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로마 고대 문화 맛보기 여행Rome Ancient Culture Tour

Kyuchin Kim 2022. 6. 5. 07:00

 

로마 

"여기는 과거에도 위대한 곳이었고, 지금도 위대한 곳이며, 앞으로도 위대한 곳일 것이다." "나는 로마에서 다시 태어났다."괴테

“This was a great place in the past, a great place now, and will always be a great place.” “I was born again in Rome.”

 

바티칸 광장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새로 태어났다고 한 <파우스트>를 쓴 독일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는 로마를 여행하고 이렇게 썼다. “나는 로마에 있을 때에만 정말로 인간답게 느꼈다. 그처럼 높은 감정도, 그와 같은 행복감도 그 후에는 다시는 느끼지 못했다. 로마 체류에 비교하면 그 이후의 일들은 결코 그만큼은 즐겁지 않았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중에서

괴테는 1786  9월 3일년 지금의 체코 온천 도시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에서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On September 3, 1786, Goethe slipped away from the Bohemian spa of Carlsbad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에서 본 괴테 로마 배경 초상화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Goethe in the Roman Campagna)

                 Goethe in the Roman Campagna, oil on canvas by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87; in the Städel Museum, Frankfurt am Main, Germany.

 

 

 

괴테는 37살에 로마를 방문했는데, 나는 64살에 피렌체를 구경하고 르네상스 문화에 심취하였다.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한국외대에서 30여년 간 로마 라틴 문학을 포함하여 "서양명작의 이해와 감상"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로마 라틴 문학을 알고 있었지만 중세와 르네상스의 문화의 원천지의 수많은 예술 작품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당시 14-16세기에 피렌체의 기업인들의 위대한 가문이 그런 엄청난 문화를 이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보호해왔는지? 어떤 왕국보다도 못하지 않은 예술품을 수집 보관하고 있다니. 우리는 어릴 때 동네 부잣집이나, 종가 댁이, 도시의 고관대작의 집이나, 서원에서는 문화라고 할 만한 예술 작품들이나 문화유적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이탈리아는 중세시대에 어떻게 이런 문화를 이루었을까? 이 문화가 유럽 전체로 퍼져서 유럽 근대 문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되어 오늘날까지 세계 문명 발달을 주도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에 충격을 받은 채, 어리둥절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로마로 향했다. 가이드가 피렌체에서 보고 느낀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다들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체코인들은 원래 그들 문화의 원류를 본 것 같다고 한다. 다들 찬사를 금치 못한다. 나보다는 덜 충격적이지만 놀라운 예술의 정수를 봤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게도 인상을 물었을 때 나는 입이 벌어져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내 느낌을 글로서 적어 보내겠다고 했다. 물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충격을 받고 탄성을 많이 질렀지만. 이어서 가이드가 내일 관광할 로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준다. 로마의 여행은 변두리 작은 호텔에서 출발하여, 옛 체코 대사관 자리, 체코문화원, 체코인들이 살았던 유적지를 살짝 보면서 로마의 중심지에 있는 바티칸이라는 도시국가를 주로 보여주겠다고 한다. 로마는 최소한 일주일은 봐야하는데 여러 사정으로 24시간 동안 고대 문화와 근대문명을 맛보기로 한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다시 방문후 논하고 싶다. 

 

먼저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을 조금 보고 여행을 계속하자.

https://youtu.be/1yV-Mr2DS14

 

 

깃발을 든 체코인 가이드와 로마 콜로세움 앞에서:

콜로세움은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로마에서 받은 가장  큰 감명의 하나다. 1980년 1월 미국 앤아버 미시간 대학 유학가서 본 미식 축구경기장을 봤을 때도 비슷한 충격을 받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한국의 거대한 월드컵 돔 축구장 등 현대의 거대한 돔 형식의 건축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본 반원형 극장이 물론 이러한 원형 경기장의 원류라는 것을 알았지만. 경이롭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 경기장에서 로마 귀족들과 시민들이 검투사의 잔인한 경기를 즐겼다니. 벤허에 나오는 화려한 마차경기도, 사나운 야생동물과 인간의 대결도 여기서 벌어졌다. 

