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서평

이문열 작가의 안중근 장편소설 <죽어 천년을 살리라>를 읽고

Kyuchin Kim 2022. 7. 18. 12:35

이문열 작가의 안중근 장편소설 <죽어 천년을 살리라>(<불멸>)를 읽고

After reading Yi, Munyul’s novel on Ahn Jung-geun <Immortality: Live a Thousand Years After Death>

 

https://youtu.be/6HE16OhZ1WA

 

 

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정말로 불꽃같이 살고 불꽃같이 죽을 수 있을까?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그런 시대를 만드는가How can an ordinary person really live like a fire and die like a fire? Do times make heroes, or do heroes make those times?

 

 

                            뤼순감옥 옥중의 안중근 의사:

              출생일: 187992일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일: 1910326(30

             사망지: 일본 제국 만저우 지방 관동주 펑톈 성 료준 뤼순 감옥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부악문원을 찾았다. 코로나 19 역병 때문에 모두들 조심하고 움츠리고 살아왔다. 그러나 예방주사를 4번이나 맞고 나서야 이제야 코로나 전염병으로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 안동고 동창들 5명이 우리 동창 이문열을 찾아가서 근방에 있는 단골 강민주의 들밥에서 정말 맛있는 한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당 앞에서 친구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문열 작가와 동창 손요헌(안동향우회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역병 때문에 오랫동안 못만나고 새로 만나니 무척 기쁜가 보다.

 

단골집 "강민주의 들밥" 서이천점에서: 안동고 17회 동창, 장인찬, 이문열, 필자, 손요헌, 김정호

 

 

강민주 한식전문가 사장님은 20여년전 경기광주 양벌리 제1호점 "들밥"에서 만난 이후 단골이 되었다. 각종 반찬이 유기농 채소로 요리한 것이다. 매일새벽 공수해오는 신선한 제철 야채들과 입안에 부드럽게 느껴지는 보리밥으로 건강하고 맛있게 푸짐한 한상차림을 받으면 기분 좋다. 특별 반찬으로 보리굴비, 간장게장, 돼지불고기와 꼬막무침 다 맛 있다. 그 중 보리굴비가 압권이다. "강민주의 들밥"은 킴슐랭(KIM Michelin)의 하나다. 가성비도 좋고, 장소도 좋고, 직원들도 하나같이 친절하고 무엇보다 맛이 좋다. 직영점은 이천 마장동에 있다.  내 지인인 남편되시는 분은 브레이브브라더스 유승용회장이다. 아들과 함께 3분의 요리 경험은 30여 년이 된다. 

 강민주의 '간장게장'은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최고의 맛이다.

 

 

식사 후 작가의 서재 부악문원에서 직접 우려내 주는 녹차를 3-4잔씩 즐기는데 사모님이 속이 벌건 수박을 한 쟁반 가져오셨다. 오랜만에 뵙는데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고 반가워하신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서 모두들 기쁘기 그지없다.

한참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행히 정부 창작지원이 있어 소설가 몇 명이 여기 부악문원에서 기거하면서 창작을 준비하고 있다. 세상 이야기, 소설 창작이야기, 7학년 5반이 되어도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동창생들이야기, 안고 이야기 여러 가지가 이야기의 주제로 등장하고 사라지고 했다.

9월에 영양 석포 이문열 고향 마을에서 작가 문학 기념관 준공식에 초대한다고 해서 축하를 하고 기대를 가지다,

최근에 재 출판한 <죽어 천년을 살리라> (2)를 들고 와서 제 1권에 서명을 해서 각자에게 2권씩 나누어준다.

작가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대에 가장 훌륭한 한국인은 안중근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안중근이 어떤 인물인지 대충은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왜 제목이 처음에 출판할 때의 <불멸>이 아니고 <죽어 천년을 살리라>인지 궁금하다고 하니 그게 같은 뜻인데 책 속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사실 이문열 작가는 소설 제목을 의미 있는 것으로 짓기로 유명하다. 작명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변경>,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필론의 돼지>,  <금시조>,  <시인> 등등. 고등학교 다닐 때 자신의 이름은 외자 이었는데 예명이 문열(文烈)’인 것처럼.

 

 

불멸에서 죽어 천년을 살리라로 제목 변경한 이유:

 

이문열의 안중근에 대한 평전 같은 소설은 지난 2010년 안중근 의사 100주기를 맞이하여 <불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작가는 <불멸>이라는 제목 외에 <이 사람을 보라>라는 타이틀도 고민했다고 한다.

