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담양 유적지, 가사문학박물관, 소쇄원, 왕버들숲길, 김덕령장군 비각, 취가정 탐방

Kyuchin Kim 2025. 5. 22. 00:41

 

20250510 담양 유적지, 가사문학박물관, 소쇄원, 왕버들숲길, 김덕령장군 비각,

취가정, 식령정,  탐방

 

https://youtu.be/tYY9w5W8Ol4?si=oe_tvHUWsD7tWqgK

 

<속미인곡>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천상 백옥경[11]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 져 저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가?

아아, 너로구나. 내 사설[12] 들어 보오.

내 얼굴[13]과 이 거동이 임이 사랑함직 한가마는

어쩐지 날 보시고 너로구나 여기심에

나도 임을 믿어 다른 뜻이 전혀 없어

아양이며 교태며[14] 어지럽게 하였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가?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이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이라 탓하겠는가.

서러워 생각하니 헤아리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그것일랑 생각 마오.

맺힌 일이 있소이다.

임을 모셔 봐서 임의 일을 내 알거니,

물 같은 몸이 편하실 때 몇 날일까?

봄추위와 여름 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철 겨울철은 누가 모셨는가?

죽조반[15] 조석 진지는 예전과 같이 올리시나?

기나긴 밤에 잠은 어찌 주무시나?

임 계신 곳 소식을 어떻게든 알자 하니,

오늘도 저물었네. 내일이나 사람 올까?

내 마음 둘 데 없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잡거니 밀거니 높은 산에 올라가니,

구름은 물론이고 안개는 무슨 일인가?

산천이 어두운데 해와 달을 어찌 보며,

지척[16]을 모르는데 천 리를 바라볼까.

차라리 물가에 가 뱃길이나 보려 하니,

바람과 물결로 어수선히 되었구나.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여 있는가.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임 계신 곳 소식이 더욱 아득하구나.

초가집 찬 잠자리에 밤중쯤 돌아오니,

벽 가운데 청등은 누굴 위해 밝았는가.

오르며 내리며 헤매며 서성대니,

잠깐 동안 힘이 다하여 풋잠을 잠깐 드니,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 같던 모습이 반 너머 늙었구나.

마음에 먹은 말씀 실컷 사뢰려니,

눈물이 쏟아지니 말씀인들 어찌 하며

정화를 못다 풀어 목조차 매여 오니

새벽닭 소리[17]에 잠은 어찌 깨었던가?

어와 허사로다. 이 임이 어디 갔는고?

잠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가엾은 그림자만이 날 좇을 뿐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지는 달이나 되어서

임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각시님, 달은커녕 궂은비[18]나 되소서.

속미인곡

 

 

아내 따라 천리길 전라도 광주에 왔다. 아내가 수피아여고 졸업 55주년 기념 동창회 홈커밍데이(모교방문의 해)를 즐길 동안 나는 광주 유적지를 보고싶었다. 수피아 여고 앞에서 아내의 영암 구림마을 고향친구 남편 이종엽 선생님과 만나 담양가사문학박물관으로 향했다. 무등산 중턱을 가로지른 멋진 드라이브 길로 차를 몰면서 여기저기 문화 유적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다. 임진왜란 당시 항일 의병대장 고경명이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이고 대구의 곽재우가 경상도를 대표하는 의병이라 한다.

 

고경명과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의병장들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런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말이다.

 

차 안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정원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무섬마을도 2번 정도 가보고, 부석사는 5번 정도 가봤습니다.

중국은 조경이 전형적인 정원이고, 일본은 축소해서 만드는 축원이 그 전형입니다. 반면에 한국은 자연 속에 즉 자연 정원에 집을 짓고 삽니다. 그 전형이 부석사입니다.

한국 정원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 그리고 다양한 식물들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합니다. 중국 정원은 넓은 공간에 산, 폭포, 동굴 등 다양한 자연 요소를 인공적으로 재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합니다. 반면 일본 정원은 자연을 축소하여 재현하는 형태로, , 잔디, 나무 등을 활용하여 경관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정원을 관조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부석사가 전형적인 자연 속에. 자연 정원 속에 집(절)을 짓고 사는 형태입니다. 노령산맥이 절 앞에 쫙 펼쳐저 있는 절경입니다. 그 절경이 바로 정원인 셈이죠.