사자를 싸우는 검투사의 모습

 

 

콜로세움(Colosseum)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등으로 지어져 있고,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상징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동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의 파노라마: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필자가 1980년 1월 유학가서 본 미시간 대학 미식 축구경기장: 1927년에 개장할 당시에도 72,000석 규모의 상당히 큰 경기장이였으며, 이후 증축을 통해 현재는 107,601석의 좌석을 갖추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자, 세계에서는 3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2002년도 한.일 축구 월드컵 경기장 용으로 지은 상암동 축구경기장 규묘는 약 66,000석이다.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다만 중세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고 로마가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와 같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요새, 교회외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은 강도, 약탈, 채석과 같은 파괴 행위로 상당 부분이 손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로마 문명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며 2018년에는 4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조상의 유물로 살아가는 로마인가?  (https://ko.wikipedia.org/wiki/콜로세움) 참조

 
바티칸 시국
 

 

 

 

바티칸광장

모나코, 싱가포르와 더불어 도시 국가인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 나라이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 안에 있는 나라 속의, 도시 속의 조그마한 나라 시국(市國)이라고 할 수 있다.

 

 

 

바티칸 시국(Civitas Vaticana)은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가톨릭 교황국이다. , 이탈리아라는 나라 의 수도 로마 속에 또 하나의 작은 나라이다. 바티칸 시국은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위대한 가톨릭의 역사와 가톨릭 문화의 정수가 가장 풍부하게 보존된 곳이다. 도시 자체가 가톨릭과 관련된 예술작품들과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바티칸 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수 있을까? 물론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Sancti Petr)이다. 또는 바티칸 대성전(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불리는 성 베드로 성당은 바티칸시국에 있는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 교회이며, 성 베드로의 무덤과 둥근 지붕(Cupola)를 볼 수 있는 곳다. 특히, 성 베드로 성당 둥근 지붕에 오르면 가장 유명한 광경인 열쇠 모양의 바티칸 시국과 로마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일명 '천국의 열쇠'라고 불리는 산 피에트로 광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작은 도시 국가 바티칸의 아름답고 화려한 건축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죄우 대칭의 건축 균형미의 상징이다.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면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높이 40m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오벨리스크는 서기 40년 칼라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원석이다. 가톨릭 교회 총본산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 이교도의 상징인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이유는 뭘까. 바로 이 거대한 대리석이 베드로 사도의 순교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광장은 원래 네로 황제의 경기장이 있던 자리였다. 오벨리스크는 베드로 사도가 네로 황제의 경기장에서 순교할 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목격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훗날 네로의 경기장은 모두 철거되었으나 오벨리스크는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광장 중심에 ‘목격자’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십자가를 얹어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주위에는 네 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서 광장을 감싸도록 설계했고 웅장한 도리스식 열주 위에는 가톨릭 성인들의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다."(바티칸=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 참조

 

 

https://youtu.be/dNjntajiBwA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이 대성당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4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청동상: 돔의 북동쪽 피어의 반대편 의자 앉은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13세기 조각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대성당의 명물로 통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미켈란제로의 설계에 따라 돔 공사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가 완성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à, 1498-1499)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것으로 현재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품이다.  이 피에타상은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작품이다.  이 유명한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표현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앳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나,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매우 거대하게 표현된 점, 그리고 사망한 후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하는 예수의 몸이 부드럽게 늘어져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점 등 매우 독창적으로 제작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https://youtu.be/rbgpJALaUps

 
 

 