이번에 제목을 죽어 천년을 살리라로 바꾼 것은, 작가의 제목에 대한 고뇌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신판 서문에서 이문열은 “10년 전 안중근 의사의 행전을 낸 뒤 지금까지 마음속에서 키워 온 불만은 불멸이란 얼핏 웅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공허하게 들리는 그 제목이었다. 불멸은 처음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몇 십 페이지로 요약하고 제목을 찾는다면 얼른 떠올리기 좋은 제목이지만 또한 너무 단순하고 무미건조하다는 느낌과 함께 어떤 상투성과 무성의함의 예감까지 주어, 의사의 불꽃같은 삶과 죽음을 담기에는 마땅찮아 보였다라고 말한다. 이문열은 고심 끝에 이번 알에이치코리아 판에서 제목을,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추모한 중국인들의 칠언절구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된 구절 죽어 천년을 살리라(生無百歲死千年)로 대신했다. 기이하게도 신해혁명을 주도한 손문 (孫文, 1866-1925)과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던 반동 원세개 (袁世凱, 1859-1916)가 똑같이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애도한 칠언절구의 전구(轉句) 뒷부분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친구 작가는 차를 직접 우려 내서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죽어 천년을 살리라〉 1,2권 사인해서 받으니 기분이 매우 좋다. 책은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다.

 

 

이와 같은 사연으로 멋진 제목으로 새로 태어난 안중근 전기 소설을 받으니 다들 기분 좋아한다. 선물 중에서 책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다했던가?

우리 각자 한 달 내로 다 읽고 독후감을 이야기할 겸, 고등학교 동창들 여럿이 등산도 할 겸 다시 여기서 만나자고 하고 헤어지다.

부악문원 정원에 이쁜 여름 꽃, 초록 참싸리 꽃이 활짝 펴서 우리를 반긴다.  어릴때 산에서 이 싸리를 베어와서 빗자루도 만들고 굵은 대는 설날과 정월달에 시골서 유일한 놀이인 윷놀이용 윷까치도 만들었다. 지금도 이문열 고향 영양 일월산 수제 싸리 윷은 유명하다. 어릴 때 여양 청기면에 살던 고모가 영양 수제 윷을 가져와서 선물로 주셨다. 우리고향 영주는 수제 호미가 하도 유명해서 아마존에서 잘 팔리고 있는데.

그뿐만 아니다. 싸리는 어릴 때 농촌가정의 생활용품으로 두루 쓰였다.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삽짝문과 싸리담장, 마당이나 부엌에서 사용하는 싸리비, 영주장날 시장에 가면 싸리로 엮어 만든 광주리와 다레끼를 살 수있다. 지게나 소등에 얹는 바지게, 삼태기, 소쿠리, 바구니, 여름에 마당에 깔고 누울 수있는 싸리발, 싸리나무 소쿠리 닭우리 등 대부분이 싸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잘 나지 않고, 불이 잘 붙어 땔감으로 자주 사용한다.  싸리 나무 밑에서 자라는 싸리 버섯도 따먹었다. 이문열 정원에서 만난 초록 싸리 꽃이 고향생각을, 옛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앙증맞게 올망졸망 자줏빛 싸리 꽃은 고향의 꽃이다.  싸리 꽃은 향기 짙어서 아카시아 꽃 처럼  벌 나비가 많이 날아들어 질 좋은 꿀의 원천이다.  옛부터 싸리나무 뿌리는 기력을 돋게 하고 막힌 기혈을 뚫어 주며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싸리나무 뿌리와 씨앗은 허약 체질을 개선하는 훌륭한 보약이라고 한다.
어릴 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홍수 질때 말 잘 안 듣고 물가에 가면 아버지가 싸리 회초리나 뽕나무 회초리로 목침 위에 올라가게 하고 종아리를 때리시곤 했다. 다른 나무가 아니고 이 두 가지나무는 매맞을 때 아프지만 상처를 별로 내지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상의 지혜.

 

이문열 창작의 교실  이천 부악문원 앞에서: 김정호, 손요헌, 이문열, 장인찬, 김규진

밖에 나오니 6월 날씨가 덥다.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다. 벌써 3시간이나 지나갔다. 옛 친구 만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집에 와서 곧장 <죽어 천년을 살리라>를 폈다. 이문열 소설은 언제 읽어도 매력에 금방 빠진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소설도 유려한 문체에 해박한 내용을 쉽게 풀어쓰기 때문에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안중근 일생 이야기를 통해 19세기말 20세기 초 조선, 대한제국 국민들의 운명과 역사적인 사건과 수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책 뒤표지에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청춘에게 들려주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진정한 영웅의 결연한 외침이다.” 라는 문구대로 정말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한번쯤은 꼭 읽어보면 좋겠다. 나는 청년 시절에 이런 소설을 못 읽은 것이 후회된다.

 

처음 1주일 동안 첫 권을 다 읽었다. 그 다음 여러 일이 겹쳐 제2권은 3주가 걸렸다.

