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다리 무섬동네에서의 시집살이

무섬 동네로 시집오면 반드시 가매(가마) 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한다.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 석 3년을 살았더니 배꽃 같던 내얼굴 할미꽃이 다 되었네!"
“I as a new daughter-in-law lived deaf for 3 years, blind for 3 years, dumb for 3 years and altogether 9 years in my husband's house, and my face, which was like a pear flower, has become a grandma flower(pasqueflower)!”
그러나 이웃집 봉대댁 영진이가 유성기를 구해와서 저녁에 가끔 노래를 들려주면 하루의 고생도 다 잊어버린다.
남인수 작사 노래: 청춘고백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몹쓸 건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이내 청춘
좋다 할 때 뿌리치고 싫다 할 때 달겨드는
모를 것 이내 마음
봉오리 꺾어서 울려 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이내 청춘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 석 3년을 살았더니 배꽃 같던 내얼굴 할미꽃이 다 되었네!"
친정할머니, 어머니의 부탁으로 시댁에서 아무 탈 없이 시집식구처럼 무난히 살려면 참고 또 참아야 하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시집살이 초기 뭐든지 잘못 되는 게 있으면 새사람, 즉 새로 온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우리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떤 날 돌중이 공양을 얻어가면서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부적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녀라고 한다. 시집올때 할매와 어매는 무섬은 양반동네이니 중이나 무당을 멀리하라고 하던 말씀이 생각나서 돌중의 말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나는 다행히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자상히 보살펴 줘서 이를 일찍 극복했다. 뭐든지 집안에 어려운 일 있으면 주저없이 시아버님께 말씀 드렸더니 "니는 워떻게 그렇게 지혜롭노"하시고 칭찬해주셔서 자신감을 가지고 시집살이를 무사히 할 수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시아버님의 중후한 인품 덕택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돌중이 공양을 얻어가면서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부적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녀라고 한다. 방석마을에서 김씨네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나중에 알게되었는데 마을 김씨 문중에서 결혼 상례 조상제사 등 큰 일은 우리 시아버님이 도 맡아 하셨다. 집안에 병이나 우환이 생겨도 우리 시아버님이 침통에 넣어다니시는 침으로 엔간한 통증 병은 다 낳게 해주셨고 간단한 한약도 지어서 드렸다. 나중에 중간마을 풍산 아지뱀이 우리 시아버님한테 배워서 마을의 우환이 있는 집을 많이 도우셨다. 물건너 우리 일가 향서는 충치도 잘 고쳐주곤 했다. 그 당시 읍내에 병원이나 의원은 큰 병이 생겨야 간다. 아이들 감기도 파뿌리나 약초로 다 다스렸다. 우리는 토종꿀 한숫가락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면 감기는 곧 도망가 버린다. 들이나 밭에서 손에 상처를 입으면 사랑어른이 약쑥하고 다른 약초 두가지를 썪어서 돌 위에 잘 빻아서 그 즙을 바르면 피가 멈춘다. 처음 봤을 때는 신비했다.

농촌 생활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모두들 들로 산으로 일 나가면 나는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축들도 돌봤다. 닭 모이 줄라 돼지 죽 줄라 강아지 돌볼랴 일이 태산 같아 끝이 없다. 시집오기 전에 친정에서 언니와 함께 하던 생각이 많이 났다. 생활도 비슷했으나 자유로운 행동이 많이 제약되었다. 무섬 동네는 큰 동네라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일어나고 활기가 찬 동네였다. 동네에서 공동으로 하는 가장 큰 일은 마을 앞 강에 다리를 놓고 뒷 강 내성천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논밭이 주로 강 건너에 있어서 일하러 갈때는 앞강을 건너고 영주읍내에나 평은면 소재지에 갈 때는 뒷 강을 건너가야 한다. 늦가을에서 초봄까지는 다리를 건너다녀야 한다.
처음 몇해동안 외나무다리 건너기가 가장 힘들었다. 아이들은 그 좁은 다리 위를 막 달리며 건너가는게 신기했다. 발바닥만한 좁은 판자위를 걷기도 힘들과 물살이 센 데는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 그러면 내다리도 후들 후들 떤다. 어지러워지고 물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다. 지게 작대기나 지팡이를 잡고 간신히 건너곤 했다. 몇 년 지나니 물동이나 참 방태기를 이고도 빨리 건널 수 있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꾸준히 다니니 익숙해진다. 마치 시집살이에 적응하는 것처럼.

무섬동네는 삼면이 강이고 동네 뒤는 산이라 이웃동네도 면소재지도 읍내도 가기가 쉽지 않다. 가마타고 시집살이 하러 온 새댁은 외나무 다리 건너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먼저 시집 온 이웃집 아지매들이 갓 시집온 내게 겁을 주는 이야기도 가끔했다. "가매타고 외나무 다리 건너 시집오면 꽃행상(꽃상여: 喪輿)타고 죽어서야 다리를 건너간다네" 외나무다리 가마길이 꽃상여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무섬은 영주 소백산 쪽에서 내려오는 서천(영주천)과 봉화 태백산 쪽에서 내려오는 동천(내성천)이 무섬 마을 뒤에서 합류하여 윗마을부터 아랫마을까지 휘돌아 흐른다. 강가 갱변은 하얀 은빛 모래와 자갈밭이라 햇볕을 받으면 반짝인다. 아랫마을 강건너 띠약(뙤약) 갱변은 오리나 될 정도 길고 넓다. 여름에 물새들이 모래위 자갈옆이 풀포기 옆에 알을 낳고 어미새가 2주 정도 품고 앉아있으면 뜨거운 태양으로 알이 깨어 새끼새가 되어 아장아장 걸아간다. 하얀 모래가 이렇게 아름다운데는 무섬마을 주위에는 없다. 어떤 때 마을 앞 쪽으로는 황토물이 흘러가고 물 건너편 쪽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물이 흘러 갈 때가 있다. 그것은 내성천 상류 봉화 쪽 태백산 있는 데 비가 많이 왔고 영주 쪽 소백산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동생이 말해주었다. 강을 한 가운데 두가 양쪽에 다른 색깔의 물이 흘러가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대문을 나와 집 마당에 서면 강이 바로 코앞에 있고 저 멀리 높고 파란 학가산이 눈에 들어와 속이 후련함을 느낀다.

멀리 보이는 학가산(鶴駕山): 우리 무섬마을에서 날씨가 청명하면 학가산이 또렷하게 보이고 흐리면 희미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은날 무섬서 바라볼 수있는 가장 높은 학가산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우리 사랑어른을 비롯하여 동네 청년들이 일년에 한두번 40리나 되는 학가산 상상봉까지 등산을 갔다 올 때도 있다. 학가산은 영주, 예천 안동 경계선에 있는 근방에서 높은 산 중에 하나다. 내가 시집오고 얼마 안되어 시어머님은 이웃 아지매와 안동까지 80리길을 사흘에 걸쳐 걸어서 볼일 보러 갔다 오신 적도 있다.

초겨울 월미산 쎄강(억세)
옆 바라지 문으로 나가면 멀리 월미산(月美山?: 달미산)이 보인다. 아침이면 해가 저녁이면 달이 늘 저 산 위로 떠오른다. 새벽에 일어나 바라지문을 열고 나가면 월미산 위 동쪽 하늘에 샛별이 반겨준다. 저녁에 해떨어지면 강 건너 서쪽 몽동골 산등성이 위에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새벽에 본 그 샛별이다. 저녁샛별이 반짝이면 유난히 소쩍새가 서글피 운다. 그러면 또 친정 방석 고향 생각이 간절히 나지만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


해마다 봄이 오면 시어님과 시누이와 이웃집 아낙네들과 소두리월미산(달미산) 자락이나 은고개 쪽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간다. 산에 가면 각종 취나물 곰취 개미취 단풍취 미역취 참취 곤드레 고사리 참나물 병풍대 어수리 두릅 박쥐나물 잔대 산도라지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등등 수도 없이 많다. 봄에 채소가 나오기 전에 산에 들에 나는 산나물 들나물은 아주 중요한 반찬거리였다. 산나물은 끓는 물에 살짝 대처서 차가운 물에 몇번 헹군 후 차가운 물에 1시간 정도 담가 나았다가 독기가 빠지면 먹는다. 또 말려서 겨울에 제사상이나. 정월 대보름에 찰밥이나 오곡밥 해먹을 때 먹는다.