 

여기 조금 더 가면 충민사라고 전두환 조상의 사당이 있습니다.

호남의 의병대장 김덕령장군과 고경명장군과 경상도 곽재우장군이 대표적이죠.

 

 

역사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등산을 내려오니 한창 공사 중인 넒은 터가 나온다. 담양에 오는 관광객들이 묶고 즐길 수 있는 건물들을 짓고 있다고 한다. 낙후된 숙박시설을 이제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탑에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국립중앙박물관 일 층에 10층 대리석탑을 봤다고 이야기하니 그 탑에 대해 해박한 이야기를 한다.

국보탑 2호가 원각사 10층 파고다입니다.

원각사 탑이 이 경천사 10층 탑을 모델로 만들었습니다. 아세아 아()자를 형상화한 세계적인 탑입니다.

 

혹 바둑 둘줄 아세요?

 

이선생님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바둑을 배우게 되었고 지금 1급 정도라고 한다. 다음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수담도 하기로 하다. 취미가 비슷하다 문화유적도 좋아하고,

 

박물관 가는 길에 거대한 버드나무들 세 그루가 넓게 자리 잡은 근방에 차를 세우고 버드나물 유례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이게 바로 충효동 왕 버드나무길입니다. 장엄하고 우람한 왕 버드나무 3그루가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이 왕 버드나무는 이 지역 또 다른 의병장 김덕령의 영혼이 깃든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충효동 주민들과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 마을에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우람한 거대한 버드나무가 마을 앞 강변에 자라고 있었는데 홍수로 다 떠내려갔는지 지금은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이 왕버들, 세 그루의 높이는 10m 내외, 둘레는 6m 정도이며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이 마을에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소나무 한 그루, 매화나무 한 그루,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 유서 깊은 정자와 빼어난 풍광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차례로 구경할 거라고 한다, 기대된다.

 

바로 앞에는 김덕령 비각이 있다.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8 12 29~1596 8 21) 과 형 덕홍, 아우 덕보, 부인 홍양이씨 등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788(정조12) 왕명으로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고 이듬에 그 유래를 밝힌 이 비를 세웠다. 비각은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792년에 처음 세웠다.”

카페 뒤쪽 언덕에 김덕령생가 터가 있다.

 

 

잠시 살펴보고 커피를 한잔 마시러 작은 카페에 갔다. 우람한 주인아저씨가 큰 소리로 환영한다. 커피를 갈아서 만들어주면서 담양 자랑을 한다. 카페 바로 뒤쪽에 김덕령장군의 생가터가 있으니 보고 가시라고 한다.

 

 

다시 자를 몰아 가사박물관으로 향했다. 도중에 정철의 전설이 얽힌 개울, 조대와 그 주위 역사유적지를 주로 정자에 얽힌 이야기는 들으니, 남도가 문향으로 발달한 사연을 알만하다.

 

환벽당 앞 용소 옆에는 많은 시인 묵객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과 근심을 낚았다는 용소와 조대(釣臺), 쌍송이 있습니다. 용소는 환벽당 및 창계천의 깊은 물웅덩이를 말하는데 물가에 지금도 조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조대 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도 물가 평평하고 높다란 바위에 '水止'釣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水止'는 물이 멈추는 곳, ‘釣臺' 는 낚시하는 곳을 의미하는데 용소의 수위가 머무르는 곳 즉, 물가의 낚시터를 의미하지요.”

 

식령정(息影亭)에 얽힌 전설

 

조선 시대 관리나 정철 같은 문인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입니다.

원래는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15(1560)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입니다.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정자입니다.

김성원, 정철, 임억령 그리고 또 한 분도 4명이 각 20곡을 지어서 80곡 시문을 지은 곳입니다. 80곡을 계기로 나중에 <성산별곡>을 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금 이따가 직접 가보시면 알겠지만, 식영정은 주변 무등산, 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입니다.

이곳에서 바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문학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정철은 노송의 숲 속에 묻힌 식영정의 정취와 주변의 경관을 즐기면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고 하며 <식영정십팔영(息影亭十八詠)>도 남아 있습니다.(가사 사진)

 

김성원의 한시 '식영정 십팔영' 원문과 풀이

 

제가 한옥 건축구조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는데요. 이 식령정은 정면 2, 측면 2칸의 팔작지붕(八作) 건물입니다. 팔작지붕 건물이 조선시대 건물 양식 중 가장 아름답고 균형미가 있습니다. 팔작지붕은 한문의 '()' 자처럼 4면 모두에 처마를 형성하는 지붕 형태입니다. 저기 지붕 한 면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또 맞배지붕은 측면이 삼각형의 벽으로 마무리되는 서민들 집의 지붕입니다.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松江亭) · 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취가정(醉歌亭)에 얽힌 전설이 흥미롭다.