다 읽고 나니 너무나 감동적이다. 100여 년 전에 이렇게 위대한 대한국인이, 조선인이 살아 있어서 우리 한국민족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엄청남 외적의 침입을 견대고 살아 온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시대의 이야기인데 정말 불꽃같은 삶을 살아간 한 영웅의 이야기에 머리가 숙여진다. 무한한 존경심이 인다. 우리나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내 자신이 부끄럽기 조차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격동하는 시대의 우리의 운명을 이 책을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을 넘어 한 시대를 냉철하게 그리고 있다

 

19세기말 동학란(1894), 청일전쟁(1894), 천주교등 신문명의 도래와 일본자객에 의한 명상황후 민비의 살해(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등으로 썩어빠진 마지막 조선왕조가 풍전등화에서 어떻게 유지되어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격변의 시대에 조국의 운명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기희생을 통해 불꽃같은 삶과 피 끓는 고뇌에 대한 묘사가 진한 감동을 준다. 야망을 품은 주인공의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이겨내고 대망의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을 준다. 대한국인 안중근의 생애를 이처럼 담담하고 드라마틱하게 완벽하게 묘사한 책은 본적이 없다

 

이문열은 안중근에게 조국이란 하나의 지상(至上)이었고, 조국과 겨레에 대한 사랑은 실존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안중근은 불멸의 가치에 자신을 던졌고, 그래서 그 가치와 더불어 영원히 잊히지 않는 불멸의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1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과정이 전개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을 요새로 삼아 지방 호족으로서의 세력을 키워 나가는 것에서부터 그의 가족사가 전개된다. 무능한 세기말 조선의 말기에 일어난 동학란 등 시대상황에서 안중근의 성장과 천주교로 개종해서 시대의 급변을 깨닫기 시작한 안중근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1권 목차

 

청계동천

첫 출진

취야 싸움

손님

기다리는 사람, 떠나는 사람

아들의 한철

천주와 양대인

청계 본당

복사 안 다묵

저들을 지켜 주리라

망국 전야

홀로 헤쳐 가는 길

 

 

그 젊은이의 이름은 중근이고 성은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였다. 이름이 중근인 것은 젖먹이 때부터 주변의 자극에 너무 예민하고 반응이 빠른 그의 성격을 가볍다고 여긴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집안의 항렬자인 근()에다 무거울 중() 자를 얹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그의 몸에 북두칠성을 닮은 일곱 개의 점이 있다 하여 응칠(應七)이란 이름으로 그 상서로움을 기렸고, 아버지 안태훈은 따로 아들에게 자임(子任)이란 아명(兒名)을 지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에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은 응칠이었고, 관례와 혼례를 치른 뒤에는 관명인 중근이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17)

 

나이 열여섯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 중근의 기마술과 포술은 오래고 힘든 단련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고, 오래고 힘든 단련은 무엇보다도 상무의 바탕이 있어야 했다. 중근의 가문은 5대조 안기옥 이래 아홉 명이 무과에 급제하고 네 명이 무반직 품계를 받은 무반 가문이었다.”(19)

 

그러나 그의 조부 안인수와 부친 안태훈은 비록 문반으로 출세하였지만, 중근에게 유독 두드려지는 상무기풍은 가문에서 물려받은 것 못지않게 개인적 지향과 선택도 큰 몫을 했다고 저자는 묘사하고 있다. “말위에서 나는 새를 맞혀 떨어뜨렸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젊은 중근이는 사격 솜씨가 빼어났다.

 

 

 

 

 

중근은 16살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의려장(義旅長)이신 아버지와 별군관인 둘째아버지를 따라 동학군을 토벌하러 나가려고 하자 부인 아려가 이것이었던가요? 벌써 첫날밤에 말씀하신 그 장부의 죽을 곳을 찾으신가요?‘라고 묻자 자신의 비장한 각오를 말한다.

 

이슬과 같이 허무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인연을 얻어 우리는 부부로 맺어졌소. 허나 장부의 큰 삶이란 마땅히 죽을 곳을 찾는 데 있다 하였소. ----- 사는 날은 백년을 채우지 못하지만 죽어 천추를 산다는 옛 사람의 말은 아마도 그런 이치를 일컫는 것인 성싶소. 그렇지만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으니 홀연 슬프고 쓸쓸해지는 구려. 이르든 더디든 그날이 오면 이 덧없는 세상의 인연이 과연 무엇이겠소?” (42-43)

 

안태훈은 원래 중근이 책 읽기를 게을리 하고 무사에 빠져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백암 박은식을 만난 뒤부터 겨우 마음을 바꾸었다.” (57)

 

백암 박은식은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이란 필명으로 몸소 "안중근의 전기"를 썼다.  이 전집 속에 있다.

 

박은식은 훗날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애국계몽운도에 몸을 던지고, 또 뒷날에는 이승만에 이어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리고 뒷날 한때는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이란 필명으로 몸소 안중근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박은식이 중근이의 아버지 안태훈에게 장차 나라가 부강하려면 중근이 같은 무사가 필요하니 큰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라고 충고한다.

