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일생5: 주경야독 Farming by day, reading by night. After Korean War of 1950, famine, disease, and poverty are repeated.

Kyuchin Kim 2022. 8. 18. 17:01

 

육이오 후 기근과 질병과 가난의 되풀이After Korean War of 1950, famine, disease, and poverty are repeated.

        육이오 전쟁 후 작은 읍내나 도시마다 활기가 돌아왔지만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진: 체코인 종군기자 6.25.직후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후 마을에는 기근이 왔다. 마을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쌀 한톨이 귀할 때인 어떤 때는 피죽을 끓여먹기도 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먹고 겨우 살아났다. 나무줄기 풀뿌리 각종 약초 들풀 산나물을 뜯어 먹고 살아가야 한다. 지천에 자라는 쑥을 잘라서 콩가루로 쑥버무리는 맛 있는 음식이었다. 다시 농사도 지을 수 있어 해가 갈수록 조금씩 좋아졌으나 여전히 힘들었다. 사람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보리고개는 해마다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 되었다. 오즉하면 엄마가 아이들 보고 배꺼질까 봐 뛰어다니지 말고 울지도 마라고 하셨을까. 지긋지긋한 가난이 되풀이 된다. 그래도 살아 가야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데이 시어머님이 늘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배가고파도 달밤에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를라치면 나의 어린 시절도 생각나게한다.  달밝은 밤 갱변에 모여서 따오기 동요를 부르며 친구들과 둥글게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도는 아이들이 배고픈 줄도 모르고 논다. 

 

영주 읍 5일 10일장은 시골에서 가져온 농산물 등 물물교환으로 왁짜지껄하다. 활기가 찬다.  장에 갈때 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농민들이 한달에 한두번씩은 장에 가서 새로운 소식도 듣고 새로운 물품도 사고 하루 쉬어가면서 지내는 날이다.

육이오 동란 후 미군부대에서 구호품을 나누어주었다. 면소재지나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강냉이 가루와 탈지분유를 배급해주어서 허기를 면했다. 분유를 뭉쳐서 밥솥에 쪄서 먹곤했다. 강냉이가루도 마찬가지로 먹었다. 

https://youtu.be/ukmt6pDmm3c

 

보리고개 노래 가사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아야 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달밝은 밤 갱변에 모여서 따오기 동요를 부르며 친구들과 둥글게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도는 아이들이 배고픈 줄도 모르고 논다. 

https://youtu.be/6kH404mR8T8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잡힐듯이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기록으로 보는 1950~80년대 전통시장 - YouTube

 

그시절 · 그모습] 풍기 장날 이야기 3[그시절 · 그모습] 풍기 장날 이야기 3 - 영주인터넷방송 (iybc.co.kr)

 

                      

어느 날 앞집 새댁이 대문을 빼꼬미 열고 말한다.

방석아지매요, 보리 둬 사발마 꿔주이소, 빠사가주고 어무이 보리미음이라도 끼리드릴랍니더.

우리도 아직 보리 빠난 게 없네. 아이고 이걸 우짜면 조을꼬, 올 저녁에 빵깐에서 다 빠면 그때 보세이.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모양이제. 그래 시어무이가 아직 많이 팬찮은가. 아 애비는 뭐하노 품앗이라도 하면 보리 되라도 구할 텐데. 아들도 집안 식구 매기 살리려면 일을 해야제.

아아부지도 몸이 성차나서 오늘에야 남 들일 나갔니더. 저녁에 보리되나 가져올란 지 모르니더. 아이고 내 팔자야 지금 당장 미음도 못 끓어드려서 그러니더.

아이고 새댁 그런 소리 하지 마게 그만 내 이애기를 들어보게. 우리집에도 별로 먹을게 없으께네 딴 집에 가보게.

어디 가 물어 볼데도 마땅찮꼬 어떠카믄 조을꼬 시어므이가 죽게 생겼으니.

어디가 그렇게 아픈가 

잘은 몰라요 못먹어서 그런지 얼굴이 누런게 매란없니더. 간이 나쁜지 제대로 못먹어서 피부도 부종이 생기고 부슬부슬하니더.

아이고 불쌍해라 나도 몇년 전에  아놓고 제대로 몬먹어서 기운이 없고 피부에 염증도 악화되었는데 시아버님이 시어머님께 녹두죽을 끓이게하여 자주 먹게하니 기운도 생기고 피부염증도 좋아졌뿌렸네 . 자 그럼 이 녹두 한웅쿰 하고 조밤 한데이 줄테이께니 가져가서 끓여주게나.  이웃들도 모두 가난으로 온갖 독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는 마 녹두가 최고데이. 우리 아들도 한번 황달에 걸렸는데 시어머님이 녹두 죽을 끓여 먹이고 녹두 싹을 내어 숙주나물을 자주 먹여서 서서히 황달에서 벗어났다네.  시아버님이 음식물 중에서 최고의 해독제라고 했다네. 동지에 팥죽이나 녹두죽을 끓여먹는 것도 겨울 동안 여러가지 질병에 덜 걸리라고 먹는다네.