 

 

우리는 구름 낀 날씨지만 운치를 자아내는 개울가를 걸으면서 이곳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을 들으며 취가정으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비가 부슬부술 오는 날씨를 택해서 유람을 즐기기도 한답니다. 저도 비슷하지요. 

취가정 올라가기 전에 개울가 돌에 새겨진 이곳을 묘사한 <성산별곡 > 일부가 눈길을 끈다.

 

짝 마즌 늘근 솔란 조대(釣臺)예 셰여두고

    한쌍의 늙은 소나무는 낚시터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 대로 더뎌 두니

    그 아래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던져두니

     홍료화(紅蓼花) 백빈주() 어느 사이 디나관데

    강가의 붉은 여귀꽃과 하얀 마름꽃을 어느 사이에 지났는지

     환벽당(環碧堂()의 소히 뱃머리예 다하셰라.

    환벽당 용의 연못(용추계곡)이 배 앞에 닿았구나

 

 

언덕 위에 있어서 쉽게 접근하는 방법을 따라서,  내 텃밭 같은 밭에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는 농가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취가정에 올랐다. 저 멀리 무등산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선생님이 취가정 앞에서 잠시 설명을 해주신다.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정면 3, 측면 28작 기와집이다. 내 고향 우리 초가, 달미산초당과 같은 크기다. 그런데 여기는 한가운 데에 거실 한 칸만 있고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방이 정자의 모습이다. 정자 한가운데 문일 달린 방이 있는 셈이다. 추우면 굼불을 때고 지낸다.

 

취가정은 아까 우리가 보았던 비각처럼, 임진왜란 때 조선의병의 총수였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후손인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과 여러 문족(門族)들의 협력에 의해 1890(고종 27)에 창건하였습니다. 지금 보는 건물은 육이오 때 불타고 그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취가정이라는 명칭으로 이 자리에 창건하게 된 데에는 충장공 김덕령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드라마틱한 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권필은 어느 날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에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나 그의 원사(寃死)를 호소하는 한 편의 시를 읊었습니다.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한 수의 시를 지어 그의 원혼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가 몽득일소책(夢得一小冊)’로 시작되는데, 이를 따서 취가정이라 명명하였답니다.

 

취가정 입구에는 충장공김덕령장군취시가비가 세워져 있는데, <취시가(醉時歌)>는 충장공 김덕령이 석주 권필의 꿈에 나타나 부른 시였다고 한다. 어려운 한자를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이 선생님 한문 실력도 대단하다.

 

 

醉時歌此曲無人聞(취시가차곡무인문)이라 : ‘취시가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 없구나.

我不要醉花月(아불요취화월)이요 : 나는 꽃과 달에 취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我不要樹功勳(아불요수공훈)이라 : 나는 공훈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아요

 

樹功勳也是浮雲(수공훈야시부운)이요 : 공훈 세우기도 뜬구름 같고

醉花月也是浮雲(취화월야시부운)이라 :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醉時歌無人知我心(취시가무인지아심)이니 : ‘취시가를 부르는 내 마음 아는 사람 없구나.

只願長劍奉明君(지원장검봉명군)이라 : 다만 긴 칼을 들고 올바른 임금 받들기를 바란다네.

旣覺悵然悲之(기각창연비지)하여 : 잠에서 깨고 나니 슬프고 비통한 마음이 일어나

 

이 시를 듣고 권필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짓는다.

 

爲作一絶(위작일절)이라 : 시 한 수를 짓노라.

 

將軍昔日把金戈(장군석일파금과)하나 :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장지중최나명하):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지하영령무한한):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끝없는 한탄이

分明一曲醉時歌(분명일곡취시가): 한 곡조 취시가속에 분명히 드러나누나.

(백태명의 고전 성독) 참조

 

 

이야기를 들으니 역시 남도는 시를 지을 때도 이처럼 영감과 혼이 깃든 시를 짓는다. 과연 시가의 고을답다.