 

그리하여 동학군 토벌 첫 출정에서 안중근은 공을 세우고 아버지 안태훈 부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안태훈 부대의 승전 소식을 들은 신천 군수도 조정에 첩보를 올려 안태훈의 공훈을 알렸다. (74)

 

동학군의 정예 육칠천 명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가만히 해주를 에워싸는 중입니다. 불운성을 들이쳐 일본군을 쫓고, 황해감사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을 모조리 잡아다 징치겠다고 외고 다니는 데, 그 선봉은 금년에 열아홉 살 장수 김창수(뒷날의 김구라고도 한다.)란 접주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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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방구석에 끼어 있던 중근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김창수가 선봉이 된 것은 이끄는 무리가 많아서 입니까? 적도들 가운데 특별히 용맹스러워서입니까?”

어쩌면 중근 자신처럼 나이 어린 선봉이란 점에 묘한 호승심(好勝心)같은 걸 느꼈는지 모르를 일이었다.“(82-83)

 

안중군은 개화파인 아버지와 동학군 토벌에 나서서 죽은 동학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중근은 그때까지 여러 명의 동학군을 총포로 쓰러뜨렸지만 그 들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개화파인 아버지 안태훈에게서 주입된 대로 중근에게는 동학군이 미련하고 완악한 역적의 무리로서 용기와 총 솜씨를 아울러 뽐낼 수 있는 추상적인 표적일 뿐이었다. 그런데 죽은 그들을 가까이서 보니, 이 땅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순박한 민초들일 뿐이라는 게 몹시 충격적이었다.”(101)

 

1손님이란 장에서 중근의 아버지가 김창수(훗날 김구)를 청계동으로 초청하여 그 기개를 높이 평가한다. 비록 해주성 싸움에서 무참하게 지고 쫒긴 동학군 팔봉 접주 김창수이지만 그 인물을 알아 초청하였고, 김구도 안진사의 참뜻을 헤아려 초청을 받아들인다. 중근은 처음으로 김창수를 만난다. 김창수는 여기서 몇 달을 지내다가 청나라로 떠난다.

 

김구와 안중근 가족의 인연:

 “‘백범일지’에 조부와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진사와의 첫 만남이 등장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19세였던 할아버지는 농민군의 접주였고, 안태훈 진사는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갑오의려의 대장이었죠. 두 사람은 비록 적대적 위치에 있었지만, 상대방의 인품을 높이 사 서로 배려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군으로 관군과 싸우고 계실 때 안 진사가 할아버지께 밀사를 보내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겠다. 군이 무모하게 싸우다 죽으면 인재가 아깝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자신을 반대하던 일부 농민군 세력의 습격을 받았을 때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했고, 그때 안중근 의사를 처음 만나셨지요.”(손녀 김미의 증언: 김구와 안중근 집안 이야기:안중근평화신문 (danji12.com))

 

김구가 훗날 <백범일지>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안중근에 대한 묘사를 보자.

 

당시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여섯 나이로 상투를 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영특한 기운이 묻어났다. 중근은 청계동 군사들 가운데서 총 솜씨가 으뜸이어서 짐승이건 나는 새건 한번 겨눈 것은 놓치는 법이 없었다.”(121)

 

훗날 김구는 1896년 다시 청계동으로 돌아와 청나라 국경지역에 사는 조선 유민의 대한 이야기에 중근은 큰 감동을 받는다. 이때 중근은 자기는 우물 안의 개구리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느낀다.

마침 국내 정치에서는 단발령(189611)이 내려져 나라가 시끄럽게 들끓던 시기였다.

 

 

천추와 양대인(洋大人)”이라는 장에서는 서울 종현성당에 숨어 지내면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아버지 안태훈이 성경 등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 모든 가족들에게 시대에 대처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자고 한다. 안태훈이 맏형 안태진에게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그 까닭은 혼이 신령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혼, 곧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나도 소학에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인간이 가장 귀하다는 말을 들었다.”(216)

 

재미있는 것은 천주교에서도 사람이 최귀하다고 하고 동양 인본주의 사상에서도 인간이 최귀하다고 한다. 사실 유몽선습(幼蒙先習: 조선시대 어린이 교재)의 첫 구절도 그렇다. “天地之間 萬物之衆 惟人最貴 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온갖 무리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사람이라 할 것이니라

 

그리하여 청계동과 세례를 받은 중근은 천주교가 열어 둔 길을 따라 근대사 속으로 새로운 발을 내딛는다.

이장에서는 천주교가 조선에 어떻게 뿌리내리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천주교 세력(프랑스)을 등에 업고 안테훈은 지난날 전성기 때의 토호(土豪)활동을 되살린다.