우야노 서로 없는 살림에. 아애비한테 올해는 어여튼 산허리를 쫘서 밭을 대강 맹글어가지고, 거다가 서숙도가고 수수도 가고 길금콩도 불콩도 가고 과실나무도 좀 숭그맨서 살 도리를 찾아보라고 하거레이.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제, 맨날 남의 집에 와서 꿔가면 안된데이. 그것도 버릇덴데이 에이고 참 답답하데이.

그케말이요 작년 팔월더위에 서숙 밭 메다가 오금밑이 물어서 우리 이녀키가 일안하라카이 우째니껴, 느래빠제 가지고 일도 안하면 겨울에 무묵고 살라카는지 속상해 죽께니더 꽁보리밥이나 조밥이라도 묵어야 살제요. 아이고 내 팔자가 왜 이러니껴.

자 이거 받아 가 얼른 시어무이 죽이라도 끌여주게.

아이고 아지매요 고마우데이. 이 은혜 어떻게 가플고요.

 

 

  동짓날이면 꼭 챙겨 먹던 새알 팥죽은 귀신과 액운을 막아주고 질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삶은 팥은 부종을 억제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시골에서는 약이 별로 없어 식중독이나  황달 증상이 있으면 녹주죽이나 녹두 숙주나물 국을 끓여먹는다.  녹두(綠豆)는 시골의 만병통치약이다.

맛있어 먹기좋고 제사상에도 올리는 녹두로만 든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초기 사육신 사건 때 단종에 대한 충성을 지킨 사육신들과 달리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찬탈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절자로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실제로 빨리 쉬어버리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다고 하시면서 시어님이 사람은 변절자가 되는 게 제일 나쁘다고 하신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처럼.

 

            미군부대에서 나누어준 탈지 분유와 강냉이 가루

 

어느 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하얀  탈지분유를 타왔다. 어떤 때는 노란 강냉이 가루도 타왔다. 미국 구호식량이었다. 강냉이 가루를 쪄 먹기도 하고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식량이 부족한테 큰 도움이 되었다. 분유는 처음에 멋모르고 먹다가 식구 들 모두가 설사를 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차츰 익수해지니 아주 유용한 음식이다. 젖먹이들한테는 물에 타면 귀한 우유로 젖을 대신해서 인기가 있었다.

전쟁 후 알 수 없는 괴질과 피부병들이 생겨서 가정마다 별 고생을 다했다. 피부병에는 쇠비름과 어성초를 먹고 발라도 잘 안 들었다. 그런데 미제 맨소리다다마란 약을 바르면 잘 나았다. 차츰 병도 잦아지고 농사일도 정상으로 돌아오니 차츰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5 10일 장날 읍내에 가면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거나 한쪽 팔이 없는 불쌍한 상이군인들도 눈에 많이 띠었지만.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갈 때인 1951년 봄 신묘(辛卯)년에 아들 숙진이가 태어나고, 또 계사(癸巳)년에 아들 재현이가 태어났다. 을미(乙未)년에 딸 순둘이가 태어났다. 몇 년 후 태기가 없다가 마흔 네 살 무렵 기해(己亥) 년에 막내아들 기현이가 또 태어났다. 그 이후 우리는 아들 부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생활은 어렵고 가난했지만 가정에 행복이 넘치는 것 같았다. 애들은 다 지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나니 애들 많이 낳고 잘 길러야 한데이 하던 할매 말이 생각난다.

 

옆 큰 기와집 참봉댁에도 우리 둘째 딸인 둘매 보다 한해 후에 딸 하나를 놓고 아이 어매가 죽저세상가고 새로 결혼해서 아들 일곱을 나았다. 그래서 무섬 아랫마을은 아들 부자마을이라고 했다. 집집마다 그 많은 자식들이 따뜻한 안방 아랫묵에서 할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를 낳고 길렀다. 우리시머님은 이웃집 참봉댁 아이들 낳을 때마다 도와주셨다. 

                                                            명주 짜는 비단베틀

육이오 이후에도 농한기에는 오랫동안 집집마다 길쌈으로 돈을 조금씩 모으고 논밭도 사고 했다.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찰카닥찰카닥 베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우리는 시어머님과 큰 딸과 함께 베도 짜고 명주두 짜니 훨씬 수월했다. 맏딸이 살림에 엄청 도움이 된다. 시어머님은 힘드시면 삼베를 짜면서 배틀 노래도 흥얼거리신다.