바티칸 박물관 내부천정화 로마 문명의 극치

그 다음 무엇을 봐야 할까? 어제 피렌체에서도 볼 것이 너무 많아 일단 우피치 미술관을 보고 시간 적 여유가 있으면 다른 곳을 보았듯이. 여기 로마 바티칸 시국에서도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또는 바티칸 미술관을 먼저 봐야한다. 바티칸 박물관은 시스티나 성당, 궁전, 미술관, 박물관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성당을 먼저 봐야한다. 볼거리가 너무 많으니까. 가이드가 가르쳐 준대로 바티칸 광장에서 기나긴 줄 뒤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바티칸 시국과 바티칸 박물관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고 자유롭게 3시간 후에 박물관 출구에서 만나자고 한다.

아침 일찍 왔지만 한 두 시간은 걸려야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것 같다고 한다. 어제 우피치 미술관에서처럼 빨리 들어가는 방법을 물으니 한국어, 영어, 폴란드어 가이드와 함께 공식 입장료에 20달러를 더 내면은 가이드투어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대부분 체코인 여행객들은 한두 시간 줄 서서 기다렸다가 들어간다고 한다. 어제 함께 들어간 젊은이한테 같이 가자고 하니 여유가 없어 그냥 기다렸다가 보겠다고 한다. 나는 한국 가이드를 따라가니 금방 특별 입구로 들어간다. 황홀하다. 이 위대한 미술관에도 급행료로 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가다니. 물론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예약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한국어로 시스틴 성당 정도 설명을 간단히 하고는 자유롭게 보라고 한다. 박물관 전체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으로 만족하며 홀로 수많은 군중 들 속에서 간신히 몸을 움직이며 천정, , 바닥 등에 배치된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 흠뻑 빠졌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마라라고 군데 군데 사인이 있고 직원들이 여기저기 서있지만  별로 게이지 않는다, 눈치 것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보여서 나도 몇 컷을 찍었다. 어제 우피치 미술관에서 황홀경에 젖어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 인지 오늘은 더 위대한 작품들과 광경들이 펼쳐지지만 덜 충격적이다그저 감탄만 속으로 자주 할뿐이다.

시간 관계상 미리 준비한 미술관 안내 책자를 가이드 삼아 중요한 그림들과 조각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바티칸 미술관의 계단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세워진 광대한 바티칸 박물관 전시관에는 수세기에 걸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바티칸 미술관은 16세기에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바티칸 미술관과 통하는 방문 경로에는 시스티나 성당과 라파엘로가 장식한 서명의 방이 있다.

 

바티칸 내부 시스티나 성당 예술품

 
 

미술관 중요작품을 알아보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天地創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유일한 신께서 이세계를 창조를 뜻을 담고있는 설화이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져 있는 아담의 창조가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1508510, 그의 조수들과 함께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간다. 그는 그림들 역순서대로 그렸는데 혹 잘못하지 않을 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천장을 9개의 틀로 나누었고, 다시 34개의 면으로 나누었다.

제단 쪽에서부터 '창세기'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그릴 작정이었는데 그의 첫 그림은 입구 쪽에 있는 '술취한 노아'였다. 전체 그림은 주제는 천장 중앙은'창세기',그 주변은 '12인의 무녀와 예언자' 삼각형 형태의 벽과 반월형 벽면은 '그리스도의 조상', 그리고 네 모퉁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려 넣었다.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天地創造 ) 중 아담의 창조 : Michelangelo's Creation of Adam in Context of Sistine Chapel Frescoes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벽화의 하나이다. 하느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창세기 속 성경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성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히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느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은 화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로 1510 ~ 1511년에 바티칸 사도 궁전 내부의 방들 가운데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에 교황 율리오 2세를 위해 만들어졌다.

14. 플라톤과 15 아리스토텔레스 (디테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바티칸내부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기원전 63년 - 서기 14)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 서기 14)이다이조각상은 키아라몬티 미술관에 있다. 