꿀밤(도토리)으로 만든 묵: 늦가을부터 반찬으로 자주 해먹는다. 막걸리 안주로도 자주 주안상에 올린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오는 추분 무렵 가을에는 꿀밤(도토리) 주우러 간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논밭에 곡식이 여물과 산에도 들에도 야생 과일 나무들이 열매를 떨어뜨린다. 그래서인지 가을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고 한다. 지천에 깔려 있는 도토리는 겨울 철 묵을 써 먹는데 최고다. 꿀밤을 줍다가 깨금도 많이 딴다. 꼬소한 맛과 향긋한 맛이 있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좋하는 산 밤이다. 아이들 교과서에 나오는 개암나무의 열매가 깨금이다. 어릴 때 부터 들어 온 전래 이야기 중에 "깨금 깨무는 소리에 도깨비가 도망갔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해온 산 열매가 깨금이다. 월미산은 겨울 철이 되면 쌔강(억세)이 하얗게 펄럭인다. 정대보름 새벽에 잠깨면 추자(호두)나 깨금이나 밤 같은 딱딱한 열매를 먼저 이빨로 깨어 먹고서야 말을 해야 그해 몸에 피부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 피부병이 유행하면 온 식구가 고생한 적도 있다.

개암나무 열매인 깨금

어떤 때는 더멀리 꽃데이(꽃등)까지 가기도 한다. 소두리 아래 더 높은 꽃등은 무섬 남정네들이 가을에 송이버섯과 부엌에서 땔 나무를 끌어모으러 간다. 조상 산소도 이 꽃등산과 월미산 쪽에 많이 쓴다. 월미산은 박씨 집안 땅이 많고 꽃등은 우리 김씨 집안 땅이다. 가을철 농한기가 오면 8월보름에나 중추절에 산에 묘소에 갈때 아이들이 송이버섯을 몇개 따오면 어른들 밥상에 올린다. 송이와 애호박으로 담백한 국을 끓이면 입맛이 돈다.

저녁에 해지면 조각배를 닮은 초승달 가까이 샛별이 유난히 반짝일 때가 있다. 그러면 시아버님이 하루이틀 내로 비가 올수 도있다고 하신다. 시아버님은 하늘의 변화를 보시고 날씨도 잘 맞추신다.
밤에 소쩍새가 울면 친정 할매가 더욱 그리워진다. 혼자서 바라지 문 밖에 나가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할매와 어매가 천리만리 길도 아니고 지천에 살지만 가보지도 못한다. 저녁에 해지면 서북쪽으로 별들 특히 북두칠성이 보인다, 그쪽이 내 친정 방석마을 있는 곳이다. 사절(四節) 내내 몸이 좀 불편하거나 외로울 때면 친정의 어매와 특히 할매가 그리웠다. 밤에 소쩍새가 울 면 더욱 그리웠다. 그러나 할매 말대로 꾹 참고 살아야한다. 그럴 때는 조잘거리며 흘러가는 앞 낙동강의 유수(流水)를 바라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다. 학가산 멀리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면 위안이 되었다.


매일 아침 마다 강가에 모랫샘에서 물을 길러 오는 일도 큰 일이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는 아들들이 가끔 물을 물지게로 날라와 한결 수월해졌지만. 모랫샘물은 어느우물 물보다 깨끗하다. 그래서 그런지 무섬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빨이 아주 건강하다. 이웃 마을 골짜기나 밭가 샘물 먹는 사람들은 이빨이 덜 건강하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농촌일
시집살이 중에서 가장 힘 드는 것은 역시 농사일과 집안에 큰 일 혼사나 환갑잔치 등이다.
봄 여름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일한다. 염천 같은 삼복더위에는 늘 새벽 별을 보고 들에 나간다. 정오 무렵 뙤약볕이 뜨거우면 모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쉰다. 네 시가 넘어서 더위가 식어지면 다시 들로 나가서 저녁별이 나타날 때까지 일을 하다가 돌아온다. 모내기는 온 식구가 매달리고 이웃집 친척 대소가 식구들도 도와주고 나중에 품앗이로 다 갚아준다. 무섬에는 일가친척이 많아서 이런 큰일을 할 때는 서로 도울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묘판에 나락 모종을 심어서 달포 정도 지나면 옮겨심어야 한다. 먼저 논을 훅지(쟁기)로 갈고 그 다음 써레로 평평하게 잘 고르게 해야 한다.

논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 하는 써레질: 이때 아이들이 골뱅이를 주워오기도 한다. 골뱅이는 온 식구가 이른 봄에 먹을 수 있다. 어른들은 술 안주로 드시기도 한다. 이때 왜가리나 황새도 날아 앉아 골뱅이나 논지렁이를 잡아먹는다.

묘판에 나락 모종을 심어서 달포 정도 지나면 일일이 뽑아서 모단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옮겨 심을 논으로 운반해야 한다. 무섬마을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대부분 손으로, 지게로 져나르거나 소 등에 실어날랐다. 논이 대부분 물 건너에 있고 농로가 좁아서 손수레나 우마차가 다니지도 못했다. 농촌 일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1979년도 무섬 도랑나들 강 위에 시멘트다리(수도교:무섬교)가 놓이고는 구르마(손수레)도 자전거도 차도 버스도 다니기 시작했다. 빛나는 새마을 운동도 무섬에는 이렇게 늦게 찾아왔다.

새마을 운동의 끝트머리인 1979년도에 놓인 수도교 덕택에 무섬사람들도 현대문명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다리가 놓이기 전만 해도 모든 것을 지게에 지고 가거나 머리에 이고 가거나 소 등으로 날라야 했다.

무섬에서는 내가 시집온 1933년부터 내가 죽기 전까지 (1977년 작고) 모든 것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다녔다.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게 다반사였다. 하나가같이 쉬운 게 없었다.



논에 새끼로 만든 모 줄을 띄워 놓고 양쪽에서 잡고 있으면 여러 사람이 줄에 맞추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모를 심는다. 온식구는 물론이고 이웃들이 품앗이로 도와준다. 하루는 큰집 논에 다른날은 작은집 논에 모를 심는다. 아이들이 뒤에서 모 단을 옮겨주면 한결 쉽다.
모를 옮겨 심을 때부터 논농사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정신 바쁘다. 모판에 새끼로 만든 모 줄을 띄워 놓고 여러 사람이 줄에 맞추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심었는데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농사 일중에서도 모내기와 논맬 때가 가장 바쁠 때다. 벼가 반쯤 자란 무논에서 거머리가 매달려서 다리 피를 빨아먹기도 한다. 이러나 저러나 시골에서 논매기는 너무 힘들다고 한다. 적부치기나 막걸리 등 참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 가 어디 그늘진 곳을 찾아 가면 힘이 드는지 이웃집 일꾼이 선창으로 노래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후렴을 흥얼대며 허리 굽혀 논을 맨다. 아이보고 저 노래 가락을 좀 적어보라 했더니 대강 이렇게 적어 왔다.

모내기와 논매기: 여자들은 하루 두 번 참을 이고 가고 점심도 광주리나 방태기에 이고 가야한다. 주전자는 아이가 들어주어서 도움이 된다. 지금은 양은 주전자가 보편화 되었지만 초기에는 무거운 호리병에 담아서 다녔다.

무섬동네 농부들아 무논한번 매어보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허리굽혀 놀기미들 논을매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두손으로 쇠호미로 피를뽑고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질퍽질퍽 논바닥에 흙을덮어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고개숙여 허리굽혀 소리하며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바닥의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빠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왜가리가 내려앉아 논지렁이 잡아채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술잔들고 반찬먹고 기운내어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중참들고 한잔들고 노래하며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논을매세 덥기전에 오뉴월에 논을매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세마지기 논을매니 점심때가 되었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점심먹고 술마시고 쉬었다가 논을매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널고너른 이논빼미 모퉁이만 남았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서어서 논을매세 오월햇살 더워지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매고나서 허리펴니 청천하늘 반갑다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풍월읊고 노래하니 피로한줄 모르겠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기원하세 기원해서 올해풍년 이룩하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한섬두섬 열두섬을 기원하고 추수하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매고매니 하루해가 지나가고 사라지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가세가세 이만가세 서산너머 해가지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방석댁이 기다리네 농주탁주 기다리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오늘내일 지나가니 하세월이 날아가네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매세매세 논을매세 오늘매고 내일쉬세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어허허리 참좋구나.
힘든 무논매기 일을 구성지게 노래로 불러야 호미로 두 손으로 진흙 속에 피를 뽑기가 수월해진다. 모심기보다 아마 더욱 힘든 게 무논매기일 것이다.
남정네들은 모두 들에서 일하고 아낙네들은 집에서 참 준비와 점심 준비 그리고 오후 참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다. 어떤 때는 내 혼자 참고 농주 막걸리를 가지고 간다. 또 어떤 때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점심밥을 들로 가져간다.

내친정 고향 방석 동네나 무섬 동네나 초창기에는 무거운 호리병에 막거리를 담아서 들에 가져갔다. 나중에 양은 주전자에 담아갔다. 호리병 보다 가벼워서 들고 가기가 수월했다.

나는 집에서 남아 아이를 등에 업고 나머지를 정리하고 또 다음 참과 식사를 준비한다. 하루가 너무 짧은 것 같고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촌 일 같다. 부엌과 안마루를 올라가고 내려오고 해야하고 뒤안 장독대에도 오가야하고 강가에 물도 길러오기 등 분주하고 바쁘다. 아이들이 커서는 물지개로 아침마다 물을 떠 와서 부엌 물독에 채워줘서 한결 쉬웠다.