 

둘러보자 둘러보자 옥난간에 둘러보자

옥난간에 베틀노코 마루위에 물레노코

베틀다리 네다린데 앞다릴랑 돋아노코

뒷다릴랑 낮촤노코 도투마리 고여노코

베틀신대 잡아당겨 베틀신끈 팽팽하게

눈썹노리 가지런히 용두머리 바라보며

왔다갔다 북던지고 찰칵찰칵 베를짠다

큰딸아이 아기안고 새근새근 잘도잔다

마당가에 누렁이도 우물가에 병아리도

형험없이 잘도논다 베틀놓은 삼일만에

삼배적삼 다짜내니 앞집이야 김서방님

뒤집이야 새색시야 우리선비 돌아올때

바늘한쌈 실한타래 사가지고 오라하게

앞냇물에 씻어다가 빨래줄에 걸어놔서

하루이틀 풀칠하여 낭군도포 지어놓고

뒷바라지 뒤로열고 앞창문을 반만열고

동남풍이 불어오면 낭군적삼 다마르네

 

친정 엄마가 오시면 함께 물레도 자으시면서 녹주장군 노래도 부르신다.  손일 열개라도 모자란다고 늘 하시면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게 농촌 생활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삼베 베틀

시어어님은 또 아이들이  할매 할매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이야기도 해주셔야한다.  손주들의 인기를 끌었다. 할매가 언젠가 한번 큰 산에 굴밤(도토리) 주우러 갔는데 바위 밑에 새끼 호랭이가 두 마리 앙금앙금 기어 다니면서 울고 있는 걸 보고 불쌍해서 가져간 주먹밥을 조금씩 먹였다, 그 순간 어흐흥 하면서 커다란 어미 호랭이가 나타났다. 아이코 꼼짝 없이 죽게 생겼구나 싶었다. 그래도 옛말에 호랭이 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주먹밥을 보여주며 새끼에게 먹여주었다고 손짓을 하니 어미 호랭이가 지 새끼가 밥을 얻어먹고 만족해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걸 보고는 갑자기 할매 앞에 넙죽 엎드렸다. 할매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해 하는데 어미 호랭이가 자꾸 등을 할매 다리사이로 들이밀었다. 그제야 올라타라고 하는 줄 알고 굴밥 자루를 들고 호랑이 등에 올라탔제. 호랑이는 산을 쏜살 같이 달려 내려가 마을 앞 물가에 까지 데려다 놓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짐승도 은혜를 갚을 줄 아니 너희들도 자라면서 누구의 덕을 보면 반드시 그 은혜를 잊지말거래이 하신다. 배은망덕이 제일 나쁘데이.

  육이오 동란이 끝나고 세월이 좀 안정되는 가 싶었는데 나라에는 온통 젊은 학생들이 대모를 해서 독재자들을 몰아내었다는 소문이 시골에도 자자했다.  읍내에서는 중고등학생들도 거리에 나가서 자유니 뭐니 하면서 소리치고 난리였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혁명인가 뭔가를 한다고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영주 수해가 나던 해에 영주 장에 나기 박정희 장군이 영주 수해 현장에 왔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그러나 시골동네에는 예나 지금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우리 마구채 애림벽보에 선거 포스터가 나붙었다.

 

자식 이야기는 하면 끝이 없다.

 

사람들이 지 신랑이야기나 자식 자랑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 인생에 자식은 가장 소중하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인생 이야기가 지루하게 늘어지더라도 자식이야기는 꼭 쓰고 싶다.

이제 큰딸이 된 둘매 혼사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날 안쪽 마을 뒤세댁 사돈 된다는 아지매가 일직에서 찾아와서 혼사 이야기를 하고 갔다. 나도 그 후 그 집에 한번 다녀오고 영주에서 맞선을 보고 결혼을 시켰다. 무섬 마당에서 내 신혼식을 치루고 얼마 안 되어 시누이가 시집갈 때 꼬꼬재배를 하고는 처음이다. 결혼식은 예나 그때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일가친척들이 좀 더 많이 모이고 더 떠들썩하고. 음식도 좀 더 푸짐했다. 키우던 돼지도 잡아서 잔치 상을 차렸다. 첫딸을 지웠으니 좀 안심이 되었다. 한 두 해가 흘렀다. 그런데 사위가 어째 이상해졌는지 아이도 낳지 않고 둘 사이가 소원해졌다. 친정에 온 둘매 이야기에 의하면 신랑이 초등학교 교사인데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하면서 집에는 자주 오지 않아 시어머니와 산다고 한다. 소박받은 딸이 불쌍하고 사위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화가 나서 안동고등학교 다니는 셋째 경이를 데리고 딸 시집으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위가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이혼을 하지고 한다. 나는 화가 나서 이혼 할 거면 왜 결혼 했느냐고 따지며 멱살을 잡고 한바탕 소동을 벌렸다. 그 집 안 사돈하고 경이가 말려 겨우 참고 돌아왔다. 첫딸은 그래서 결혼을 실패 했다. 그러나 훗날 큰 집 영해 댁이 영덕의 상처하고 딸만 셋 있는 농군하고 중매를 했다. 밀양박씨로 집안이 괜찮아서 재혼해서 아들이 없는 집에 시집가서 아들 둘 놓고 가문을 세웠다.

