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소련 시대 위대한 화가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와 블라디보스토크역방문

Kyuchin Kim 2019. 10. 7. 00:30

소련 시대 위대한 화가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를 만나다.  블라디보스토크역방문기


공기와 빛: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의 전시 포스터



9시 넘어 전시장에 가니 출입문이 잠겨 있다. 좀 기다리니 러시아 당사자들이 온다. 오전 내내 전시장을 둘러보고 계획을 수정하다. 점심 먹으로 다시 Korea House에 가다. 오늘은 해물칼국수를 시켰는데 별로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어제 내가 먹은 해물순두부를 시킨다. 다들 만족해한다. 북측 정사장, 프랑스를 대표하는 분, 여기에 사는 교포, 또 여기에 사는 북한 출신 등 9명이 함께 점심을 먹다.
점심 후 김한신 회장님이 롯데호텔에 있는 코트라 관장을 만날 동안 우리는 차로 가까운데 있는 미술관을 찾아가다. 김세병 사장과 권사장은 그림에 취미가 없어 기사 세르게이군과 커피를 마시러 가다.
소련 시대 위대한 화가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 (Валентина Диффинэ-Кристи: Valentina Mikhailovna Diffine-Christie)의 전시회를 보다.
Картины Валентины Михайловны (Приморской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галереи во Владивостоке).
Primorskaya Gosudarstvennaya Kartinnaya Galereya
Address: Partizanskiy Prospekt, 12, Vladivostok, Primorskiy kray, 690106
플로렌스 우피치에서 온 <마돈나와 아기 예수> (Madonna dela Loggia)를 보러 갔는데 잘못 왔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있어 들어 가봤다. 이 연해주국립그림 갤러리는 작은 규모의 미술관이다. 근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주 친절하다. 엽서 두 장과 옛 책 한권을 들고 얼마냐고 물으니 예술을 사랑하는 교수님 같으니 선물로 준다고 한다. 뜻밖이다. 지난 세기 60년대 소련시대의 위대한 두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전시회내용이 바뀐다고 한다. 전시회가 끝나면 개인 소장 작품들은 판매도한다고 한다. 그림에 대해 물으니 약간 설명도 해준다. 해설서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초라한 미술관이지만 위대한 소비에트 화가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니 행복하다.


그림  가정 오케스트라 1964년, Valentina Michailovna Diffine-Kristi



발렌티나 미하일로바 디피네-크리스티(Valentina Mikhailovna Diffine-Christie, 1918-2010)는 구소련 예술가협회 모스크바지부회원이었다. 그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하여 자신만의 개인주의 스타일을 추구하여 결국 모스크바 미술가협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축출 당했다. 다시 복권하여 그 후 50-60년대 그녀는 소련예술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녀는 풍경화, 정물화, 공장노동자들을 주로 그렸다. 그녀는 공장의 주문에 의하여 국내 전 테마를 많이 그렸으나, 훗날 그녀는 타고난 재능으로 이 세상의 채색을 날카롭게 파악하여 캔버스에 옮겼다.
젊은 시절 그녀는 풍경화의 대가 콘스탄틴 코로빈의 전통을 이어 남편, 오네긴 디피네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 유형은 소위 말하는 “영적인 인상주의”(spiritual impressionism.)다. 그녀의 특징은 크리모프(Krymov), 사프노프(Sapunov), 사리안(Saryan), 쿠즈네초프(P. Kuznetsov) 등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러시아 화가들이 추구한 예술적 탐구와 비슷하다. 디피네- 크리스티의 회화들은 인상주의 방법을 연상시킨다. 분리된 색깔의 화법을 사용함으로서 그 화법들이 보다 더 다양하고, 융통성 있고,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들은 형식과 공간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억제된 서정적 이미지를 창조한다. 미묘하고 겸손하고 시적인 경향은 회화의 감성적인 표현을 고양시키고 그림의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 채색의 방법은 그녀의 회화에 있어서 분위기를 좌우한다.
회화의 예술적 영향을 달성함으로써 그녀는 평면 위에서 율동적인 다양성과 색채의 배합의 표현성을 달성한다. 이는 회회에 음악성을 부여한다.
작은 미술관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열심히 설명해주어서 그림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서 50-60년대 러시아 그림의 진수를 보다.
보고 나와서 세르게이와 김사장에게 한데 문자를 보내고, 주위를 산책하다.



Валентина Диффинэ-Кристи. 자화상(1960): 19세기말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20세기초 표현주의 기법이 보인다.