부엌 한구석에 깊게 파서 물독을 묻어두고 사시사철 물을 채워서 쓴다. 삼복더위 한여름에는 시원한 물을 겨울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 물을 사용할 수 있다. 물단지는 일종의 냉장고다. 아래 물을 퍼나르는 물지개

조리로 쌀을 잘 저어야 밥에 돌이 섞이지 않는다. 대나무로 만든 조리는 여러 가지 곡식을 씻고 물기를 뺄 때 아주 유용하다. 밥하고 반찬 만들고 술빚은 것 준비하고 끝없는 일이 몸이 지쳐도 쉴 틈도 없다. 저녁 해가 떨어지고 어득해지면 멀리 물 건너오는 소리가 들린다. 소가 음매하거나 삽살개가 뛰어나가면 들에 간 바깥어른들이 돌아오는 것이다.

마루에서 넓고 큰 암반에 밀가루 반죽을 문질러 마지막에 긴 홍두깨로 밀고 또 밀어서 엷게 국수를 만들어 썬다.

저녁상을 빨리 준비해야한다. 마루에서 넓고 큰 암반에 밀가루 반죽을 문질러 마지막에 긴 홍두깨로 밀고 또 밀어서 엷게 국시(국수)를 만들어 썬다. 애호박도 썰어서 준비한다. 툇마루나 마당에 멍석을 깔고 마당 끝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국수를 끓여낸다. 우리 같이 가난한 농가는 이렇게 담백한 국수로 저녁을 떼운다. 옆집고래등 같은 기와집 참봉댁이나 종가댁 같은데는 무섬 강에서 잡은 은어를 간장에 울어내어 더 맛있는 은어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서 면을 만들어 끓여낸다. 시원한 콩가로 만든 건진국수 어쩌다 한번 얻어 먹으면 정말 입맛을 댕긴다.


시골에는 집집 마다 멍석이 있다. 저녁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낮에는 각종 곡식을 널어서 말리고 털어낸다.

저녁에는 보잘 것 없은 음식이다. 일할 때인 낮에는 그래도 제대로 된 반찬에 밥과 감자가 있지만 저녁에는 애호박 썰어 넣어 끓인 멀건 국수 한 그릇이 전부다. 시아버님 남편 시동생이 둥근 밥상에서 함께 드시고 나는 시어머니 시누이와 멍석 바닥에서 그냥 앉아 먹는다, 저녁이 끝나면 대부분 강가로 바람 쐬러 나가신다. 집안 설거지를 다 해놓으면 시어머니가 시누이와 함께 어두운 강가로 가자고 한다. 어두운 강가에서 멱을 감는 게 무섬 생활 중에서 가장 멋진 추억거리다. 이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친정집에서는 물을 길러다 뒤 안에서 등욕을 했지만 무섬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어두운 밤에 강가에서 이웃 여인네들과 목욕하는 게 가장 즐거운 시간의 하나다. 이웃 아낙네들과 하루 동안 고생스러운 일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강바람이 서늘하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는 것 같다. 사내 이아들과 남정네들은 낮에도 목욕하고 수영하지만 여자들은 밤에만 목욕을 한다.
산골출신 머슴 '동이' 이야기
큰집 농토를 좀 얻어서 농사를 지어야하니 머슴과 일꾼들을 부려가며 농사 짓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머슴에게는 나락이나 쌀가마로 새경(사경私耕) 외에 옷을 주는 데 일 년에 바지저고리 한 벌 일복으로 막 입는 잠뱅이 한 벌도 내가 다 만들어줬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님이 부엌에 밥하는 둘매(맏손녀)를 훔쳐보는 머슴 동이를 발견하고는 "니 이놈아 뭘 보고 히죽웃노, 이 빌어먹을 놈아, 당장 가뿌라"하고 야단을 심하게 치시니 동이가 못 참고 숫돌에 갈던 낫을 울 밑으로 집어던지고 씩씩거리고 고향 봉화 춘양으로 가버렸다. 사랑어른이 집에 와보니 머슴이 없으니 "어매는 또 왜 아를 못살게 굴어서 보냈는고, 하면서 화를 내셨다. 며칠 후 기별을 하여 춘양 고모가 동이를 달개서 다시 데려왔다. 동이는 몬(못)배우고 맥골(매꼴) 출신이라 우직하고 좀 모자라는 듯했으나 일은 사랑어른 두 배는 했다. 머슴은 힘도 세서 장작도 사랑양반보다 두배나 더 잘 팼다.

숫돌에 낫갈기: 일군이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맨저 여러 개의 낫을 숫돌에 금방 간다.

어느 날 삼이하고 경이하고 지들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키도 큰 머슴을 앞 강물에 깊은 곳에 유인해서 물을 실컷 먹이고 놀리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얼라 때부터 물가에 살아서, 뺄가 벗고 목감도 하고 몸띠(몸때)도 가새고 해서 헴도 잘 쳤다. 애들은 평소에는 머슴을 잘 따르다가도 그를 놀리기도 한다. 그는 산골 출신이라 헴을 못 치니 아이들한테 속아서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물을 실컷 마시고 혼이 난 것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물에 살아서 물고기처럼 헴을 치지만. 그런 동이도 몇 년을 머슴살이로 새경을 받아 장가를 간다고 떠나갔다.
설명절
아직 설 전에 매서운 강바람과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닥치면 볼과 손이 무지하게 시러블(울) 때가 가끔 있다. 무섬마을에는 역시 설날과 추석이 가장 큰 명절이다. 설 며칠 전부터 우리 고향 방석도 그랬지만 다가오는 새해 명절을 위해 조심하고 삼가고 겸허하게 보내는 날이 많다. 설 전에 늘 사랑방이나 안방 등 집안 구서구석을 대청소 한다. 시어머님이 손 없는 날을 잡아서 설 제사 준비로 깨진 기왓장을 가루로 만들어 놋 그릇(놋쇠그릇)을 윤이 반짝 나게 닦자고 하신다. 그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깨진 기왓장을 가루로 만들어 제사 용으로만 사용하는 놋그릇(놋쇠그릇)을 윤이 반짝 나게 닦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조상제사 상에 사용할 그릇도 이렇게 정성껏 닦아야 한다. 전부 아낙네들의 몫이다.
남정네들은 시골에서는 복잡하게 택일을 하지 않고도 손 없는 날이라 하여 이날 산소를 돌본다. 또 묏자리 고치기 집수리 같은 일을 한다. 이사를 가는 날도 이런 날을 고른다. 또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한 해 동안 먹을 장을 담그기도 한다. 손이 있는 날이나 방위에 이사 집수리 결혼식 등을 했다가는 큰 재앙을 당한다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떡살과 다석(다식)판: 떡살(떡에다 대고 눌러서 무늬를 찍어내는 판)은 나무를 깎아 물고기 꽃 만자문 등의 문양을 새긴 틀판이다. 다석(다식)은 설날이나 보름날 등에 녹말 콩 밤 등 송화가루 반죽에 독특한 문양을 새긴 우리나라 고유의 과자로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설이 되면 출세하러 멀리 타향에 나갔던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다 모여서 설제사를 지낸다. 설 음식준비도 무척 힘든다. 종가집하고 큰 집에는 대추나무 떡살로 흰떡에 무늬도 만든다. 우리같이 보통 집은 떡살은 없고 다석판이 있다. 봄에 산에서 딴 송화가루를 모아놓았다가 설명절에 다석을 만든다. 송화가루가 부족하면 곡물 볶은 콩이나 땅콩을 녹말 꿀이나 조청을 넣어 함께 짓 이겨서 다식판에 박아낸다. 집집마다 다식판 무늬가 달라 아름다운 모양의 과자를 만든다. 다식은 아이들이 세배를 오며는 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옆집 석포 댁 다석이 더 맛있다고 얻어오면 자랑하고 먹는다. 그 집의 매콤한 식혜는 특히 맛있다.