무섬서 농촌 일하는 것을 힘이 들어 해서 농군한테는 결혼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교사와 결혼 했는데 실패하고 다시 결국 농부하고 결혼을 했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굴레를 지고 가는 모양이다. 결혼을 실패해도 이렇게 다시 살아나는 방도가 있어 다행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시던 시어맴의 말씀이 새삼 새롭다, 둘매도 초등학교 졸업하고 이웃집 딸이 중학교에 가니 지도 가고 싶어했는 데 집안 살림 때문에 못 보낸 것이 아쉬웠다. 세월이 그만큼 좋아진 탓이다. 현대 사회가 내가 어릴 때와는 천양지차다. 무섬마을에서는 지난 40여 년 간 옛날식으로 똑같이 농사짓고 옛날식으로 똑같이 살아가지만 시대의 흐름과 유행은 서서히 퍼진다. 우선 자녀들이 많이 학교에 다니고 객지로 많이 진출한다.

나도 아이들보고 중매대신 지들 알아서 색시 감을 구해도 된다고 했다. 옛날 방식보다는 현대식이 더 편한 것 같다. 저들끼리 맘에 들고 좋아하면 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들도 다자란 아이들이 색시 감을 구해 오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어른도 어쩔 수 없으니 새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시는 눈치시다. 그래도 사랑어른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하시면서 옛 법을 잘 익혀야한다고 타이른다.

 

그런데 무섬 마을에는 병마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사는 과부들이 꽤 많다. 잘 사던 집이 풍비박산이 났다. 유복자도 생겨났다. 양반 동네이고 세대가 달라 그분들은 옛날식으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양반체면 때문이다. 우리 딸 세대만 해도 재혼도 하니 참 세상이 좋아졌다. 분하고 분하지만 딸이 새 삶을 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때 하도 고민하고 걱정을 해서 편두통이 더 아파온다. 평소에도 머리가 아파서 뇌신이란 약을 복용해왔는데 고민을 하면 병이 덧나는 모양이다. 자식의 슬픔이 어찌 부모의 고통이 아니겠는가.

 

 

 

부자간의 갈등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우리 사랑어른의 좌우명

 

우리 사랑어른은 자녀들에게 가장 자주 하신 말씀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한자어 숙어였다. 아이들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주 여러 고사를 들어가시며 늘 말씀하셨다. 일 년에 한번 꼴로 벌초하러 산소에 갈 때 잡초에 뒤덮인 산길을 낫으로 쳐가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이것 봐라, 길이 있었는데, 자주 다니지는 않은 길은 이처럼 풀에 덮여 길이 길같이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늘 새로운 마음을 먹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도 이 산길처럼 풀이 무성해지니 늘 새로운 마음가지을 가져야한다

또 여름 고추 밭에서 일할 때였다. 고추도 가지를 쳐준 것은 굵고 싱싱한 고추가 열리고, 가지를 쳐주지 않으면 잔가지가 너무 무성해서 고추가 굵어지지 않고 가늘고 작은 고추가 열린다. 고추도 자주 새롭게 가지치기를 해주어야한다. 비단 고추뿐만 아니라 여러 곡식도, 과일나무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면 늘 해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곡식도 좋은 과일도 수확할 수 없다. 늘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듯이.

부모나 집안 어른에게도 늘 새로운 마음가집을 가지고 인사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이나 조부모님한테는 물론이고 이웃 집안 어른이나 마을 어른들을 만나더라도 곡 인사하는 버릇을 길러야한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한테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습관을 들어야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늘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심을 선생님께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라.

학교에서나 마을에서 나가 놀 때도 친구들한테 늘 말조심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버릇을 길러야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 갈 수 있다.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늘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이야기해서 서로서로 우정을 쌓아야한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란 말대로, 친구와의 신의도 늘 닦고 새롭게 해야 신의도 두터워지지 그렇지 않으면 산길 가에 잡초처럼 풀이 무성해서 우정이 두터워지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관계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지니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을 명심하고 살아가거라. 시조부님이 살아계실 때도 평상시에 옛 고사 성어를 자주 언급하시면서 꼭 말씀을 하셨다.

 

큰 아들 삼이는 재주가 별로여서 중학교만 하고 그만 두었다. 맏이 인데도 늘 지아부지와 사이가 안 좋다. 어릴 때 지 할배한테 천자문도 열심히 배웠는데. 사랑어른이 공부 안하면 큰 아들에게 이 빌어먹을 놈아 공부 안하고 뭐가 될끼노 등 너무 심한 말을 해 댄다. 그래도 중학교 다니는 삼이는 토요일 읍에서 와서 부자간에 일도 잘 한다. 일요일 쌀 좁쌀 야채 된장 조금하고  보따리에 싸서 읍내 이모네한테로 가곤했다. 한번은 삼이 하복을 다리려고 수껑에 불을 붙여 손다리미에 넣고 다리는데 불이 잘 살아올라오지 않아서 입으로 다리미 불 가까이 데고 여러 번 불어댔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리둥절해서 그만 쓰러졌다. 사랑어른이 마침 마루에 옆으로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 마루바닥에 누워서 왜 뭐하는고 하고 소리치셨다. 큰 소리에 정신이 약간 들어서 움직이니 그제야 손다리미에 숯불이 이글거리는 걸 보시고 얼른 치우고 소금물을 타서 먹여주셨다. 머리가 아팠지만 다시 일어나 앉았다. 삼이는 어데 갔는고. 저놈의 자식 옷 다리다가 지어미 큰 일 날 뻔 했다. 그냥 입고가면 안 되나 하고 아도 없지만 막말을 하신다.