 

 

 

2권 목차

 

애국계몽의 전선에서

길 위에서 길 찾기

망명의 아침

해삼위 가는 길

깃발을 올려라

대한의군부 참모중장

패주

다시 부름을 기다리며

출진

하얼빈의 열하루

공판투쟁

죽어 천년을 살리라

 

2권에서는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 후 동분서주하면서 시대의 상황에 도전하는 안중근 의사의 활동과 하얼빈 의거 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1910326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작가의 수려한 문체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안중근은 죽기 직전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한다.

 

안중근은 애국 계몽의 전선에서이란 장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둘은 같은 순흥 안 씨이지만 안창호가 친족관계로 부르기보다 독립운동 동지로 부른다.

 

안중근이 안창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안창호는 만민공동회의 토론에 참가하고, 독립협회 평양지회 설립을 주도하면서 그 이름을 간간이 드러내더니,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있었던 강연으로 관서뿐만 아니라 해서 사람들까지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날 스물한 살의 청년 안창호는 쾌재정의 이름을 빌려 유쾌하게 여길 일快哉열여덟 가지와 유쾌하지 아니한 일不快열여덟 가지를 대며 조정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을 조리 있게 주창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1)

 

안중근은 빌렘 신부와 논쟁에서 순수한 기독교 윤리보다 대한제국 국민 계몽과 개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보다 새로운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서울로 떠난다.

 

길 위에서 길 찾기에서는 안중근이 서울서 서북지방의 명망가 김달하 집에서 머물면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동지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에 열심인 이동휘 등을 만나 안목을 넓히고 대한제국의 시운에 비분강개하면서 스스로 지사이식을 키워나간다.

 

이 장에서 우리는 황제의 특사로 사형을 면한 뒤 탈옥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고향 해주로 돌아갔다가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하는 등 사상적 편력을 하는 김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청계동에서의 인연 때문인지 한때 안중근은 김창수 시절의 김구를 한 동도(同道)로서 무겁게 의식하였다. 특히 김구가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스치다를 죽여 세상을 놀라게 한 뒤로는 묘한 열패감까지 느끼며 그 후문에 귀 기울여 왔다. 거기다가 그때 김구는 기독교계의 신진이요, 교육 구국의 지사로서 그 보폭(步幅)을 서울로까지 넓힌 뒤였다. 을사보호조약 파기를 청원하는 상소와 공개 연설 같은 구국 활동으로 전국에 알려진 지사가 되었으며, 특히 그해 안창호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조직되고 있던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안중근과는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49~50)

 

 

서울에서 활동을 하느냐 해외서 활동을 하느냐 망설일 때 화서학파의 정맥을 이어온 유학자 의암 유인석을 만나 출국을 결심한다.

안중근은 김달하의 젊은 아들 김동억과 함께 19076월 하순 서울을 떠나 북간도로 향한다. 그러나 도중에 김동억이 병이 나서 다시 서울 다동 김달하 집으로 되돌아온다.

 

망명의 아침에서는 국내외 급박한 정세가 배경으로 나온다.

 

안중근이 김동억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온 나라가 해아(海牙, 헤이그)밀사사건(1907)으로 들끓고 있을 때였다. 그해 7월 초순 대한매일신보가 먼저 외국 신문을 인용하여 광무 황제가 화란(和蘭, 네덜란드)의 수도 해아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세 사람을 보냈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뒤이어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광무 황제를 찾아가 무엄한 언사로 그 책임을 따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73)

 

이어서 고종황제의 강제적인 양위(1907)로 융휘황제(순종)가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로 등극하였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1907)에 의해서 대한제국의 모든 국정은 미리 통감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또 비밀부대 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이 실행되었다.

안중근은 이 무렵 김달하 집과 대한매일신보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많은 독립지사들과의 유대관계를 통해 뒷날을 위한 인적 기반을 다졌다.

군대해산 이후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안중근은 백암 박은식과 도산 안창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그는 아직 비록 신민회 회원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군사기지 건설과 장교 양성이라는 독립특파원 임무를 받았다.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가는 길에서 안중근은 부산에서 원산까지 가는 등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기서 본당 백신부(백유사: 브렛)를 만나 간도로 가는 도중에 사제에게 성사를 받아 망명길에 위로를 받고 싶다고 간청한다. 그러나 백 신부는 천주교인으로 장차 살인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나라 간의 전쟁행위는 정당행위이지만 사전(私戰)이라는 개인 간 원수 갚는 일은 살인행위로 천주 교리에 위반되는 것이나 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여기서 안중근은 예전에 대학설립문제로 뮈텔 주교와 타투고 마음속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천주교를 지켜내려고 하는 이들의 의도를 간파한다. 이 나라 독립이나 겨레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이들에게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천주교라는 교리와 조국의 독립문제로 갈등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거의 반년이나 걸려서 간도 화룡현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안중근이 얻은 것도 많았다. 그동안 다동 김달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리고 안창호와 박은식, 신채호가 있는 대한매일신보사를 드나들면서 그는 당시의 가장 치열하고 진보적인 의식으로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었고, 헤이그밀사사건과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 같은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바로 그 현장에서 목도하고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거기서 간도에 이르기까지의 험하고 힘든 여정도 그의 몸과 마음을 한 번 더 담금질했다.”(125)