옆집 참봉댁의 매콤한 식혜는 특히 맛있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서 정성껏 제사상을 차려 놓고 새해 인사를 올리는 예의범절이다. 설명절 제사에는 떡국이나 송편을 준비한다. 보통 기제사에는 시루떡하고 흰쌀밥하고 시원한 무우국을 준비하지만 다른 제사상 준비는 기제사와 엇비슷하다. 제주로 막걸리 그리고 간장 탕국 생선적부침개 명태포 세 가지 나물무침 다식 땅콩 다섯 가지 과실로 사과 배 밤 대추를 기본으로 하고 한두 가지 과실을 더 준비한다. 며칠간 분주하게 준비해야 한다. 설음식은 정성을 다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간다.
설 제사 상차리가 쉽지 않다.
우리 집은 사랑방이 좁지만 제사는 늘 사랑방에서 지내고 손님이 많으면 사랑 창문 앞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은 주로 거기서 절을 한다. 여자들은 안마루에서 사랑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고 절을 한다. 무섬 동네 제사상 차리는 법도 내 친정 방석과 비슷하다. 우리는 상 두 개를 준비한다. 시조부모 세분 상을 제일 큰 상에 차리고 시부모 두 분 상을 좀 더 작은 상에 차린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똑 같다.
제사상은 신위가 있는 쪽은 대개 북쪽이라 상방과 마주한 벽에 병풍을 치고 제사상을 놓고 사랑어른이 지방을 써서 문집에 붙여서 제사상에 올리고 뒤 병풍에 기대 세워놓는다. 경이가 자라고 나서는 경이가 쓰기도 한다. 제주와 자식들이 서 있는 쪽이 사랑창문 안이라 남쪽이다. 제주가 제사상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 된다. 제사상은 무섬에서도 보통 5열로 상을 차린다. 신위가 있는 쪽을 첫줄로 신위보다 조금 앞에 밥그릇 국그릇을 놓고 왼쪽에 수저 접시를 올려놓는다. 공간이 있어 오른쪽에 촛대를 세워놓는다. 평상시에는 호롱불을 켜고 지내지만 제삿날은 사랑방에 촛불을 켠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마루 부엌에도 초롱을 밝힌다. 그 다음 두 번째 줄에는 구이 적 조기 쇠고기 등을 놓는다. 세 번째 줄에는 쇠고기 어물 탕을 놓는다. 네 번째 줄에는 나물 간장종지 명태포 등을 준비한다. 제일 앞줄에는 과일과 다식 과자 등을 놓는다. 과일도 홍동백서(紅東白西)라고 붉은 사과 대추는 동쪽 즉 오른쪽에 놓고 밤 배 등은 서쪽인 왼쪽에 놓는다.
제사상 바로 앞에 적은 소반을 놓고 그 위에 술잔과 술 주전자와 퇴주잔을 놓고 그 옆에 향나무 가지를 피운 화로를 준비한다. 제사 지내는 순서는 기제사와 같다. 기제사 때와 이년상 삼년상 때는 보통 제문을 읽고 제사를 시작한다. 시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제문은 늘 시어버님이 쓰시고 읽으신다. 명절 제사는 제문을 읽지 않는다.
설날 이른 아침에 세배가 끝나면 사랑어른이 아이들로 하여금 사랑방 윗묵에 있는 벼루통을 열어놓고 연적에 물을 채워서 벼루에 조금 붓고 먹을 갈게 하신다. 이 벼루통은 시아버님이 오동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이다. 사랑방 장안에서 한지를 꺼내 칼로 알맞게 잘라서 그 위에 붓으로 지방을 쓰신다. 우리 집은 지방을 두 장을 준비한다.
시부모님 지방
顯考學生府君神位
顯妣孺人南陽洪氏神位
시조부모님 지방
顯祖考學生府君神位
顯祖妣孺人咸陽朴氏神位
顯祖妣孺人豊山金氏神位
설 제사를 올리기 전에 세배는 집안에 생존해 계신 어른에게 드리는 새해 인사이다. 시조모가 살아 계실 때는 집안의 제일 큰 어른으로 시부모님이나 손주들이 모두 절을 하고 그다음 아들 딸들이 시부모님에게 절을 한다. 그런데 세배는 어른들 뿐 아니라 형제지간에도 나누며 예를 갖춘다. 세배 때 어른들이 자식들에게 덕담(德談)을 한다. "올해는 밥 잘 먹고 잘 자라고 공부도 더 잘 하거레이.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더 좋은 꿈꾸고 더 착해지거레이" 한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손자가 깜찍하게 "할매도 올해는 아프지 말고 오래 살게" 라고 말해 웃음꽃을 피운 적이 있다.

그리고 보름날까지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논다. 설 전 날 '구세배' 한다고 아이들이 이웃 집안의 어른들한테 구세배를 다닌다. 물론 주로 사내아이들이 다닌다. 가정에서는 이날 밤 자녀들에게 부모들이 세배 돈을 미리 준다. 설 전날 밤 즉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일찍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소문이 있어 늦게까지 논다. 친척들은 주로 설날 주는 분들도 있다. 물론 아이들이 구세배를 다니는 것은 한 해를 잘 살아 온 것에 대한 안부를 묻는 형식이지만 감주나 다과 등 얻어먹을 기회도 중요한 요소다. 온 식구들 특히 아이들은 설날을 맞이하여 새 옷과 새 양말을 한 켤레 씩 받는다. 우리 집은 양말은 영주 장에서 사오지만 옷은 대두분 내가 바느질해서 만든다.
어떤 한해 시아버님이 밭을 사려고 해서 내가 재봉틀을 사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아뱀요 제가 재봉틀을 다를 줄 아니까요 올해는 밭을 사는 대신 재봉틀을 사주시면 돈을 모을 수 있니더. 돈을 모은 다음에 다시 밭을 사시면 되니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오냐, 그래라 빈곤은 가정과 마을과 나라에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니 뭐든지 열심히 해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노력하거레이." 시아버님은 무엇보다도 집안에 굶주림 대신 가난을 벗어나길 원하시며 니가 그리 생각하니 참 기특하다고 칭찬을 하셨다. 시어머니께서 내가 바느질을 잘 하는 줄 아시고, 재봉틀을 하나 사도록 시아버님께 신신부탁을 하신 것도 시아버님을 설득하느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재봉틀을 갖게 됐다. 그 이후 우리 식구들의 옷은 물론이고 동네 여러 사람들 옷을 만들어주고 돈을 조금씩 모았다. 나중에는 옆 동네에서도 옷을 만들어주고 해서 옷 만들기도 바쁠 때가 있었다. 궁터 전닷 잔들이 원전골 분계 고랑골 뒷골 노틀이 다락골 방석 술미 소들이 도래와 더 먼 곳 석탑 맥실 등 누구든지 부탁하면 옷을 만들어주었다. 주로 설이나 명절이 다가올 때가 제일 바빴다. 다행이 우리 숙진(일진)이가 심부름을 하는 것을 좋아해서 편했다. 쪽지에 어느 동네 누구 댁이라고 적어주면 옷을 가지고 열심히 다녔다. 그러면 옷을 주고 그 대가로 별걸 다 받아왔다. 대개 품씩으로 좁쌀 콩 녹두 팥 감자 고구마 심지어 병아리 닭 강아지도 받아 왔다. 또 심부름하는 숙진에게 착한 아이라고 대추 밤 추자 등 과일을 주었다고 한다. 아마 숙진이는 그런 걸 받아먹는 재미로 심부름을 착실히 다녔던 것 같다.
몇 년 정도 모으니 재봉틀 값이 나왔다. 그 당시 부자 집 외에는 직접 만든 삼베 명주 모시 무명옷이 전부였다. 물론 옷을 못 만드는 집은 옷감을 주고 옷을 사오기도 했다. 장에서 인조 옷감을 사는 집도 있었지만 농촌 살림살이에 그것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안 식구 들 옷 만드는 것이 큰 걱정거리였다.
물레질

물레질을 하는 여성(왼쪽)
김홍도 <자리짜기>

친청어매와 시어머님도 물레질 하시면서 새야새야파랑새야 노래도 흥얼거리시고 두분이 기분이 좋으시면 물레타령도 흥얼거리시는 게 보기 좋다.
내물레야 니물레야 얼른얼른 돌고돌아
가는세월 안도라도 돌아가고 잘도가네
내물레는 돌려야만 돌아가고 잘도도네
우리같은 백발노인 바라자나 돌아오네
어제께는 청춘이고 오늘께는 백발이네
오는백발 쫓을수냐 가는청춘 잡을수냐
내물레야 니물레야 윙윙윙윙 돌고돌아
호롱불도 깜박이니 밤새도록 돌고돌아
가는실을 뽑고뽑아 삼배옷을 짜고짜자
무명실로 베짜기는 문익점님 공덕이라
내물레야 니물레야 어서어서 돌고돌아
베를짜서 우리님의 바지짓고 적삼짓자
밤이샌다 해가뜬다 어서빨리 옷을짓자
내물레야 니물래야 윙윙윙윙 돌고돌아
다행히 친정어매와 시어머니가 가끔 물레질로 실을 만들면 명주틀과 베틀로 옷감을 만들었다. 나는 재봉틀과 가위와 바늘로 만들었다. 이웃에서 다들 옷 만드는 손재주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친정 방석은 물론 다른 이웃동네에까지 소문이 나서 옷 주문이 자주 들어왔다. 옷을 만들어주고 곡식도 받고 옷감도 받고 돈도 받았다. 나는 옷 만드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우리도 먹을 게 없어 겨우 살아갔지만 시어머니는 세상물정도 모르시고 누구든지 찾아오는 손님은 잘 대접해서 보내야한다고 늘 말하셨다. 한번은 보다 못해서 "어맴요, 대접할 게 있어야 대접하든동 하지요." 라고 했다가 실컷 꾸지람을 들었다. 끼니때만 되면 앞집 할매가 기웃거리기도 한다. 정말 주고 싶어도 줄 것 없었다. 그릇에 누룽지 조금하고 숭늉 한 그릇 주면 연신 고맙다고 마시고 갔다.
무섬에서 설날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제일 먼저 세배를 올리고 그 다음 아버지 어머니한테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한다. 우리 고향 방석이나 무섬이나 여러 가지 미신적인 이야기가 많다. 설날이나 상묘일(上卯日, 첫 토끼날)에는 여자들이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 집에 재수가 없다고 해서 남자 아이들만 세배를 다니고 이웃집 설제사에 참석한다. 왕골이나 보리대궁으로 만든 복조리는 복을 끌어 들인다고 문설주에 달아놓는다. 설날 새벽에 밖에 나가 까치 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무섬에는 마을 앞에 아주 키가 큰 미루나무가 여기저기 있고 까치둥지가 높이 있어 까치가 자주 운다, 그래서 마을이 길하다고도 한다. 정초에 아녀자들은 <토정비결>(土亭祕訣)이란 책을 보아 운수를 점치기도 한다. 무섬 같은 양반 동네 사랑어른들은 그런 걸 잘 믿지 않지만.