 

삼이는 공부보단 다른데 관심이 더 많았다. 산에 가면 토끼도 꿩도 잘 잡아오고 강에 가면 물고기도 잘 잡아 오곤 했다. 지 할배를 닮아 키도 크고 건장했다. 다만 지 아부지와 사이가 안 좋아서 늘 얼굴에 근심걱정이 서린 걸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깝다. 지 아부지와 정이 아니 드니 농사일도 싫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끌여 다니며 일터로 가곤 한다. 어느 날 같은 나이 또리 앞집 맹이와 말없이 집을 나갔다. 동생 경이한테만 어디 갔다 온다고 했다. 사흘 뒤 돌아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거의 굶다 시피하면서 이 일 저일 찾다가 읍내 이모네서 마지막으로 점심 한 끼를 얻어먹고 왔다고 하면서 지 아부지 눈치를 살핀다. 이번에는 사랑어른이 크게 야단치지 않고 말도 안 하신다. 그래도 맏이인데 또 뭐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시다. 영주 기독교 중학교를 다녀서인지 일요일 되면 문수국민학교 옆 기왓골에 있는 교회에도 다닌다. 사랑어른은 또 아들한테 예수쟁이가 된다고 고래고래 야단을 치신다. 그래도 참고 농사짓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 예수쟁이가 가지고 다니는  까만 책이 성경이다. 호기심에 조금 읽어보았다 사람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는게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예수란 선지자가 기적을 행하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는흥미 진진했다. 새로운 학문이다. 시아버님이나 아버님이 숭배하시는 유교사상과는 많이 대치되는 것 같다. 언젠가 읍내에서 깨친 사람한테 들은 것이 생각난다. 대원이 대감시절 서양 선교사들과 조선의 예수쟁이들이 참수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세상이 참으로 빨리 변해가는 것 같지만 무섬동네는 새문물이 늦게 들어온다. 옛풍습을 너무 따르는 것같다. 입만뻥급하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어떻고 한다.

 

 삼이가 영주 영광중학교 다닐때 예수쟁이 학교라 기도문도 외우고 빙학에 집에 오면 기얏골로 교회도 지아부지 눈치보면서 다니곤했다. 거기에 가면  피아노도  잘 치는 이쁜 처녀가 있어서 형이 자주 간다고 경이가 언젠가 말해준적이 있다. 공부에 관심이 없으면 뭔가라도 배우면 덕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서울나들이를 자주 다니시던 문전아지뱀이 가져온 예수쟁이 책도 흥미로웠다. 사랑어른 몰래 읽어본 적이 있는 데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16-21

 

우리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 라는 이야기와 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 장난이 요술 같기도 하는 신학문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가지만 더 이상 알길이 없다. 

 

 

삼이는 군대에 갔다가 월남에 가서 일 년 간 근무하고 돌아왔다. 병사들도 월남 가서 돌아오면 한 밑전 잡는다는데 삼이는 부산 항구에 내려서 어떤 사람이 청바지를 싸게 많이 사서 가져가 팔면 몇 배나 돈을 번다고 해서 왕창 사왔다. 지 이종사촌 누나가 이 청바지들이 가짜라고 해서 돈을 몽땅 날려버렸다. 일제 히타치 라디오를 하나 사 와서 이제 집안에서도 바깥소식과 세계뉴스를 들을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노래도 가끔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귀구할 때 히타치 라디오를 하나 사가지고 왔다.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라디오라 뉴스를 들으러 동네 아지매들이 가끔 오곤 했다.

제대 하고 나서 나중에 영주서 서울로 이사 간 이모한테 갔다가 서울서 생선가게에서 일도 하고 이 일 저 일을 알아보고 지내다가 지 외사촌 익이 형이 중매를 해서 참한 색시와 약혼을 했다. 결혼을 얼마 앞두고 고향 무섬에 왔다가 서울 가는 길에 원주역에서 열차 사고가 나서 그만 저세상으로 갔다. 집안에 경사가 나려다가 청천병력(靑天霹靂) 같은 비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 무슨 변고 인지 업보인지 5살 도 안 된 첫 아들 잃어버려 슬픔을 잊고 살아왔는데 또 큰 아들이 변을 당하다니. 사랑어른이 원주에 가서 시신을 수습해서 어디 야산에 묻고 왔다. 결혼을 하지 않은 불효자식 정식 미()도 안 쓴다는 마을 풍습이다. 양반마을의 유교풍습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시어머님이나 나나 다른 식구들도 사랑어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비롯 그의 육신이 남 모를 산에 묻혀 있지만 내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 신세한탄(身世恨歎)할 데도 없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지만 내색도 못하고 살아가야 할 내 운명이 슬프기 한이 없다. 이는 일생동안 내 골수(骨髓)에 박혀있다. 조물주가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는 가, 이내 가슴 슬프기 그지없네. 내가 무덕(無德)해서 그런가, 천지신명님 이 원통함을 어떻게 참아야 하나요.