 

 

한국가사문학관

 

 

낮은 산(성산星山) 아래 아담한 한옥으로 만든 박물관에 도착했다. 입구에 아담한 카페도 눈길을 끈다. 특히 앞마당에 소를 형상화한 동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살펴보았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목동과 소를 상징하는 동상이다. 이 동상은 한국 가사문학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사 문학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정철 가사 대목에 나오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어릴 때 소 타고 피리는 안 불렀지만, 물을 건너 일터로 갈 때 온순한 암소 타던 추억을 불러일으켜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사문학박물관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옆 방에 강의하는 소리가 나서 잠시 들어갔다. 가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고 5명의 청중이 열심히 듣고 있다. 우리도 잠시 앉아서 분위를 느꼈다. 시간이 충분하면 더 듣고 싶었지만.

이층에서 시작되는 제1관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 20여 년 전에 온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아마 새로 단장해서인지 기억력 문제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가사 발달사와 특히 이곳에서 산 정철의 가사문학 자료를 아주 자세히 전시해 놔서 너무 좋았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따금 이 선생님이 해설을 해주어서 무척 도움이 되었다.

정철 가사문학의 산실이 담양에 가사문학박물관이 잘 어울린다.

 

 

나는 이선생님에게 기회만 있으면 물어봤다.

정말 대단한 한글 작업이었네요. 조선시대의 사대부가 이렇게 우리말로 위대한 작품을 남기다니 기적이네요.

 

간단히 정철 가사문학을 정리해주시죠?

 

예, 위에 기록되어있듯이, 정철은 조선시대 우리글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지요. 아시다시피 그의 가사 작품인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철은 16세기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가사뿐만 아니라 시조도 훌륭하게 썼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배웠지요? 그의 가사 작품은 한글로 쓰여졌으며, 당대 한국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분이지요.

 

 

 

 

여기에는 정철 등 사대부들의 가사 뿐만 아니라 당시 안방에서 유행했던 내방가사도 많이 전시되어있다. 

"한별곡"은 어떤 가사인가요?

 

한별곡은 여러가지인데 이 "한별곡"은 생이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외로움, 원망,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실망, 부덕에 대한 부담감 등을 담아내며, 여성의 생이별한 남편을 향한 복잡한 감정 상태를 드러냅니다.

 

 

저희 영주 무섬마을에도 <화전가>를 쓴 부인이 몇이나 있습니다. 강변이나 산협에 놀러거서 그날 즐긴 내용을 가사로 적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분들한테 가사를 배웠답니다. 여성들의 전형적인 내방가사인데 이 <연화산 화전가>는 어떤 가사인가?

 

, 비슷합니다. <연화산 화전가>는 여자로 태어나 남자들 같이 자유롭게 바깥으로 돌아다니지 못함을 한탄한 가사입니다. 꽃피는 봄날에 한 번 화전놀이라도 하자는 길이 4.34m나 되는 장편의 화전가입니다. 이 가사는 화전놀이 묘사보다는 여러 가지 꽃, 여러 산과 강 등의 묘사가 길고 화전놀이의 준비 대목이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답니다.

 

 

계녀가(誡女歌)는 한국 가사 문학의 한 갈래로, 주로 여성에게 훈계 또는 가르침을 주는 내용을 담은 가사입니다.

 

서낭자석별가

 

어와 동유덜아 이말삼 들어보쇼

우리비록 여자라도 붕우유신 모랄손가

불선불후 한나서 오락가락 서로모혀

서지어 난말이 일 잣던이

가련다 우리인여필종부 흣터지

옛법의 일이 낫낫치 올컨마난

여자의 원부모난 야속

침선방적 여공사을 노심노고

유순유화 착측편을 엇기외와

쥐가우귀 변길의 부모집은 영결일셰

숀잡고 난말이 여자되미 한이로다

우리부모 키울젹의 남여지별 이실손가

곱풀가 밥을권코 치울셰라 옷설입펴

삼츈갓치 깁흔인졍 갓치 널너

 

"<상명가>는 중년에 운수가 불길하여 홀로된 어느 여인이 윤씨 집안에 출가시킨 딸마저 이름모를 병에 걸려 요절(夭折)함을 애통해 하며, 고혼이된 딸에 대한 애처로움의 소회를 애절하게 펼친 가사체의 노래이다. 구구절절이 눈물과 탄식, 그리움과 호소, 불운의 신세타령 등으로 얽혀 있어 독자의 가슴을 애이게 하는 서글픈 사연이 주를 이룬다."(상명가라 - 한국가사문학관)

 

<사향곡>은 먼 곳으로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님을 그리워 하면서 어릴적 친정 부모님과 함께 했던 옛 추억을 되새기는 내용이다.