 

 

안중근은 간도성의 네 현 화룡현, 연길현, 왕청현과 훈춘현을 돌면서 독립군 기지건설이나 독립군 창설의 대의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움을 절실히 느꼈다. 모두들 수십 년 전에 함경북도에서 흉년을 피해 넘어 온 사람들이라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마음먹고 가는 길에 연추-하연추를 들러 이범윤대장을 수소문했으나 허탕치고, 어떤 노인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이름 뻬치카인 최재형을 만나게 된다.

최재형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다. 망국 전후 연해주 독립 운동은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주역이다. 필자는 우연히 2019년 블라디보스토크 한 호텔 로비에서 그의 딸과 아들이 쓴  전기를 한권 획득했다. 정말우연이었다. 한국관광객이 많이 오는 호텔 로비 소파 탁상에 몇권이 있었다. 카운터에 가서 저 책 한권 가지고 싶다하니, 원하시면 가지라고 한다. 두 권을 가져다가 한권은 함께 여행하던 김세병님에게 주었다. 관심을 가지면 이렇게 좋은 책도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획득한 책에서 귀중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재형님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인 동시에 시대의 증언이며 역사의 울음소리이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의 육필 원고를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임시정부 초대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의 항일 독립 투쟁의 여정을 딸과 아들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러시아에서 무역업과 군납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교육이 조국 독립의 뿌리임을 인식한 그는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 선 선각자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올가와 발렌틴의 기록에 따르면 최재형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기획하고 지원했음을 생생히 알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안중근 의사를 묘사한 장면을 보자: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pp.27~28)

 

 

최재형은 1860년대 말 최초의 고려인 이민자로서 함경도 경원도호부(현 함경북도 경원군)의 노비 출신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 조선인이기도 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돈을 벌어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최재형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 그는 러시아 황제도 두 번이나 알현하고 훈장도 받은 위대한 한인이다.

 

 

최재형을 만나 도움을 받은 이후 안중근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싶어 했다. 거기에는 의암선생도 이범윤장군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기 전에 이치권을 만나 해삼위로 망명 온 장지연 이야기도 들었다. 경상도 상주 출신 장지연은 1905년 을사보호늑약을 성토하는 내용을 쓴 글인,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했다가 투옥되었다. 1908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큰 사업으로 성공한 최봉준의 사무실로 함께 가서 이범윤 장군을 만난다.

안중근은 우여곡절 끝에 여기서 의암 유인석을 만나 연추에서 이범윤의 창의회와 최재형의 동의회가 쪼개져 가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듣는다. 그 후 안중근은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으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동포들이여! 동포들이여! 내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지금 우리 한국이 겪고 있는 참상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모르시는 것입니까? 몇 해 전 일본이 러시아와 개전할 때 전쟁을 선언한 글에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말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은 그와 같이 중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한국을 침략하여 을사조약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국권을 손아귀에 넣고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군대마저 해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도·광산·산림·천택(川澤) 어느 것 한 가지 빼앗지 않은 게 없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 저택들은 병참(兵站)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아 저희가 살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분묘까지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쳐 화가 조상의 백골에까지 미쳤습니다. 대한의 국민 된 사람으로서, 또 단군 성조(聖祖)의 자손 된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그 분함을 참고 욕됨을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169)

 

그의 힘차고 뜻있는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안중근의 조국애와 반일사상을 엿볼 수 있다.

 

 

대한의군부 참모중장

안중군은 엄인섭과 더불어 최재형이 조직한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에서 좌우영장이 되어 훈련을 돕기로 했다. 그 당시 창의회를 만들어 의병을 훈련하는 이범윤 장군을 만나서 위로 말을 듣는다. 연추에는 이렇게 두 단체가 각자 의병조직을 가지고 장차 대 일본 전투에 대비한다.

의진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김두성이 총독직을 맡고, 최재형(도헌)이 동의회와 창의회까지 아우르는 연해주 의진의 총재로서 후장을 맡고 이범윤 대장이 연해주 의진의 총대장이 되어 전선의 병사를 맡았다. 이때 안중근은 오늘날 중급 장교에 해당되는 참모중장이란 직함을 받고 몇몇 전투에서 성공한다. 연해주 의병부대는 원정군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서 일본군 수비대 몇 곳을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전과를 세웠다.

패주에서는 안중근이 잡은 일본군 포로를 놓아주는 바람에 그 이후 전투에서 패해서 간신히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즉 동간도 지방으로 넘어가서 목숨을 유지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준다.