우리 큰집: 김원규 -덕진-선광 집

우리 둘째 큰집: 김각규-재진-중환 집
우리 집 시조부님이 삼형제 중 막내시다. 제일 큰집이 안에 보갈 아지뱀네 집이고 두 번째가 의인 아지뱀네 집이고 금당실댁이라 불린 우리집이 막내집이다. 그래서 보통 우리 집에서 제사를 제일 단아하게 지내고 그 다음 두 번 째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에 안에 제일 큰집 보갈 아지뱀댁에서 큰 제사를 지낸다. 사랑방 사랑마루에 제사 지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다음 옆집이나 다른 일가친척들 제사에 참여 한다. 몇몇 제사 끝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설음식은 고기만두와 꾸미를 넣은 떡국이다. 떡국은 으레 설 제사상에 올리고 나서 모든 식구들이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떡국 위에 얹어 먹는 꾸밈을 무척 좋아한다. 꾸밈은 계란말이 채 김 쇠고기 깨소금으로 만들어 입맛을 돋운다. 설 제사상에 놓이는 세주는 차가운 막걸리다. 새로운 봄을 맞는다는 뜻이 있다. 옛날에는 집집마디 좁쌀이나 수수 등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제사에 썼지만,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각가정에서 막걸리 만드는 것을 금지시키고 도가(술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를 사다 썼다. 아마 나라에서 술 세를 받고 곡식을 아끼려고 한 것 같다. 사랑어른들은 도가 막걸리가 맛이 없다고 농주를 늘 그리워하셨다. 설날을 기억하게 하는 백설기 같은 떡과 다식 같은 한과 식혜 술 등은 설날 먹는 별식이다. 무섬은 안동 풍습의 영향을 입어서 매운 식혜를 해먹는 집이 꽤 있다. 물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주도 만든다.
설 제사와 가을 추석 등 명절 제사는 물론이요,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지내는 기제사도 준비도 모두 아낙네들 몫이라 죽어라 일하며 준비해야한다. 우리는 작은 집이라 제사가 별로 없지만 큰 집들은 제사가 많아서 큰 집 며느리들은 무척 힘 든다. 그래도 제삿날은 쇠고기 국물이나 생선나부랭이와 쌀밥을 맛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날이나 정초에는 무섬에서는 양성(兩姓)이 함께 즐기지 않고 김 씨네는 김 씨 일가끼리만 박 씨네는 박 씨네 일가끼리만 제사지내고 음복을 나눠먹는다. 나는 박가라 가끔 중간마을에 그래도 형편이 나은 영감댁이나 도기천 어른 댁에 제사가 있는 날은 떡도 얻어먹곤 했다. 같은 박씨라 나를 친절히 대해주고 서스럼없어 좋았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제사는 아침에 지내니 좀 낫다. 기제사는 제사 드는 날 밤 자시(子時)가 지나야 지낸다. 지내고 나서 첫 닭이 울며는 모두들 주무시러 간다.
처음에 시집왔을 때나 지금이나 제사는 한결 같다. 시조모님이 마루에서 나보고 제사 지내는 것을 잘 눈여겨보라고 하신다. 친정에서 보아왔던 것과 대동소이하지만 시키는 대로 눈여겨보았다. 늘 시아버님이 제주로서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화로에 향을 먼저 피우신다. 향은 미리 칼로 향나무 조각을 준비하셨다. 옆에서 시동생이 잔에 술을 부어서 드리면 시아버님이 솔잎이 두세 개 있는 퇴주 그릇에 따르신다. 그리고 절을 두 번 하신다. 이어서 모든 제관들이 절을 두 번씩 한다. 우리 여자들은 마루에서 절을 네 번씩 한다.
이어서 시동생이 시아버님이 잡고 있는 술잔에 술을 부어주시면 받았다가 다시 시동생에게 주면 시동생은 상위에 올려놓는다. 이어서 밥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국그릇에 담갔다가 꽂는다. 젓가락은 쇠고기 절편 위에 놓는다. 이를 '삽시(揷匙)'라고 한다.
그리고 모두들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린다. 아마 이때 조상신이 나타나서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믿는 모양이다.
잠시 후 제주가 '에헴'하고 일어서면 모두들 일어선다. 이어서 국을 물리고 냉수를 올린다. 숟가락으로 밥을 물에 세 번 말아 놓고 수저를 물그릇에 놓는다. 잠시 선 채로 두 눈을 감고 묵념을 들인다. 이어서 수저를 거두고 밥그릇을 닫는다. 모두들 두 번 절한다. 안마루에서는 여자들이 네 번 절한다. 제사가 끝났다. 시아버님이 지방을 창밖에서 불사른다.
제사 음식을 모두 물린다. 제주를 먼저 나눠 드시고 이어서 제사 비빔밥에 간장만 타서 드신다. 과일과 떡도 조금씩 드신다. 시간이 지나 첫 닭이 울 때 쯤 모두들 헤어지고 잠을 잔다. 안에서는 쥐가 못 먹게 모든 음식을 치워야 해서 한참이 더 걸린다. 제삿날은 여자들이 무척 힘 드는 날이지만 내색을 하지 말아야 한다. 조상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시는 게 유가(儒家)의 풍습이다.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재기차기 자치기 던지기 굴렁쇠 굴리기
설 제사가 끝나면 사내아이들은 제기차기 자치기 던지기와 연 날리기 등 놀이를 한다. 우리 삼이는 연도 잘 만들었다. 대나무가 귀해서 가느다란 싸리가지를 반으로 쪼개서 사각형으로 만들고 가운데 십자모양으로 가로대를 만들어 문지를 붙인다. 연줄은 가느다란 명주실이 제일 좋다고 내 한테 조르고 졸라서 달라고 한다. 나는 할 수없이 아이들의 놀이가 별로 없으니 그것이라도 만들어 놀게 한다. 무섬은 갱변이 넓어서 연날리기가 안성맞춤이다. 이웃아이들과 연싸움도 하고 노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는 것도 즐거울 때가 있다. 네모난 연이 하늘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신출귀몰하는 것 같기도 한다. 연줄을 당기는 손재주가 있어야한다. 한번은 깨어진 사금파리를 돌로 잘게 빻아서 풀로 연줄에 붙여 연줄을 만들어서 연싸움을 하면 다른 아이들한테 이긴다. 연줄끼리 서로 부딪히다가 상대방의 연줄이 끊어져 연이 떨어져 멀리 산위로 날아가 버리면 이기게 된다. 이긴 아이는 좋아서 소리치지만 진 아이는 울상이다. 사랑어른은 마을 앞 갱변에서 연 날리다가 연이 혹시라도 지붕위에 떨어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연 날리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야단을 치기도 한다.
물론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앞 강이 얼면 나무판을 신발처럼 만들어 밑에 철사줄을 박아 넣어 어름질을 치기도 한다. 더 어린 아들은 또 철사줄로 만든 어름썰매를 탄다. 눈이 내린 뒷산 경사진 밴달에서 헌 비료포대나 떨어진 가마니 쪽으로 눈썰매도 탄다. 아이들은 헐벗은 옷차람이지만 추위도 아랑곳없다. 나이어린 아이는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면 턱 밑에 헌 겁으로 콧물받이를 만들어 달고 다닌다. 이걸 안 달아주면 소매에 코를 닦아 소매가 더럽고 코물이 마르면 반질반질해진다. 아이들의 손등이 얼어 터져도 추위 속에서 놀기 좋아한다. 부자집 아이는 예쁜 손수건을 달고 다니지만. 어느 핸가 부잣집의 아들 친척이 도시에서 사온 스케이트로 뽐낸 적이 있다. 시골에서서는 아주 드문 장면이다. 이런 놀이는 봄이 올 때까지 자주 한다.
제기차기