구경을 하고 나오는 길에 아까 강연하시던 선생님을 만났다. 가사문학박물관 지킴이시다. 전시해 놓은 시집 2권을 선물로 받았다. 나도 어머니 책을 한권 보내기로 약속했다. 내 책 <무섬 알방석댁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가 낭송한 가사 류대감이야기또는 류정승 이야기원본을 찾고 싶다고 하니 책 받으면 나중에 알아본다고 한다.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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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1930~1970 영주 무섬마을 알방석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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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1: 영주 무섬마을 알방석댁 이야기: 아들이 기록한 어머니 자서전The story of Museom Albangse

영주 무섬마을 알방석댁 이야기: 아들이 기록한 어머니 자서전 아래 글은 우리 어머니(박명서: 朴命緖,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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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쇄원으로 차를 몰아갔다.

도중에 절라도라는 특이한 간판의 식당에 들어갔다.

이선생님이 여기 오면 꼭 식사하는 곳이라 한다. 이집은 김치 장인이 직접 요리하는 식당이라 권할 만하다고 한다. 수십가지의 정갈한 반찬을 상에 다차릴 수 없어 접시를 포개놓기도 한다. 이 선생님이 이런 상차림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이해해달라고 한다. 배가 고파서 그거 따지거나 흠잡고 싶지 않다고 하고 맛있는 점심을 즐겼다. 뜸북장(청국장)이 최고 맛이다. 나는 어디가나 여기저기 청국장 집을 방문하기를 좋아하는데 이집 청국장이 입에 감칠 맛을 느끼게 한다. 김치 장인 답게 것저리 김치도 맛이 특이하다. 오리떡갈비가 또한 맛이 일품이다. 이지방 명주 대나무 막걸리 한병도 시켰다. 이선생님이 술을 안해서 내가 주로 마셨다.

 

식후에 소쇄원을 산보하다.

 

아까 소쇄원이 무슨 뜻이라했지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해줘요.

 

소쇄원(瀟灑園)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자어 빗소리 소()와 물뿌릴 쇄()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 담양의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스승 조광조의 유배를 피해 은거하며 조성한 정원이며, 그의 호인 소쇄옹(瀟灑翁)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최고입니다. 남도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제월당이 무엇이지요?

 

제월당(霽月堂)은 소쇄원 주인이 학문에 몰두했던 정자입니다. 그 뜻은 `비 개인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자료에 보니 제월당은 정자라기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띠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霽月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소쇄원의 내원內園에 있는 요소들은 무이구곡에서 소재로 삼았을 법한 것들이 많은데, 무이구곡에서 비롯되어 무이정사를 경영하였던 예와 같이 제월당은 4~5곡간에 정사를 둔 것으로 구곡경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겠다.”

 

신선이 놀 듯하는 통나무다리 밑으로 조잘대는 계곡물이 흐른다. 

 

 

 

전형적인 한국 정원이라고 한다. 입구에 대나무 울타리를 새로 만들어 엣 기억이 안 난다. , 숲과 물이 흐르는 도랑을 배경으로 집을 지어 살던 모습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조선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축원이나 중국의 인위적인 조경 정원하고는 사뭇 다르다고 한다. 사실 유럽의 그 화려한 장원이나 왕실 정원도 모두 조경을 기반으로 한 정원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와 차이점을 알 것 같다. 우리가 비록 조경을 해서 웅장한 정원을 안 만든 이유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인가? 옛 도교의 사상이 남아 있는가?

 

 

 

광풍각(光風閣)은 조선 중기의 학자 양산보가 별서로 세운 소쇄원에서 사랑채입니다. 광풍각은 1597년에 병화로 불타버리고 1614년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정자명의 ‘광풍(光風)’ ‘광풍제월’에서 따온 것으로, 송나라의 황정견이 주돈이(周敦頤)를 평가하면서 “가슴속에 품은 뜻이 말끔하여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고 논한 데서 유래하였다. 소쇄원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정지이지요.