 

출진에서

그 후 연추로 돌아갔으나 이범윤과 최재형의 두 진영으로부터 냉담한 대접을 받고 의병을 모으는 것을 포기했다. 안중근은 이들의 화합을 원했나 뜻대로 대지 않은 찰나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이강으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연추를 출발하였다.

<대동공보> 사옥으로 이강을 찾아가니 뜻밖에도 그는 안중근을 반기며 이등방문이 만주로 온다기에 빨리 오라고 전보를 쳤다고 한다. <대동공보> 사옥은 그로부터 스무 날 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날까지 안중근이 이등방문 총살을 지원하는 병참사령부가 되었다.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있던 지사들 중에는 국권회복 운동의 방책으로 국적 처단을 우선하여 논의 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일본 쪽 침략의 원흉으로 이등방문을, 한국 내부의 매국노 수괴로는 이완용을, 그리고 외국인 친일파로는 일본의 한국 침략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지목하여 여러 갈래로 처단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그 전해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함께 스티븐스 처단에 성공한 전명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오면서 그런 국적 처단의 열의는 한층 달아올랐다.”(280)

 

안중근은 대동공보의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치밀하게 이등방문 암살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하얼빈에서 거사 전야에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각각 권총을 한 자루씩 나눠 가졌다. 안중근은 가슴 속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비분과 강개기 일었다. 그는 한지를 펴고 한시로 자신의 감회를 적었다.

 

장부가 세상을 살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들리니,

우뚝 천하를 노려봄이여, 어느 날에 공업을 이루리오.

동풍은 갈수록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 오히려 뜨겁도다.

쥐 같은 도적 이등이여,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

이리 될 줄 알았으랴만,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동포여, 동포여, 하루 빨리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를 외침이여, 대한독립을 위함이로다.

만년 또 만년을 이어가라, 우리 대한 동포여.“

 

우덕순이 안중근의 장부가를 읽고는 감동 받아 스스로 의거가 또는 보구가를 써나갔다.

우덕순 의사가 '의거가'를 지은 것은 거사가 있기 3일 전인 23일 저녁. 거사를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이 '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의사가 '의거가'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거사의 결의를 거듭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평생 한번 만나기가 왜 그리 어렵던 가

너를 한 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몇 천리를

천신만고 거듭하여 가시성을 더듬었다.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청국노국 방황할 때

해님께 기도하며 야소께 경배하며

보살피사 도우소서 동 반도 대한제국을

보살펴 주소서 원컨대 내 뜻을 도와주소서

오호라 간악한 늙은 도적 이등방문아

우리와 우리 민족 2천만 인을 멸종한 뒤에

삼천리금수강산을 소리 없이 뺏으려고

흉악하고 참담한 수단 십 강국을 속여서

내장을 다 뽑아 먹고도 그 무슨 부족에

그 욕심 채우려고 쥐새끼처럼 뛰어 다니며

누구를 또 속이고 누구 땅을 또 뺏으려는가....“(319)

 

 

드디어 거사의 날이다.

작가는 하얼빈의 열하루장에서 안중군이 이등방문을 암살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19091026일 하얼빈 역

 

환영 인파 사이에서 몸을 빼내 외국사절단과 문관들이 모여 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맨 앞에는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른 늙은이 하나가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휘젓고 다닌다는 느낌을 줄 만큼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등방문일 것이다.’

그렇게 헤아린 안중근은 곧 러시아 의장병 뒷줄로 다가가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그 늙은이를 향해 세발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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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안중근은 자동으로 재 장전된 한발이 남은 권총으로 내던지고 목청껏 소리쳤다.

카레이 우라(대한만세)! 카레이 우라.....”(302-303)

                  안중근 장군의 의거를 재현한 유화 그림(김봉학), 사진출처=길림신문 김혁의 독서만필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 안중근을 묘사한 그림. 한겨레 자료)

역사적 평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형이 단기적으로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이나 일본 내 합방 분위기를 고조시킨 면은 있다. 이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열도에서는 메이지 원훈이 살해됐다고 격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복수를 부르짖는가 하면, ‘즉시 합방을 외치는 과격한 주장이 들끓었다. 그러나 이토 사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내 민심이 환희에 달아오르며 민중에게 독립 의지를 고취한 정도는 그보다 100배 이상 컸다.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안중근만큼 즉각 주목받은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안중근이 처형된 지 3주 뒤인 19104월 국내에서 발행된 <근세역사>는 안중근의 출생에서부터 공판 과정과 사형당하는 순간까지를 기술하며 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1910년대에만 6종의 안중근 전기가 출간되었고 그의 사진과 기념 달력·엽서가 발간되었다. 식민지로 전락해 좌절에 빠진 상황에서 그의 의거는 이를 극복하는 발화점 역할을 했고, 1910년대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 내내 독립운동의 좌표가 되었다." [제824호]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지 않았다면 : 특집일반 : 특집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하얼빈 의거 발생 한 달여가 지난 1909년 12월2일 일본 박화관이 새겨 발행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석판화. 고판화박물관 제공:  석판화는 러시아 재상 코코흐체프의 초청으로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를 저격하는 생생한 장면을 그렸다. ‘이토공 조난지도(伊藤公 遭難之圖)’라는 제목의 석판화는 안 의사를 ‘흉한(兇漢)’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 흉한이 나타나 총을 쐈다…”는 것이다. 떨어진 총알에서 연기가 나고, 러시아 장교에 의해 제압당해 모자와 총이 땅에 떨어졌지만 이토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안 의사의 저항정신이 잘 묘사돼 있다. 화면 옆면에는 사건의 요지를 알 수 있는 보도기사도 실려 있다.