 

 

 
 

 

바티칸박물관 내부천정화 로마 문명의 극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11626759&memberNo=1974376

 

 

위에 아주 간단히 바티칸 시국의 바티칸 박물관의 예술품을 맛보고 나오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곧 고대로마문명 유적지로 향한다.버스간에서 간단히 소개를 한다. 

 

폐허가 된 로마 고대 유적

빗토리오 에마누엘레2세기념관과 성모 마리아성당

 

 

 

폐허가 된 로마유적

 

고대 그리스(희랍-헬라) 문학과 로마 라틴문학은 유럽 문학 또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여러 장르 문학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문학은 BC 800년경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Odysseia)로 시작된다. 로마 문학은 고대 그리스문학의 아류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엄청난 가치있는 작품들을 창조했다.

 

그 중 로마문학은 그리스문학, 특히 알렉산드로스대왕 이후 근동과 지중해 연안 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헬레니즘문학의 일환으로서 자라난 것이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통어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예외적으로 자기의 언어인 라틴어에 그리스문학을 이식(移植)하여 라틴어에 의한 문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기원 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문학이지만, 동일한 헬레니즘의 흐름 속에 있었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BC 284?BC 204?)의 뒤를 이어 나이비우스(BC 270?BC 200?)가 비극과 희극작품을 아울러 저작하였으며, 특히 희극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마침내 그 절정에 달하였다.

 

BC 30년에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제정(帝政)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시민들이 바라는 평화를 로마에 가져다 주었다. 이에 호응한 것이 베르길리우스(BC 70BC 19)호라티우스의 시와, 리비우스(BC 59BC 17)의 역사였다. 로마의 국민적인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목가(牧歌) 교훈시 영웅서사시의 완성자가 되었다. 그 후 11년에 걸쳐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를 썼는데, 이 작품으로 그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한편 호라티우스는 서정시와 루킬리우스 이래의 풍자시를 비롯하여 <서간(書簡)>이라고 하는 경묘하고 화사한 시를 썼다. 특히 그의 서간 중의 하나인 <시론(詩論)>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변사학(辯辭學)이 점차로 문학을 좀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비디우스(BC 43AD 18?)는 변사술을 역이용하여 다채로운 시를 저작하였으며, 산문에 있어서도 키케로로부터 다음의 백은시대(白銀時代)에 이르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 역사문학의 정점을 이룬 리비우스는 <로마사()>를 완성하였다.

카이사르(BC 100BC 44)와 그의 정적 키케로(BC 106BC 43)가 로마 시대의 가장 탁월한 웅변가였다.

 

로마 라틴문의 최고의 작가는 베르길리우스 [Vergilius Maro, Publius BC 70.10.15~BC 19.9.21]이다. 

버질(Virgil)은 영어 이름이다. 이탈리아 북부 만투바 근교의 농가에 태어나, 크레모나와 밀라노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다시 로마에서 공부를 했다. 철학 의학 수사학(修辭學) 등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법률가를 지망하였으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도중에 단념하고,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0세 때 <에클로가에(田園詩) Eclogae>를  시작하여 33세에 완성하였다. 되었다. BC 30년 제2작품인 <농경시(農耕詩) Georgica>를 발표하였다.

그 후 11년에 걸쳐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를 썼는데, 이 작품으로 그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스>는 미완성 작품으로 현재 12권이 남아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안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으며, 체격이 단단하여 마치 건강한 농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건강 때문에 평소에 소식(小食)을 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독신생활을 하면서 겸허하게 처신하였다. 그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서양문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애국심과 종교적인 경건함, 풍부한 교양과 시인으로서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기교, 이러한 점들로 해서 그는 문자 그대로 <시성(詩聖)>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단테가 <신곡(神曲)>에서 그를 안내자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로마의 건축, 로마 바티칸 시국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된 장품들을 조금 알아봤다. 내가 30여년 가르친 로마 문학도 조금 소개했다. 로마고대 문화유적도 맛을 보았다. 

다음에는 더 자세히 로마를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