 

"광풍각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계곡 물을 베고 자는 글방이라는 뜻의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 불리었다. 양산보의 친구인 김인후가 소쇄원의 절경을 읊은 시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에 광풍각을 침계문방으로 지칭하고 그 절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광풍각을 계곡가의 집이라는 뜻의 계당(溪堂계정(溪亭)’ 혹은 작은 집이라는 뜻의 소재(小齋)’로도 불렀다.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1614년에 계당을 중수하고 상량문을 쓴 시기를 전후해서 광풍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쓴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瀟灑園溪堂重修上樑文)에 따르면 소쇄원 광풍각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의 할아버지이신 처사공께서 돌을 쌓아 오목하게 흙을 이겨

담장을 두른 다음 달을 볼 수 있는 곳에 집[霽月堂]을 지으시고,

거기 마루난간에 기대어 앉아 술을 마시며 시원한 바람을 쐬고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름없이 즐기셨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가의 바위에다

봉황새를 기다린다라는 뜻을 지닌 대봉대(待鳳臺)를 세우셨으며,

그 옆 언덕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사랑채를 지으시고,

그 마루 끝 층계 밑에는 매화며 단풍나무 등을 조성하셨다.

 

다시 낭떠러지 같은, 얼른 보기에는 위험한 곳에

축대를 쌓아 곁채를 지으시어 대청과 방[光風閣]을 마련하였다.

 

한벽산(寒碧山)이라는 산은 푸르다 못해

검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

그 골짜기에 걸쳐 있는 다리에 작약을 기대었고

누운 듯한 곳에는 애양단(愛陽壇)을 쌓으셨다.…"

( 시원한 바람의 집, 담양 소쇄원 광풍각<선비 문화의 산실, 누정<지역N문화 테마) 참조

 

 

 

광풍각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본은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살려 다리를 놓고 다정(茶庭)을 만들어놓고, 앉아서 차를 마시며 즐깁니다. 또 정원에 돌, 흙 등을 쌓아 작은 언덕처럼 꾸미고, 초목을 심어, 자연과 함께 사시사철 경치를 즐깁니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축소해 정밀한 묘사를 했기 때문에 한곳에 머물며 눈으로 바라보며 즐기는 감상식(感想式) 축원 정원입니다. 축경정원(縮景庭園)이라고도 하지요.

 

중국은 더 나아가 조경을 바탕으로 정원을 만듭니다. 한국은 자연을 그대로 가져와 그 주위에 집을 짓고 정원처럼 사용합니다. 이 소쇄원이나 영주 부석사, 창덕궁 낙선재나 완도의 세안정처럼요. 서울 성북동에 새로 문을 연 "성낙원"(정치인 정대철 누이 정미숙님이 주인?). 저는 이런 특졀한 자연정원이 딸린 집이나, 탑, 묘지에 관심이 먾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산과 강이 흐르는 곳이면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가 있습니다. 또 이곳에 주택을 짓고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 본 취가정처럼 자연 속에 정자를 짓고 주위 풍광을 즐기고 쉬면서 시를 짓듯이요.

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이제껏 깨닫지 못하고 즐기던 정자의 참뜻을 알만하다. 우리는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즐기는 정자문화가 발달하였다.

소쇄원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니 풍광이 너무 좋다. 20여 년 전에 와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소쇄원 건물 양식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해주신다. 어디를 가나 그 지방에 대해 아는 분과 함께 문화유적을 보면 더욱 알차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선생님과함께 이 지방 문화유적을 즐길 수 있어 무척 행복하다. 이 선생님도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고 건축 특히 한옥의 건축미와 구조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다 보니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고 하니 서로 통하는 봐가 있다고 한다. 취미인 바둑도 비슷한 나이에 시작했듯이.

 

당시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1]. 소쇄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외종 사촌 사이 면앙 송순, 처남 조카 김성원의 스승 사이 석천 임억령, 사돈 사이 하서 김인후, 처남 사이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처남의 처조카 사위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위키백과)

 

 

식영정 탐방

소쇄원의 풍광과 분위기에 취했다가 우리는 차를 몰아 식영정 일대를 탐방했다. 이 선생님이 차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늦은 봄이지만 여름처럼 녹음으로 우거진 아담한 산 남쪽에 정자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먼저 서하당 정자를 복 그 날엽한 모습에 반했다. 