우리 집 첫 번째 시조모는 시조부한테 시집와서 후손 없이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이 열아홉이였는 데 아직까지 미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드린다. 우리 아들 삼이는 27살에 죽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았다고 미도 제사도 없고 훗날 호적에도 족보에도 없어 졌다. 참 기가 막힐 유교 방식이다.

                                           

                                              아이들이 큰집이나 종가댁에서 배우던 천자문과 유몽선습

                                             天地之間萬物之衆(천지지간만물지중)에惟人(유인)이最貴(최귀)하니

 

둘 째 아들 경이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보다 좀 더 영리했다. 할아버지 덕택에 살아난 경이에 대한 집안 식구들의 관심이 더 크다. 다 죽었다가 간신히 다시 살아나서 다행히 돌잔치도 할 수 있었다. 돌잔치 때 차려놓은 쌀 방태기위에서 돌잡이 할 때 실과 종이와 붓을 잡아서 시아버님이 어린 손자를 보시고 야가 몸은 약해도 기특한 면이 많다고 하셨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칭찬을 하신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맏이 삼이도 천자문을 배우고 이어서 경이도 배웠는데 삼이는 싫증을 내서 천자문(千字文)을 다 못 뗐다. 경이는 총명해서 천자문을 다 떼고 유몽선습(幼蒙先習)을 배우기 시작하다가 국민학교에 나가고 그만두었다. 한문은 주로 큰집 보갈 아지뱀(遠奎 씨 선광이 조부)한테 배우거나 종가댁 한절마 어른(承學 씨 광옥이 조부)한테 배웠다. 그분들은 우리 시조부한테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집안 일가끼리 자식들을 서로 가르쳐주는 게 마을의 풍습이다. 천자문을 다 끝내고 백설기를 해서 갔다 드렸다. 사랑어른은 한문은 진서(眞書)이니 죽을 때까지 꼭 더해야한다고 강조하셨지만 시대가 바뀌어 아이들은 한문대신 한글을 배우고 학교 공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나도 무섬 마을에서 언문(諺文)인 아래한글을 배워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이들이 읽는 국어책에 나오는 시가며 이야기가 재미있는 게 많아 좋았다. 아이들 덕분에 글을 더 깨우치게 되었다. 동네 귀한 친척 부인들한테서는 언문을 배우고 아이들한테서는 요즘 쓰는 새 한글을 배웠다. 웃마 하회댁과 게남댁은 글씨도 잘 쓰고 사돈지도 쓰고 여러 가지 가사도 가지고 있었다. 친정에서 어릴 때부터 한문도 깨우치고 붓글씨도 잘 썼다. 그들 덕분에 나도 글을 깨우치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두월댁하고 버전댁하고 뒤세댁하고 유동댁은 붓글씨도 잘 쓰고 문장도 좋아서 내게 쓰고 읽는 것을 잘 가르쳐주었다.

 

 

 

주경야독

 

내 자식들 중에서는 그래도 둘째 경이가 가문의 공부하는 분위기를 이어갔다. 한문에 능통하신 시조부님과 시아버님은 마을에서 존경을 받은 분이다. 특히 시조부님은 경이의 한문 스승들(큰 집의 보갈 아지뱀, 종가댁의 한절마 어른) 등이 어릴 때 천자문 등을 가르치셨다니 대단하신 분이었던 같다. 도시 등 바깥나들이도 하셨다고 한다. 시조모님과 시아버님이 이 이야기를 가끔 해주셨다. 시조부님과 시아버님은 동네 친척들의 상을 입거나 제사에 제문도 쓰곤 하셨다. 우리 사랑어른도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하면서 늘 한문책을 보거나 아이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다. 농사 일로 더 이상 글에 집중을 하실 수는 없었지만. 한문과 한글을 다 깨우치셨다. 봄이 되면 대문 등에 붙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가화만성(家和萬成),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세영(子孫萬世英) 같은 글씨를 수십 년 써서 붙이셨다. 나중에 삼이와 경이가 자라고는 삼이와 경이보고 쓰게도 하셨다. 또 맏이와 경이의 천자문 공부할 때 옆에서 지켜보시며 틀리면 가르쳐드리고 그 뜻을 설명하기를 좋아하셨다. 사랑어른도 기회만 있으면 아이들한테 공자 맹자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다. 아이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기가 힘들다고 하면 입신양명(立身揚名)하려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쌓아야한다고 자주 말씀 하신다. 호롱불이 아니라 옛날에는 반딧불과 눈 내리는 밤에 눈빛 속에서도 공부한 이야기를 하신다.