제기차기는 옛날 엽전에 문지(문종이)를 접어 끼워서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 너풀거리게 날개를 만들어서 한다. 혼자서 차기도 하고 몇몇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옆으로 앞으로 서로서로 차기도 한다. 누가 가장 많이 차는 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움직이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 주로 추운 겨울에 시골에서 마땅한 놀이가 없어 이런 것을 즐긴다. 키가 큰 앞집 맹택이는 제기를 무척 잘 찬다. 기술도 남다르다. 외발로 차기도 하고 뒤로 차기도 한다. 여자아이들은 옆에서 구경하는 걸 좋아하고 잘 차면 박수도 친다. 우리 경이는 몸이 약해서 인지 제기차기도 지 형제들처럼 제대로 못하니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러나 춥지만 한데 어울려 노는 것이 기특하다. 사랑어른은 이러한 놀이도 못마땅한지 신발 떨어진다고 야단을 치기도 한다. 메뚜기도 한때라고 아이들이 자라서 낫살이라도 먹으면 그것도 별로 하지 않는다.
자치기 던지기


아이들이 넓은 마당이나 넓은 공터에서 사리나무로 만든 할아버지 담뱃대 길이정도의 긴자와 짧은 할매 담뱃대 길이의 짧은 자로 노는 놀이다. 짧은 자를 구멍 속에 넣어 한쪽을 땅 위로 나오게 걸쳐놓은 다음 긴자로 가볍게 끝을 때려 공중에 뜨게 하여 떨어질 때 긴자로 세게 때려 친다. 이때 날아오는 짧은 자를 지키는 편이 받아버리면 공격자는 진다. 지키는 편이 점수를 얻는다. 이때는 공격하는 편과 지키는 편의 순서가 바뀐다. 지키는 편이 못 받았을 때는 짧은 자가 떨어진 지점부터 구멍까지 긴 자로 재어 점수를 가산한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재치 빠르고 힘이 센 아이가 있는 편이 잘하고 이긴다. 아이들 놀이는 볼수록 흥미롭다.
굴렁쇠 굴리기

엿장수가 고장 난 자전거 발통 하나를 가져오면 돈이 있는 집안 아이가 이걸 사서 골목길을 누비며 굴렁쇠를 굴린다. 재주 좋은 이웃집 아저씨는 구리로 굴렁쇠를 만들기도 한다.

가을 겨울 봄철에 엿장수가 자주 시골에 와서 엿을 판다. 아이들이 쇠붙이를 주워주고 엿을 사먹는다. 여유 있는 집은 곡식을 주고 엿을 사주기도 한다. 못된 아들은 엿장수를 놀리기도 한다. "찰가닥 찰가닥 엿장수 엿도 한가락 못 팔고 불알이 땡그렁 얼었네" 하고 놀리면 엿장수가 아이들을 따라가 머리에 굴밤을 준다. 그러면 다른 아이가 엿을 훔치기도 한다. 어디가나 아이들은 못 말린다. 물론 붙잡히면 혼이 나게 맞기도 한다.
여름철에 아이스께끼 장수가 오면 아이들이 헌 병이나 곡식을 주고 사먹는다. 돈도 없고 곡식도 부족한 집안 아이들은 한 입 얻어먹으려고 쳐다본다.
어느 날 엿장수가 고장 난 자전거 발통 하나를 가져오면 돈이 있는 집안 아이가 이걸 사서 골목길을 누비며 굴렁쇠를 굴린다. 우리 숙진이는 이걸 굴러보려고 따라다니며 굴렁쇠가 멀리 굴러가면 주워준다. 다른 아이들도 한 번씩 굴러보고 싶어 한다. 시골에는 아이들 놀이감이 별로 없다.
웇놀이와 널뛰기


여자 아이들은 윷놀이와 널뛰기를 한다. 김씨네 가문은 물론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거의 매일 윷놀이를 즐긴다. 무섬서 윷은 집집마다 높은 산에서 굵은 싸리나무를 베서 만든다. 오래 묵은 싸리나무는 단단하고 무게감이 있어 손으로 윷가락 네 개를 꽉 잡으면 느낌이 좋다. 위로 올려 던지면 윷끼리 부딪히며 깔아 놓은 돗자리나 멍석에 떨어지는 소리도 듣기 좋다. 청기 시누이가 일월산에서 묵은 싸리나무로 만든 윷을 가져와서 동네에서 함께 놀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손때가 묻은 오래 된 윷은 그 집의 역사가 담겨있다. 이 놀이는 내가 시집오던 해부터 70년대 중반 지금까지 거의 40여 년 간 이어오고 있다. 보통 날씨가 좋으면 옆집 넓은 마당에서 놀거나 마루나 큰 방에서 놀기도 한다. 무섬 김 씨네 윷놀이는 특이하다. 보통 아들들, 새신랑들, 딸네들, 새 색시들 그리고 시어머니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사랑어른들은 양반 체면에 사랑어른들끼리 어떤 사랑채에 모여서 술 마시고 담배피우고 놀지만. 이처럼 바깥양반들은 모여서 끝임 없이 이야기를 하고 지낸다. 별다른 낙이 없다. 그 반면에 젊은 남자들과 젊은 여자들 및 아지매들은 윷놀이를 신나게 즐긴다. 윷을 노는 데 윷말을 그리지 않고 공중 윷말 즉 머릿속에 웇말판을 그려 놓고 말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억하면서 논다. 보통 한편 10여 명씩 편을 짜서 4동 또는 심지어 6동 내기도 한다. 4동내기는 쉽게 기억하는데 6동 내기하면 정신이 없다. 양쪽 편중에서 윷말을 잘 쓰는 한두 명이 공중윷말 놀이의 동들의 위치를 잘 기억하고 상대방의 윷을 예상해서 잘 배치하고 써야한다. 윷말의 이름을 모두 잘 기억하고 있어야한다.

우리 무섬 마을은 윳놀이 할때 윳판 없이 공중윳판 즉 머리 속에 윳말이 돌아다니는 것을 다 기억하며 윳놀이를 즐겼다. 읍내에 장터에 가면 윳말을 써 놓고 했다.
나는 내가 속한 편에 윷말 쓰는 것을 어려 번 담당했다. "자, 알방석댁이 우리 편이나 윷말을 책임지고 써야 덴데이." "알았니더 한번 해보시더. " 기억력이 좋고 윷말을 잘 쓴다고 주로 내게 맡긴다. 잘 못써서 곧 날 동들이 상대방한테 잡혀먹으면 야단도 많이 듣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우리 딸 둘매도 윷말을 잘 썼다. 남자로는 영춘댁네 기진이하고 한절마댁 광택이도 잘 썼다. 모라든가 윷이 나오면 춤을 추고 손뼉치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상대방 동을 잡거나 또 모나 윷이 나오면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한다, 아마 총각들, 처녀들, 새신랑들, 새 며느리들, 시어머니들이 모두 함께 춤추면서 노는 윷놀이 순간에는 지난 한해의 어려운 것들을 다 잊어버리게 해서 더 좋은 것 같다. 이러한 윷놀이 대회에서 지는 편이 보통 비빔밥을 준비한다. 이긴 편은 밥을 준비될 때까지 술을 준비해서 마시거나 가볍게 윷놀이나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이때 먹는 비빔밥은 꿀맛이다. 윷놀이 덕택에 먹고 마시고 하루를 보낸다.
선성 김씨 집성촌에서 전통 윷놀이가 열리는 날이면 엄격한 선성 김씨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마을 잔치를 하는 날이다. 중간마을 박씨네도 비슷하게 마당에서 윷놀이를 자주 했다. 나는 박가로 거기에 어울릴 때도 많았다. 갈때마다 아이들 주려고 뭔가를 얻어왔다. 아직 우리집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네 딸네들도 내게 잘 따르고 잘 대해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전통 윷놀이야말로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가족 친지 이웃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흥겨운 오락이다. 윷놀이를 하면서 응원을 하고 박수를 치고 또 놀이에서 이긴 쪽 사람들이나 진쪽 사람들이나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은 무섬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인 놀이다.
아이들은 저녁에 끼리끼리 모여서 노래도 하고 놀기도 한다. 하여튼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대보름까지는 이렇게 놀자 판이 연일 벌어진다. 대보름 새벽에는 또 오곡 찰밥에 유과, 술 등을 준비해서 재미있게 먹고 논다.
널뛰기 하늘을 나는 선녀들

