 다양성을 자랑한다. 동과 서의 교량역할을 하면서 서양민족(로마, 오스트리아 등) 지배 속에 있을 때는 서양풍의 문화를, 동양의 지배(14-17세기 터키)를 받을 때는 이슬람문화를 창조한 독특한 문화이다. 이러한 유고의 문화는 유럽 모자이크문화의 한 표본이기도 하다.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공화국인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은 다섯 부류이며, 종교는 그리스정교, 카톨릭, 이슬람 등 셋으로 나누어져있다. 문자는 끼릴문자와 라틴문자 두 가지가 사용되고 주요언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등 남 슬라브어이 있으며, 슬라브어계로는 알바니아와 헝가리를 사용하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유고는 의사소통에 별지장이 없다. 필자도 西슬라브어의 하나인 체코어와 슬라브어의 하나인 러시아로 베오그라드시민과 쉽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이는 슬라브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무렵(9-10세기) 공통의 교회 슬라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어떤 수도원에서는 실제로 19세기까지 이 교회 슬라브를 사용했다고 한다.

세르보크로아티아19세기의 위대한 세르비아 언어학자 부크 S. 까라지치가 언어개혁을 통해 문학어를 채택했다. 크로아티아민족은 류데비트 가이란 인물에 의해 까라지치가 채택한 슈토지방어를 文語로 사용했다


 



이보 안드리치 교실

 

노벨문학상 작가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

    

 

드리나의 다리




 

    드리나의 다리

 

이 작품은 1900년대 초 폴란드의 작가 시엔케비치의 <쿼바디스>를 연상시키고 세계 제1대전을 다룬 체코의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반전 풍자소설 <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모험>(1923)을 연상 시킨다. 이보 안드리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와 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드리나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400여 년의 인간사를 다루고 있다. 지리적·종교적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이 작품의 주 무대인 드리나 강의 다리가 세워지면서 만나고 교류하게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다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인간사를 지켜보는 증인이자 그와 대비되는 영속성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 부모한테서 태어나고 사라예보에서 교육을 받은  구 유고슬라비아의 가장위대한 작가는  1961<드리나의 다리, 1945>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1892-1974)이다. 그는 청년시절 청년 보스니아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오스트리아 정부에 체포되기도 했다. 일찍이 월터 휘트먼 등 서구번역시집을 출판하면서 문학수업을 하였으며 산문시집 <엑스폰토, 1916>, <불안, 1920> 등을 출간하고 곧 산문에 몰두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고향 보스니아지방을 다룬 단편집을 1924, 31, 36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외 <보스니아 연대기, 1963>. <처녀, 1945>, <저주받은 안뜰, 1962>등 대작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유고 주요작가들의 비평서를 썼다.

그의 대표작 <드리나의 다리>는 보스니아지방 비쉐그라드 마을을 확대 묘사한 기념비적 서사시이다. 드라나위의 다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 지역의 역사적 연대기로 자연의 힘과 인간의 파괴성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에 몰두하는 여러 세대의 모습을 장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칼레메그단Калемегдан 요새

 

세르비아공화국의 수도이자 연방공화국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한때 로마제국의 요지였으나 그때의 유적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다. 긴 역사동안 수많은 戰禍의 세례를 받아 파괴되었으며 재건축이 되풀이됐다. 돈강과 사바강의 넓은 합류지점에 있는 옛 베오그라드의 요새인 칼레메그단 성벽이 로마제국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전제군주 스테판 시대(15세기) 건축물의 흔적인 성벽이 남아 있고 다른 성벽은 오스트리아제국 시대에 축조한 것이다. , 성벽의 문, 시계탑, 옛 로마시대의 우물 등이 베오그라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 이 칼레메그단 성은 도시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며 곳곳에 아름다운 조각 작품이 있다. 가장 크고 예술성이 뛰어난 것은 승리자라는 조각으로 유명한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이다. 칼레메그단 공원의 실내 및 야외에 자리한 軍事박물관은 베오그라드 및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서류와 무기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공원 주위에는 19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성당과 류비짜 공주의 안가와 17세기 바이라클 회교 사원이 있어 서방과 동방문화의 혼합을 보여준다.

또 이곳에는 세르비아민족의 최초 고등기관 건물이 있다. 이는 현재 세르비아 근대문화의 두 거장인 부크 까라지치와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매력적인 박물관은 국립박물관이다. 여기에는 유사 이전의 유물부터 중세 고전주의 예술품뿐 아니라, 미술관, 민속관, 프레스코 미술관, 세르비아 민족의 정교회 유물관 등이 있으며 세르비아민족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미술관엔 세르비아의 가장 위대한 화가 파야 요바노비치(1859-1957)닭 싸움’, ‘신부’, ‘두샨의 결혼등이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층 서양미술관에는 드가, 르누아르, 피카소, 디피 등의 작품도 있다.

세르비아 문화 유산은 역시 독특한 정교회 건축 양식과 프레스코, 이콘 등이다. 정교회 건축양식과 미술은 세르비아뿐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남부 유럽의 고대 중세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예수 마리아 성자들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 이콘 등의 성화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성화는 세르비아인의 모습과 세르비아의 고대의상이나 색깔을 표현하고 있다.