 

 

안중근은 공판 과정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거사를 떳떳하게 정당화했다.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는 그가 살아 있으면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는 더욱 멀어지기 때문에 대한의군부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적장(敵將)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며, 나아가서는 오대양 육대주에서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나는 결코 오해로 이등박문을 죽인 게 아니라, 그와 같은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등박문이 한국에서의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듣는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하게 여길 것이라 믿는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이 개선된다면 한일 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388)

 

 

훗날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겼다.

 

그러자 안중근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우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가 회복되도록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일러 다오. 모두가 각각 나랏일에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대한 독립의 공을 세우고 위대한 조국 건설의 대업을 이루도록 하라고.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414-415)

 

나는 조국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였다. 이미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길 말이 없다.”

안중근이 남기고 간 이 마지막 유언은 이 땅의 모든 청춘에게 들려주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진정한 영웅의 결연한 외침이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갈파한 동양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체 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선구적인 사상이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옥중에 안중근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그의 의거와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 당시 많은 중국의 깨친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기리는 추도문을 남겼다.

 

 

아버지 안태훈의 호족 활동(豪族活動)을 이어받으면서 자라난 안중근의사의 호민 정신(護民精神)은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과 더불어 동족애(동족애)로 확대되고, 을사조약 이후가 되면 확한 민족조의로 자라잡는다. 그 뒤 조국과 민족은 안 의사에게 지상의 가치이자 실존의 한 양식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편협한 종족주의를 벗어난 그의 사상은 동양평화론의 대하를 따라 흐르며 세계주의와 보편적 인간애의 바다를 지향한다. 그러나 불행한 시대는 그런 안 의사의 성숙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431-432)

 

내 친구 작가 이문열은 안 의사의 짧은 30여년의 불꽃같은 삶을 조국의 독립에 받친 그의 생애를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나라가 급변하는 정세 속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의 사람을 영원히 불멸의 기억으로 새겼다. “살아서는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년을 살리라”( )라고 한 두 중국인들이 묘사한 안중근에 대한 이 소설은 어떠한 전기나 역사서보다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불꽃감은 삶과 피 끓는 고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동, 조국의 운명을 안고 온몸으로 산화한 대한국인 안중군의 생애를 소설 <죽어 천년을 살리라>에서 느껴보자.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 당시 여러나라 언론의 반응을 보자:

당시 국내 언론 대부분은 일제의 탄압으로 의거를 사실 보도하는 데 그쳤다. 반면 런던타임즈는 “상당수 한국인이 암살을 접하고 환희하고 있다”는 비판 기사를 실으면서 안중근은 ‘정치적 광분자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또 뉴욕타임즈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제국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일본을 옹호하는 모양새였다. 반면 중국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 원수를 대신해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대구 가톨릭대 교정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동상. (사진 대구 가톨릭대)

 

 

이토히로부미는 어떤 자인가?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18411016~ 19091026)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5·7·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사족(蛇足): 안중근을 다른 소설이 최근에 작가 김훈에 의해서 <하얼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두 동갑내기,  기라성 같은 작가가 같은 인물을 소설로 다룬 것도 흥미롭다. 아직 김훈 작가의 <하벌빈>을 읽지 않아서 두 작품에 대해 대비하는 글은 쓸 수 없다. 다만 한국경제 기자가 2022. 8. 6일 자로  "소설가 김훈·이문열의 안중근..어떻게 다를까 [X] " 제목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기자는 결론에서 " '영웅'으로 박제돼있던 안중근을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되살려 냈다는 점은 두 소설의 공통적인 성취다. 방대한 기록을 치열하게 취재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은 자신만의 문장으로 복원했다."고 의미있게 지적했다. 이문열은 "대의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불멸의 존재가 된 투사 안중근을 그려냈다."고 했듯이   안중근 인생의 전반을 다루어 864쪽의 방대한 장편 소설로, 김훈은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 안중근의 청년시절 이후를 다루었다. 그래서 308쪽의 분량으로 압축해서 썼다. 그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안중근이라는 인간의 청춘과 그 내면을 그리려 했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