무섬동네에서 여자들이 가장 즐기는 놀이가 널뛰기이다. 양반동네라 여자들이 몸가짐을 단정히 해애야 한다고 늘 조심을 하며 사는 데 널뛰는 날은 모든 것이 허용되어 신나게 논다.
무섬동네에서 설 지나고 정초에 널뛰기를 해야 그해 한 해 동안 들이나 산에서 가시에 찔리지 않고 발에 병이 나지 않고 지낼 수 있다고 시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다. 널은 길고 큰 송판 한가운데 아래쪽에 짚단이나 말은 멍석을 괴어놓고 널빤지 양쪽에 한사람씩 올라간다. 처음에는 먼저 올라선 사람이 널빤지 끝에서 널판을 구르며 튀어 오르면 반대편에서도 널판을 딛고 튀어 오른다. 이렇게 두 사람이 번갈아 발로 널판을 구르며 뛰는 행위가 반복되는 놀이가 널뛰기이다. 처음 뛸 때 옆에서 손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래서 4-5명이 있어야 제대로 즐긴다. 이것도 내기를 하는데 어느 한쪽이 균형을 잃어 널에서 떨어지면 진다. 보통 사무 세 판을 한다. 편을 짜서 교대로 널뛰기를 한다. 보통 널뛰기는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하기도 한다. 팔을 벌리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두발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가 균형 있게 내려오면서 세게 발판을 밟으면 상대가 더 높이 올라가 균형을 못 잡으면 널판에서 떨어지기 쉽다. 양쪽 실력이 막상막하라 한참 오르고 내리고 널뛰기를 하면 양쪽 편을 드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흥을 돋운다. 오래 춤추듯이 높이 오르내리며 널을 뛰는 장면은 장관이다. 뛰는 사람들도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도 흥이 저절로 난다. 몸의 균형감각을 통해서 육체도 단련되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야릇한 희열도 느낀다.
처음에는 살짝살짝 뛰다가 나중에는 힘껏 뛰기도 한다. 가끔 중앙에 사람이 앉아 있기도 한다. 널뛰기는 주로 처녀들이나 어린 여자아이들이 즐긴다. 처녀 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을 가서 아기를 제대로 낳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처녀들은 누구나 널뛰기를 잘 한다. 새색시나 아지매들도 즐긴다. 옛날에 널 한쪽 높이 뛰어 올라 담 너머 이웃집 총각을 흘낏 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씨 네 집과 김씨네 집이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타성의 총각을 보고 싶지만 옆집으로 갈 수는 없으니 널을 뛰면서 보았다고 한다. 옛적에 양반동네 부녀자들은 주로 집 울타리나 담장 안에서 갇혀 살았기 때문에 널뛰기를 하면서 공중 높이 뛰어올라 담장 밖의 이웃이나 세상을 살펴보았다고도 한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자기 키 반키 정도로 하늘로 올라가면 속치마가 살짝 보인다. 마치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세다. 다시 내려오는 상대방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러한 장면은 설날 이후 정초에 한가할 때 잘 어울리는 놀이다. 가끔 누가 가장 멀리 올라가나 내기도 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균형을 잘 잡아야한다. 몇몇이 둘러서서 잘 한다고 박수 치고 우리 딸 최고데이 우리 며느리 최고데이 하고 소리친다. 정말로 잘 뛰는 여자는 공중에 올라가서 양쪽 다리를 살짝 벌렸다가 내려앉는다. 또 손과 다리를 앞으로 뻗기도 하고 치마로 뭔가를 받는 시늉하기도 한다. 양반동네에서 여성들의 놀이가 별러 없는데 널뛰기는 정말 신나는 놀이다. 물론 총각들과 함께 뛸 때도 있다. 잘 뛰는 총각은 발을 양쪽으로 높이 올리고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고 흥을 돋구기도 한다. 물론 처녀가 총각보다 더 잘 뛸 때도 있다. 어느 핸가 재주 많고 노래도 잘하는 우리 시누이가 영양 청기서 정초에 친정에 왔다. 시집동네에서 배운 널뛰기 노래도 흥얼거리면 마을 새색시나 처녀들이 따라 불렀다.
박순우의 널뛰기노래 윷놀이 노래 추가???
박촌에 내가 일가라서 자주 가는 손녀빨 되는 순우는 노래도 잘 하고 가사도 잘 읊는다. 글도 잘 쓰고 재주가 좋다. 화수회를 가면 순우가 그 기분을 가사로 아주 잘 쓰곤했다. 참 재주가 좋았다.
묵은해는 지나가고 새해설날 맞이했네. 앞집의 수캐야 네 왔느냐 뒷집의 순이야 너도 왔니 만복무량 소원 성취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금년 신수 좋을시구 서제도령 공치기가 널뛰기만 못하리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규중 생장 우리 몸은 설놀음이 널뛰기라 널뛰기를 마친 후에 떡국놀이 가자세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버전댁이 이야기해준 전설
저녁에는 버전댁(법전댁)이나 뒤세댁에 모여서 가사도 읊고 흘러간 전설 같은 이야기도 한다. 특히 버전 댁이 내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우리가 너무 가난하게 사니까. 어여튼 지혜롭게 힘을 써서 살다보면 살림이 불어나서 부자로 살수 있다고 해서 위안이 되었다. 버전댁은 이야기도 잘하고 가사도 잘 써서 만날때마다 배울게 있었다. 그러면서 봉화 법전 동네에 새 며느리가 현명해서 부자가 된 이야기를 얼핏 해주었다.
옛날에 이웃동네 가난한 며느리가 법전 마을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오니 시아부지하고 서방이 일을 잘 안하고 놀기만 하니 살림이 불어나지 않아서 답답해서 신랑보고 "놀기만 하면 뭐하니껴, 그럼 집에 들어올 때라도 돌기(돌)라도 하나씩 주와서 뒤안 울타리 밑에 쌓아두이소. " 그러케 신랑이 놀다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돌기를 하나둘 주와서 울타리 밑에 쌓고 하니. 어느 날 그 돌무더기에 서기가 돌아서 해빛이 쪼이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앞집 며느리가 그 반짝거리는 돌이 금인 줄 알고 "우리 고방에 나락이 몇 섬 있으니 가져가고 그 돌을 날 주소"했다. 그래서 돌과 나락을 바꾸어서 가난을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새 며느리가 지혜로워서 가난한 집이 살아난 이야기다.
그러면서 지금은 목구멍에 풀칠하면서 살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으니 무엇이 든지 열심히 하면 부자로 잘 살거라고 한다. 버전댁 말은 언제나 위로가 된다.
노래 부르기
도시에 갔다가 방학이나 설이나 추석에 온 동네 청년들이나 도회지로 시집갔다고 친정에 온 딸네들이 차차차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지 나무 멋지다. 사랑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이들은 사랑어른 없는 친척 집에 가서 주로 노래를 부르며 논다. 우리 옆집 봉대형님댁 영진이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유성기를 틀어노면 유행가가 자주 들려왔는데 이젠 다 자란 아이들이 밤에 모여 직접 부른다. 오동추야 밝은 달밤에도 듣기 좋고 챠챠챠도 듣기 좋다.

유성기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에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궂은 비오는 밤 낙수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통통떠는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사공의 뱃노래가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멋쟁이 기생들 장구소리가
오동동 오동동 밤을 새우는 한량님들 밤놀음이 오동동이요.
영진이가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늘 이 노래를 틀어서 듣는다. 아이들이 그 집에서 들려오는 유성기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따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부르던 슬픈 민요가락보다 발랄하고 신나서 좋다.
이어서 또 다음 노래가 울려퍼진다. 노래가 사연을 담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둘매도 삼이도 잘 따라 부른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 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풀렸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데니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노래도 우리가 즐기던 아리랑, 도라지 등 민요 가락보다 신파조의 노래가 더 신나고 힘차다. 일제탄압 시대도 끝나고 해방도 맞이하고 또 육이오 동란도 끝나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니 노랫가락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 같다. 노들갱변이나 무섬갱변에 나오는 아니놀지는 못하리라를 색다르게 부르니 신이 저절로 난다. 윷놀이 할 때도 저녁에 모여 놀 때도 딸 아들 세대는 이런 노래를 즐겨 부른다. 놀이와 노래는 모든 사람들을 흥겹게 하는 것 같다.

강가 나무 밑에 모여서 봄놀이를 즐긴다. 꽃으로 수놓은 화전도 부쳐먹는다. 그리고 노래도부르고 춤도 춘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시구절시구 차차차(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
가세가세 산천경계로 늙기나 전에 구경가세
인생은 일장의 춘몽 둥글둥글 살아나가자
얼시구절시구 차차차(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차차차)
춘풍화류 호시절에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 차차차(차차차)

위 노래는 우리가 육이오 동란 이후 화수회에 가서 춤추고 놀 때 민요가락과 비슷해서 듣기도 익숙해서 흥이 저절로 난다. 놀러 갈 때마다 불렀다. 사실 놀 시간이 없는 농촌의 아낙네들이 이날은 이런 노래로나마 위로를 받고 즐겼다. 술도 한잔 마시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부르는 이 노래는 누구나 좋아한다.