 

서하당(棲霞堂) 1560(명종15)에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식영정과 같은 시기에 지은 정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을 1995년 담양군이 복원했습니다. 바로 옆에 1972년 복원한 부용당이 함께 있습니다.

서하당을 세운 김성원의 호가 서하당이지요.

서하당(棲霞堂)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세간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나이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송강 정철의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서하당을 노래한 구절이다.

 

서하당은 바로 옆 식영정과 함께 한 쌍을 이루는 정자이며 원래의 정자가 소실되고 새로 복원한 것이지만, 광주호를 바라다 보는 성산(星山) 자락에 자리한데다 식영정, 부용당, 송림과 죽림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광이 아름다원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편이다.

(http://www.d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614)

부용당은 무슨 뜻이지요?

부용(芙蓉)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연꽃 봉오리처럼 예쁜 정자를 말합니다. 정자 앞에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주위에 배롱나무가 있어 꽃이 피면 더욱 멋있습니다.

 

식영정(息影亭)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亭子)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산실인 셈이죠.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제봉 고경명 등이 시를 짓고 노래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곳입니다.

 

송강 정철, 1585년 담양 창평에 낙향 이 '식영정에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지었습니다. 바로 송강 가사 문학의 산실입니다.

 

續美人曲(속미인곡).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3콤보 가사 중 가장 문학성이 높은 가사로 손꼽힌다. 문학성은 높으나 학생 입장에서 해석하고 외우자면 충공깽도 이런 충공깽이 없으며 보는 순간 갑갑함이 밀려온다. 그래도 한자 무쌍을 찍는 관동별곡, 사미인곡보다는 덜 어려운 편.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은 그의 저서 서포만필에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우리나라 최고지만 그 중에서도 속미인곡이 최고'[1]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 사미인곡에 비해 어려운 한자어나 미사여구보다 순우리말을 더 많이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더 좋은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또 홍만종은 자신의 저서 순오지에서 속미인곡을 "출사표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 (나무위키 참조)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입니다. 아까 본 정자는 한가운데 방이 있었는데, 여기는 한쪽에 방을 들이고 저 멀리 맑은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전면과 측면에 마루를 만들어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해 놨지요. 마루 밑에 불을 때서 겨울에 온돌방으로 사용합니다. 여름이면 분합문을 들어 올려 걸어놓고, 대청마루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조상의 지혜가 돋보이지요. 한 여름이면 하늘로 뻗고, 오래 된 낙락장송과 배롱나무가 정자와 조화를 이룹니다. 정자에는 식영정편액, 기문과 시문 등의 여러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주위 아름다운 숲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식영정 원림은 담양의 명승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성산사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어 있어 이선생님도 처음으로 들어가 보게됐다고 한다. 주위에 잡초가 많이 자랐다.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지???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성산사(星山祠)이다. 석천 임억령을 비롯한 7명의 제위가 모셔져 있다.

현재는 텅빈 방만 있다. 아마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모양이다. 

 

하루 짧은 시간 동안 이종엽선생님 덕분에 담양의 가사문학에 얽힌 이야기와 명승지를 보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선생님을 만나 하나라도 더 배우는 난 행복하다. 

 

광주, 담양 주변에는 우리 한글로 위대한 작품을 쓴 많은 작가가 있어 무척 부럽다. 그들 덕분에 우리 한국어가 더욱 발전되고 세련되어왔다. 어릴 때 영주 외나무다리 마을 무섬에서 어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들이 안방 호롱불 밑에서 가사를 읊으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즐기던 모습을 보았는데 이 지방은 한층 더 차원 높은 가사 문학이 발달한 고장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정말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이 선생님은 주로 한국문화유적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곳을 방문하면 메모하며 즐긴다고 한다. 

그동안 해외로 주로 다니면서 그나라들의 박물관 미술관 역사유적지를 보아왔다. 또 외국문학, 예술을 보고, 즐기고 기록하여 신문, 잡지 연재나 책으로 내서, 한국에 소개했는데 앞으로 좀 더 한국 명승지를 두루 살펴보고 싶다. 

 

이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또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담에는 바둑판을 차에 실어서 아름다운 정자에서 한판 두는 여유도 가지고 싶네요. 같은 1급 정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