 

 

 

지극정성(至極精誠)

 

경이는 어릴 때부터 무척 약해서 지형이나 동생처럼 들에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도 병 치례를 자주해서 일 년 간 학교를 쉬기도 했다. 아마 2학년이학기와 3학년 일 학기였을 것이다. 겨드랑이 밑이 헐어서 결국 안동 도립병원에 몇 번 다니면서 치료를 해서 나았다. 그레도 3학년 이 학기부터 다른 아이들한테 쳐지지 않고 잘 따라 공부했다. 몸이 약해서 한해는 내가 한약과 따듯한 점심을 해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몸이 약해서 낮에 강에서 헤엄을 과다하게 치고 놀거나 피로하면 밤에 꼭 오줌을 싸곤 했다. 그러면 새벽같이 키를 덮어쓰고 소금동냥을 하도록 했다. 여러 번 그렇게 해도 오줌 싸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사랑어른이 영천에 용한 한약방에 가서 야노증에 좋다는 한약을 두 재나 지어 먹고서는 많이 나아졌다. 

오줌을 싼 날은 새벽같이 키를 덮어쓰고 이웃에 소금동냥을 하도록 했다. 이웃집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얻어 오도록 했다. 놀림을 받지 않기 위해.

 

 

경이가 4학년 때인가 5학 년 때 우리집 머섬으로 박촌의 용산어른이 반머슴으로 일을 하셨다. 매일 하루 걸려서 하루는 우리 집에서 일하시고 하루는 당신 집의 농사를 지으셨다. 그분이 일본보국대에서 몇 년간 고생하다가 귀국한 분이라 일본말과 일본 노래를 잘 하셨다. 경이가 일본말도 그분한테 몇 마디 배워서 그분과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 걸 여러 번 봤다. 나도 일본말에 호기심이 있어 옛날에 위마을에 일본유학 갔다 오신 어른한테 일본말을 조금 배운게 있어 우리 일가인 용산어른과 가끔 한두마디 일본말을 주고받았다. 경이는 뭐든지 배우고 싶어 했다. 그는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다. 곤충이나 벌레 새 동물 나물 풀 나무 꽃등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많았다. 아이들을 키워보니 호기심 많은 자식이 공부를 더 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하도 물어서 귀찮기도 했지만.

                    무섬동네나 국민학교가 있는 기얏골이나 1970년대 중반까지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롱불 밑에서 생활해야 했다.  

 

육학년 때 중학교 보내준다고 하니 담임이신 전달영 선생님이 열심히 시켜서 졸업할 때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5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의 사랑을 못 받아서인지 집에 와서 책 보따리를 펴서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웃마을인 노트리 출신인 전달영 선생님은 정말 아이들을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소중히 여기며 가르치셨다. 비록 지 형이 중학교 다니고 있어 약속했던 중학교에 보내주지는 못했지만. 그때 무척 실망하던 모습이 아직도 역력하다. 몸도 약해서 아부지 따라 농사짓기도 쉽지 않았다. 아부지가 그러면 다시 한문 공부라도 하라고 했다. 한문은 언문과 달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중한 글이고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으니 틈나는 대로 깨우쳐야한다고 타이르신다. 다시 천자문을 꺼내 읽어보고 아부지한테 배운다. 또 유몽선습도 다시 배우러 다니라 하니까, 말은 그렇게 한다고 하고 시작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이웃에 친척 중 영춘아지매 맏이인 홍진이 형이 있었는데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 안동 고등학교 다니다 집에 와 있었다. 지 형 중학교 일학년 영어책을 홍진이 형한테 들고 가서 배우기도 했다. 지 누이가 읽는 소설책도 몰래 읽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하면 자주 읽어주기도 했다. 내가 붓으로 쓴 아래한글과 청기 시누이가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라고 하면 배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지 누이 둘매는 아래한글을 터득해서 누이한테 배우기도 했다. 뭐든지 배우는 데는 관심이 많았다. 몸이 약하니 집안에 들어 앉아 있는 시간이 다른 아들들 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을 더 가까이 했다.

그해 여름 방학이 지나고 지 형이 고등학교를 안 간다고 했다. 나는 사랑어른한테 그러면 경이를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경이도 6학년 이 학기를 다시 다녔다. 마침 이웃집 조카뻘 되는 동갑내기 한철이도 중학교에 가려고 다시 2학기를 다녀서 함께 그 먼 길 문수국민학교를 또 다녔다, 또 머럼 동네 지 친구인 박하서도 2학기를 함께 다녔다. 다행히 또 다시 전달영 선생님이 담임이라 열심히 가르쳐주셨다. 학교에 호롱불을 가져가서 공부할 때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열성을 다해 악착같이 가르치고 아이들도 잘 따라서 그해 많은 아이들이 읍내 중학교에 합격했다. 그 전해도 문수학교 학생들이 영주 등 읍내에 많이 합격했다. 하서와 영주 중학교 다닐 때 함께 자취도 했다. 이웃집 한철이는 안동중학교에 합격했다. 한철이는 안동에 가까운 집안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안동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무섬사람들은 옛날부터 고등교육은 안동에서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영주에 비해서 교육은 안동이 더 좋은 것 같다. 종가집 옥이도 안동사범학교를 나왔고 큰집에 윤진이도 그 외 여러 집안 아이들이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무래도 안동이 영주보다 학문에는 앞서가는 도시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잘해서 대구나 서울로 유학 시키고 싶었으나 가정 살림살이가 힘들어 포기하고 영주나 안동 고등학교로 가라고하니 여름 방학 때부터 화를 내며 공부를 안했다. 속이 탔다. 만날 한철이 구병이와 바둑을 좋아하고 공부는 안했다.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야단을 치면 대구나 서울로 안가고 영주나 안동으로 고등학교 가면 공부 안 해도 합격할 수 있다고 핑계를 댔다. 자주 야단도 치고 싸우기도 했다. 경이는 울기도 하고 산으로 도망도 갔다. 이 놈아 미국 유학 간 큰집 윤진 형의 똥이나 주셔먹어라 고 심하게 야단도 여러 번 쳤다. 별 소용이 없었다. 