다시 모두 만나 전시장으로 가다. 시내 교통이 평일이고 오후시간인데 벌써 막히는 곳이 많다. 간선도로 한두 개 외에는 신호체계가 아예 없어 운전사들이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키며 운전하지만 체증이 자주 일어난다. 운전사의 심리는 어디를 가나 비슷한 것 같다. 첫날부터 느꼈지만 거리에는 95% 이상 일본 중고차들이 누비고 다닌다. 그래서 대부분 차가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다. 10여 년 전 캄보디아에 갔을 때 일본 중고차들은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고 한국중고차들은 왼쪽에 운전석이 있는 기이한 장면을 봤는데 여기서는 대부분 차가 일본중고차라 모두 왼쪽에 운전석이 있다. 세르게이가 몰고 다니는 도요타 밴도 마찬가지다. 세르게이 한테 물어보니 러시아의 큰 도시에는 한국 현대차가 꽤 많이 굴러다니지만 여기 블라다보스토크는 대부분 일제 차가 다닌다고 한다. 여기 사람들은 자동차 하면 일본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기술과 상술은 놀랍다. 가끔 길 쪽으로 타고 내릴 때 마다 차들이 지나가는 쪽이라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워낙 속도가 나지 않아 큰 사고는 나지 않는다. 그저께부터 매일 한두 번 접촉사고는 목격하지만. 그럴 때마다 교통제증은 더 심하게 일어난다. 러시아사람들 인내심이 대단하다. 경적소리를 잘 울리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나 나름대로 질서가 유지된다. 신호체계가 별로 없는데도 시내 교통이 유지되고 있으니.



운전사 겸 안내 대학생 세르게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은 늘 버스와 인파로 붐빈다.

오늘은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블라디보스토크 역(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вокзал)을 방문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며 하얼빈으로 가는 동청철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으로 가는 아에로익스프레스가 있다. 이는 푸친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동방으로 향한 창으로 집중개발하면서 2012년에 APEC 개최를 대비하여 건설한 것이다. 또 여기서 북한 나진으로도 연결되는 곳이다. 그리고 역사 건물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항구-여객선 터미널이 주변에 있어서 육교로 몇 분만 걸어가면 된다. 요즈음 한국관광객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키를 거처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열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 독립군들의 애환을 되새겨 보거나 시베리아로 유형 온 19세기 초반의 러시아 뎨카브리스트 파 작가들의 유적이나 박물관을 살펴보는 여행이 인기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풍 러시아 도시문화를 즐길 수 있다. 또 더 여유가 있는 관광객들은 3도시 열차 여행 후,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로 항공기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도 인기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1900년대 초반에는 일제침략에 맞서는 독립군들이 이동하던 역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한국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1919-1920년대 청산리 전투 등 우리 독립군대가 그 당시 이곳을 거쳐 유럽으로 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들로부터 구입한 당시로 봐서 최첨단 무기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역사도 있다. 이보다 훨씬 전 1860년대 조선인들이 조선의 기근을 피해 이 지역으로 이민 온 역사도 있다. 훗날 독립운동과 이 지역 조선인 계몽운동을 한 최재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묵은 아지무트 호텔 앞에서 우연히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란 책자를 구했다. 한권은 권사장님에게 주었다. 귀중한 자료라고 읽어보겠다고 한다. 나는 책을 펼치자 감동적인 이야기라 틈틈이 읽어보았다. 19세기부터 스탈린 시대까지 생생한 조선인-고려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놀라운 기록물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딸 최올가 여사와 아들 최발렌틴 씨가 쓴 육필원고를 번역한 책이다. 최재형(1860-1920) 선생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도서출판 상상이 출간했다. 최올가와 최발렌틴은 소련에서 기막힌 인생을 살아온 이야기도 숨을 죽이게 한다. 그들의 생생한 인생기록은 마치 스탈린 시대의 수용소를 다룬 소설 같다. 이 책을 번역한 정민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항일 독립 운동의 대부다. 18608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연해주로 건너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주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군납을 하고 무역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그는 연해주의 수 많은 독립투사들에게 무기와 숙식을 제공하는 등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대장으로서 직접 항일 유격대를 이끌고 항일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186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의 연해주 이주로 조성된 한인 마을 곳곳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문화 계몽운동을 통하여 이주민들의 문화적 수준을 향상하는 데 주력했으며 학교를 마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기금과 자비를 들여 러시아 전역으로 유학을 보냈다.