필자가 레닌그라드 교외 낡은 정교회 내부의 성화나 이콘의 모습에서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 옛 정교회내의 성화와 프레스코에서 느낀 것도 이들 예술품이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폴란드의 카톨릭 미술의 마리아나 아기 예수 상이나 조각 작품에서도 폴란드인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과 비슷하다. 이는 서방의 카톨릭 성화들도 각 나라의 고유한 스타일의 전통을 유지한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

예수 마리아 성자는 일반적이고 공통된 주제이지만 나라마다 민족특성을 부여한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도 기독교 역사가 2세기를 넘었으니 한복을 입은 예수라든가 조선족의 얼굴 모습을 한 마리아 및 성자들을 창조하여 고유한 민족 문화를 이룩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베오그라드 수도원의 건축양식과 수도원을 구성하고 있는 정교회 교회내부의 프레스코 벽화, 이콘 및 성물 들이 세르비아 민족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스투데니짜 수도원은 그라차니차 수도원과 더불어 세르비아 민족이 자랑하는 예술적인 건축물이다.

 

예술적인 건축물: 스투데니짜 수도원

 

 

 

<십자가 처형>성모마리아 교회벽화(1208)

Crucifixion, fresco from Church of the Holy Virgin, Monastery of Studenica, 1208. on the left is St. Mary the Holy Virgin.

 

 

12세기 스투데니차 수도원의 프레스코

Studenica, monastery of incredible frescoes. Beautiful frescoes among which the oldest ones date back to the 12th century

    

 

스투데니짜는 라도첼로 산협에 자리하고 있어 경치가 수려하다. 이 수도원은 세르비아 네마냐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최초의 대주교인 그의 아들 사바도 여기서 거 주했다.

이 수도원은 세 개의 아름다운 교회로 이루어져있다. ‘처녀마리아 교회’, ‘성 니콜라 교회’, ‘왕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중 12세기 말 네마냐가 설립한 처녀 마리아 교회가 가장 아름답다. 이 교회내부 서쪽 벽에 장식된 프레스코1208~1569년에 창조된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가장 빼어나다. 그 외 성 스테판’, ‘성 세례 요한’, ‘성모 마리아상이 독특하다. 세르비아의 성화나 프레스코 벽화는 진한 푸른색과 노란색 등 원색을 사용해 고상한 아름다움과 치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프레스코 碑文1208년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최초의 세르비아로 쓰여 졌다. 세르비아 고대의 중요한 자료이다.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은 그라차니차이다. 이는 전형적인 초기 세르비아 건축물의 하나이며 천상으로 향해 좁아지는 계단식 건축양식을 가졌다. 붉은 돌과 이 건축물은 조화가 넘치고 러시아의 정교회 건축양식(돔식)과 판이하며 세르비아 민족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 수도원의 프레스코는 14세기 전반기 비잔틴 교회양식의 특성을 보여준다. 다양한 테마의 벽면 장식에는 선지자들의 생애와 교회에 기초한 연중행사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런 장면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동시에 이 세상과 미래의 영광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또 네마냐 왕가의 계보가 처음으로 그려져 있다. 교회 입구에는 후원자인 밀루틴과 그의 젊은 왕비 시모니다의 초상화가 있다.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세르비아 여인의 모습이다. 왕비의 초상화는 두 눈이 파헤쳐져 있으나 둥근 원형 속에 빛나는 그녀의 풍채는 현대 세르비아 大詩人 밀란 라키치로 하여금 위대한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필자가 야간열차로 백색의 도시 베오그라드를 떠나오기 전에 칼라메그단 입구에 자리한 시인 밀란 라키치 동상 앞에 수많은 청중이 모인 것을 보았다. 인기 가수 브라니슬라프 프렐레비치가 라키치의 유명한 장미의 노래를 낭독하며 앵커맨과 토론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고 느낀 것은 역시 이 민족은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고 이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문학과 미술 음악연극 등 모든 예술분야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선량한 슬라브민족의 기질을 여기서 또 한 번 증거 한 셈이다. 세르비아 민요를 감상해보자. 민요를 번역해 준 김상현 군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민요

 

가장 아름다운 향기

 

오 여인이여, 나의 사랑스런 이여,

당신의 가슴은 어떤 향기가 나는가?

마르멜로 향기인가, 오렌지 향기인가,

밀짚 꽃 향기인가, 나륵풀 꽃향기인가?”

, 신이시여, 젊은 영웅이여,

나의 가슴은 향기가 나지 않아요

마르멜로 향기도, 오렌지 향기도,

밀짚 꽃 향기도, 나륵풀 꽃향기도 -

단지 여인의 영혼의 향기만이.”

 

세르비아 여인(1841)

- (愛情詩)

 

밀리짜의 긴 눈썹,

그녀의 붉은 광대뼈,

광대뼈와 흰 얼굴.

난 그녀를 삼 년 동안 지켜봤네,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네,

검은 눈도, 흰 얼굴도,

벌써 여인들이 콜로를 위해 모였네,

콜로 속에 여인 밀리짜도 -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네.

풀밭 위에서 콜로가 시작되었을 때,

날이 맑았네, 하지만 먹구름이 끼었네,

구름사이로 번개가 쳤네.

모든 여인들이 하늘 쪽을 바라보았네,

여인 밀리짜만 바라보지 않았네,

자기 앞의 푸른 풀밭을 바라보았네.

여인들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네,

, 밀리짜여, 우리들의 친구여,

미친 것인가, 아니면 너무 현명한 것인가,

넌 푸른 풀밭만을 바라보는구나,

우리와 함께 구름을 바라보지 않고,

구름 사이로 감아 도는 번개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고?”

그러자 여인 밀리짜가 말했네,

미친 것도, 너무 현명한 것도 아니라오,

구름을 휘감고 있는 요정도 아니라오,

단지 자신의 앞만을 바라보는 여인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