또,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여럿 있지만 동네 청년들과 처녀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낙화유수'를 적어본다.
이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이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강산에 봄맞이 가세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청춘은 언제 또 피나
https://youtu.be/a7M85FL1-MY
대보름에는 찰밥과 묵은 나물이 최고의 명절음식이다.

대보름날 새벽에 잠이 깨고 나서 말하기 전에 추자 밤 불콩 땅콩 같은 딱딱한 과실이나 열매로 부스럼을 깨면 일 년 내내 피부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 년 내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스럼 깨는 추자(호두), 땅콩 밤 등
물론 대보름에 봄 여름 내내 말려놓았던 묵은 나물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오곡밥의 원래 이름은 잡곡 찰밥인데 대체로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지어 보름날 이른 아침에 그리고 그 이후까지 먹는다. 오곡 찰밥에는 물론 대추 밤도 들어가서 약밥이라고도 한다. 오곡밥과 말린 호박 가지 고지로 만든 묵은 나물은 타성(他姓)받이 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해서 김 씨네는 박 씨네 집에서 박 씨네는 김 씨네 집에서 얻어먹기도 한다. 이는 아마 마을에서 타성 집안과 잘 사이좋게 지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히 중간 마을 영감댁과 도기촌 댁 우리 일가 집안에 자주 다녔다. 그 두 집은 박 씨 집안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갈 때마다 늘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친정 같았다. 영감댁 오빠는 나와 항렬이 같아서 나를 누이동생처럼 대해주었다. 아랫마을 김씨 가문에 와서 아들 많이 나아서 우리 박가의 자랑이라고 칭찬도 해주고 그 집 큰딸 순우는 나를 무척 따랐다. 순우는 재주도 좋아 글도 잘 썼다. 그 집 큰 아들 종우는 우리 큰딸 둘매와 동갑이다. 순우네 작은 집 큰 딸이 우리 큰집 윤진이와 혼일을 하여 각별한 관계였다. 영감어른도 글을 잘했고 그 아릇대 찬하 씨의 부인은 또 석포어른 사촌 누이와 결혼해서 우리 김 가네와 각별한 관계였다. 찬하 씨는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했다. 만년에 바둑을 좋아해서 우리 어린 경이와 한철이를 불러 바둑 상대도 해주고 과일도 떡도 주곤했다. 박씨 촌에서는 큰 행사에 나는 자주 간 편이다. 같은 일가라 서스럼이 없었다. 뭐라도 하나 얻어 와서 우리 아이들을 먹였다.
쥐불놀이와 달집태우기

무섬동네는 앞 강변이 넓어서 달집태우기 놀이하기 참 좋다. 아이들은 쥐불놀이도 한다.

무섬마을 앞산에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행사가 시작됐다. 무섬마을보존회(김선광) 주관으로 열린 ‘안녕기원제’와 ‘달집태우기’행사
마을 원로 박수양(93) 옹이 천지신명과 달님께 잔을 올리고 김두병 축관이 독축했다. 김 축관은 “갑오년 정월대보름을 맞아 무섬마을 사람들과 영주시민들이 여기 모였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정월대보름 달님이시여, 박수양이 두 손 모아 비나이다. 대한민국의 태평성대와 문수면의 화합과 발전과 풍년농사를 기원하오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원했다. (출처 : 영주시민신문(http://www.yjinews.com)

특히 무섬의 대보름에는 불과 관련된 쥐불놀이와 앞 갱변에 외나무다리가 시작하는 근방 모래사장에 짚으로 높이 단을 쌓고 불을 지피는 달집태우기 놀이를 한다. 아이들이 어디서 주어왔는지 깡통에 구멍을 듬성듬성 내고 그 안에 불소시개를 넣고는 철사줄로 양끝을 묶어서 깜감한 하늘에 돌리다가 멀리 던지고 소리치고 신나게 논다. 대 보름달 아래에서 즐기는 달집태우기 놀이는 보름달과 불을 관련시키고 이를 그해 풍년이 들기를 바라고, 부정과 사악한 질병이 없어지라고 달에게 기원한다고 한다. 또 젊은이들의 소원이 이루지기를 빈다. 이런 놀이는 거의 대부분 남정네 중심이다. 박 씨네와 김 씨네가 한데 어울려 흥겹게 논다. 설부터 대보름까지 여러 금기가 따르는데 이를 어기면 부정을 탄다. 여기에 다 적을 수가 없다.
물론 설거지 등 집집마다 며느리들도 지난 보름동안 잘 놀았지만 정월 보름날이 지나면 또 가사 일에 몰두해야 한다. 겨울에는 큰일은 없고 뜨개질을 하거나 물레질을 하거나 바느질로 옷을 만기도 한다. 남정네들은 산에 가서 갈비를 끌어 모으고 나무를 해온다. 또 산토끼를 잡거나 꿩을 잡아오면 그날은 고기 맛을 볼 수 있다. 산토끼는 주로 올가미를 사용하고 꿩은 콩에다 싸이나(청산가리) 같은 독약을 넣어서 잡는다.

소쿠리로 참새 잡기
또 아이들은 소쿠리를 짝대기로 고아놓고, 새끼줄로 묶어서 바라지 문안까지 느려뜨려서 줄을 잡고 기다리다가 새들이 모이를 주워 먹으러 소쿠리 속으로 들어가면 새끼줄을 당겨서 참새를 잡는다. 또 밤에 참새들이 추녀 밑 참새 집에 들어가 잘 때 후라시로 불을 비추어서 손으로 잡기도 한다. 잡은 참새는 부엌 아궁이에서 구워먹는다. 농촌에서 긴 겨울 나기가 쉽지 않다, 육이오 동란 이후 여러 해 동안 식량이 부족해서 겨울에는 아침을 늦게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을 일찍 먹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그 당시 가난한 삶은 누구나 겪어야하는 일상생활이었다. 배고픔과 가난은 지긋지긋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춘궁기에는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추위도 배고픔도 아랑곳없이 앞 강물이 얼기 시작하면 얼음지치기를 좋아한다. 철사 줄을 나무판때기 밑바닥에 밖아 고정시키고 끈으로 나무판때기를 신발 밑에 묶어서 얼음 위에서 외발로 얼음 위를 타고 논다. 물에 빠져 양말이 다 젖어 들어 올 때도 부지기수다. 사랑어른이 알면 혼이 나게 야단을 들으니 몰래 안방 창문으로 들어오면 시어맴이 손주들을 아랫목에 앉혀놓고, 언 발을 손으로 싹싹 비벼주신다.
어느 겨울과 여름에 있었던 일
무섬에 들어가는 길은 외나무다리뿐이었지만 겨울에 강물이 잦아들면 몇 십 년에 한번 정도 산판을 하고 목재를 실으러 커다란 화물차 트럭이 수십 대 씩 마을 앞을 지나 소두리를 거쳐 높은 산 밑으로 간다. 산 밑에서 목재를 실은 화물차가 무섬 앞 모래밭을 천천히 지나가면 아이들이 화물차 뒤에 매달러 가기를 좋아한다.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해도 아랑곳없다. 무섬에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바뀌 달린 자동차가 이 물로 삼면이 둘러싸인 동네에 나타나니 진기할 수밖에 없다. 화물차가 띠얏 물나들이를 건널 때 조금 깊은 물에 빠지면 기다란 철판을 발통 밑에 깔아서 지나가곤 한다. 동네사람들은 산판을 하고 버린 소나무를 잔가지들을 지게로 소로 실어 나른다. 많이 실어 오며는 한두 해 겨울은 나무가 풍부해서 땔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소나무 산판
한번은 박씨 가문의 영감댁 산인 앞산 뜰뻴 산의 수백 년 자란 아름드리 크기의 소나무 산판을 하였다. 노송들로 가득한 산이 무척 아름다웠는데 산판을 한다고 다 베어버리니 민둥산처럼 보인다. 잡나무들만 자란다. 보기가 익숙하지 않아 흉하기 짝이 없다.

소나무를 밧줄로 엮어서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물에 띠워서 강 하류로 옮긴다. 동네에서 힘센 청년들이나 어른들이 품삯을 받고 통나무 뗏목에 두 사람씩 타서 뗏목을 옮긴다. 물 위에서 떠내려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마을 뗏목꾼들이 수십 리 아래 예천인가 어딘가 강 가까이 도로가 나 있는 곳 까지 운반해서 강가로 뗏목을 끌어 내놓고 열차를 타고 돌아온다. 품삯을 받아 오면서 술도 사먹고 반찬거리도 사온다. 조용한 마을에 왁자지껄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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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국 (1931, 1938년) | 서울, 한국 (1931, 1938년) 동영상 Rare video footage of Seoul, Korea (1931, 1938)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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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섬서 시집살이 할 때 서울의 모습
다음에 제3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