1909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항일투사들은 1907년부터 연해주에 와 있던 안중근을 거사 설행자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간도 관리사 이범윤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작전 준비했다. 노보키옙스크에서 본격적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최재형은 안중근이 자신의 집 창고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한 사격 연습을 하도록 하는 등 치밀한 계획 수립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를 뒷받침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이들의 육필 원고를 번역한 정헌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독립이 되고 난 후 독립투사들의 자손들, 한반도에 남겨진 자손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국가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끝까지 존경하고 추념해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 월드코리안뉴스(http://www.worldkorean.net)

백번 맞는 말이다. 일제치하에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본인은 물론이오, 나중에 그 가족들이 비참한 생활을 살게 된 것을 나라가 정부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 어릴 때 우리 고향 무섬마을에도 독립운동 하다가 희생되어 가장이 없는 가족의 어려운 삶을 목격한 필자는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이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이 최근에 와서야 살아남은 가족에게 명에를 회복해주고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한 것은 다행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은 보람은 무엇보다도 크다 하겠다.


  역 주위 주상복합건물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역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하얼빈으로 떠났다. 그는 가기 전에 최재형이 준비한 곳에서 권총사격 연습을 했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를 시작한 역으로 고려인/한국인들의 아픈 역사를 지닌 역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재외동포신문인 <한인일보>에도 이런 독립군들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소개하고 있다. 1937921~11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고려인 동포 모두가 6km 떨어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서글픈 아픔을 지닌 역이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고려인들의 반일 감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해주지역의 국경지방에 사는 고려인들이 일본사람과 외형적으로 생김새가 비슷해 식별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고려인들은 군사전략상 부득이하게 간도지방과 접경한 러시아 국경지역에 살고 있어서, 고려인들을 모두 연해주에서 추방시켜 일본과의 전쟁에서 악재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제거하고자 했다. 1931년 일본군이 이미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일본의 군사적 활동을 두려워했다. 또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발하여 전쟁 군량미 확보 등으로 경제적 안정이 목적이었다. 이리하여 고려인들의 대대적인 디아스포라가 일어났고,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지역에서 자리를 잡아 삶을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내부



역 천장: 포스트모던 스타일 현대식 벽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적 건물들을 멋지게 그려넣었다.


공식적인 소련의 문서를 보면 124대의 수송열차에 36442가구 171781명이 탔으며 이들은 모두 중앙아시아 10개 지역으로 수송 배치되었다. 그 당시에는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어진 화물열차로 40여일 걸렸다. 그리고 10월이 넘으면서 시베리아 삭풍이 휘몰아치면서 열차에서 굶어죽고, 홍역과 학질 등의 병으로 앓아죽고, 날이 추워 얼어 죽는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60%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깊은 감회에 젖어보았다. 역사를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이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있는 이 연해주 지역은 고구려인들과 발해인들이 활동을 한 지역이기도 한다. 즉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지역이다. 지금은 한국 회사들이 투자를 모색하고 있고, 북한도 여기서 활발하게 무역 활동을 하고 있다. 모두들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사는 17세기 러시아-유럽풍의 파사드(façade)형태 건축물이다. 이는 9288떨어진 곳에 있는 모스크바의 극동노선의 야로슬라브 역사를 거의 똑같이 모방하여 건축 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대중교통수단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을 정도 화려한 건축물이다. 내부 대합실 천정은 궁전이나 박물관 같이 화려하다. 제정 러시아 와 소련 시대에 건설한 대도시의 기차역은 대부분 규모가 크고 화려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대합실 천장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양 도시의 상징물로 장식되었다. 겉모습은 1994년까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나 역사 보수와 함께 상아색으로 바뀌었다. 역 건물이 예술 작품 같다.

역에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주변의 거리가게에서 간단힌 샌드위치나 커피 등을 즐길 수 있다. 또 역사 내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어 차 한 잔 마시거나 주머니가 여유가 된다면 화려한 천정화를 자랑하는 카페에서 한 끼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역 앞에 전시된 증기기관차: 닥터 지바고에서 눈을 흩뿌리며 지나가던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생각나게 한다.


역에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주변의 거리가게에서 간단힌 샌드위치나 커피 등을 즐길 수있다. 또 역사 내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어 차 한 잔 마시거나 주머니가 여유가 된다면 화려한 천정화를 자랑하는 카페에서 한 끼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최근  일정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24일 오후 북·러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했다. 현지에서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오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김 위원장과 실무 오찬을 갖고 단독·확대 회담을 했다. 두 정상은 이번 첫 대면 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 국면에 있어서의 '우호 증진'에 방점을 둔 논의를 했다. 이런 면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현대사에서도 극동 지방에서 중요한 만남의 광장이다.



오후 늦게 들어오는 길에 다 같이 장보기를 해서 오다. 오늘도 에센투키 N4를 몇 병 사다. 이제 술 먹을 때마다 이 광천수를 마시니 속이 편하다. 7이라는 러시아 맥주도 자작나무란 보드카도 사다. 국거리용 쇠고기 한 덩어리를 사다. 무, 샐러드, 마늘도 사다. 저녁에 김회장님이 쇠고기 무국을 끓이다.  20190919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