 

                           경이 안동고등학교 시절 사진

 

그러나 안동고등학교에 합격하고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영주와는 또 다른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중학교 때처럼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집에 와서 일요일에 갈 때 쌀 조금 좁쌀이나 보리쌀 채소 된장 장물 고치장 등 싸가서 친구와 자취를 했다. 그때마다 옷도 내가 새로 빨아서 다려주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지 아부지가 돈이 별로 없으니 이년 제인 안동교대나 가서 초등학교 교사하는 게 제일 좋다고 타일렀다. 그런데 옆집 한철이처럼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부자집 아들 따라가면 안 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째진다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고집이 세서 부모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게 안타까웠다.

 

어매 우리 국어담임선생님이 남자는 태어나서 서울로 가고 말 새끼는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낸다고 했어라고 하면서 지도 공부하러 서울 가고 싶다고 한다.

어느 날 국어선생한테 배운 향수란 시를 강가에서 줄줄 외어되는 데 총명하기 그지없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고 한다. 마치 우리 마을 풍경을 읊은 것 같다고 한다.

 

지가 서울로 유학 가서 대학에서 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 할 수없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 1차 연세대에도 2차 외대에도 떨어져서 내려왔다. 사랑어른이 오냐 잘 됐다. 나와 농사나 짓자고 하면서 니 참 착한 효자이데이라고 타이른다. 속으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졌으니 일을 할 수 밖에 없어서 보기 안타까웠다. 한 자식이라도 공부를 해야하는 데. 맏이 삼이는 군대에 갔다. 둘 째 경이 셋째 숙진이 넷째 재현이 모두 일을 하니 사랑어른이 농사짓기가 좀 수월하다고 하신다. 나는 경이 하나라도 대학에 공부하기를 속으로 바랐다.

 

                                                 도리깨로 보리 타작하기

깍지(갈퀴)로 땔감으로 낙엽도 모으고 마당에 보리 타작 후 보리지푸라기도 끌어모은다.

 

경이가 마침 휴가 나온 지 형 삼이하고 낫으로 벤 밀과 보리를 소바리로 지게로 거두어 들어서 땀을 뻘뻘 흐리며 도리깨로 밀 늘보리와 앉은뱅이보리를 타작했다. 타작을 하고는 깍지로 보리짚을 끌어모아 굼불 때거나 쇠죽 끄릴 때 쓴다. 이 깍지는 농촌에서 아주 유용하다. 산에 가서 소나무갈비나 낙엽을 끌어 모을 때도 깍지를 쓴다. 깍지는 끝이 꼬브라진 여러 개의 발을 부챗살처럼 펼쳐 자루와 연결한다. 집집마다 한 두 개씩 다 가지고 있다. 곡식은 멍석에 고무래로 잘 널어놓았다. 햇볕에 곡식을 말려야 한다. 보리 추수도 밀 추수도 손이 여러 번 간다. 보리타작은 한여름이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서 하는데 경이가 보리 까시가 눈에 들어갔다고 야단법석을 친 적이 있다. 일을 잘 못하니 눈에 까시가 들어간다고 형이 놀린다. 한번은 소가 보리 타작을 하는 데 보리쌀을 먹으려다가 눈에 보리 까시가 들어갔다. 연신 눈을 깜박이더니 뒷발을 앞으로 수구려서 발톱으로 눈을 비벼 까시를 꺼내는 것을 경이가 보고서 소리쳐서 모두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농촌에서 소는 사람같이 일하고 함께 사는데 자기 눈에 보리 까시 꺼내는 것도 사람처럼 한다. 참 기특하고 용한 동물이다.

         낫으로 일일이 보리나 밀을 베어야한다. 농촌에서는 집집마다 각종 낫이 여자루씩 가지고 있다.

삼부자가 보리타작을 하니 점심을 좀 맛있게 했다. 시어머님이 이웃 할머니들을 불러서 상을 차려야했다. 다행히 청기서 작은 손아래 시누이가 와서 도와주었다. 사랑어른과 아이들은 사랑방에서 점심을 먹고 시어머님과 이웃 할매들은 안방에서 밥을 드셨다. 더운데 이중으로 밥상을 차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가끔 시어머님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하시는 일이 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짜증을 내며 상을 들고 마루로 오르다가 상을 기웃해서 지름종지와 장물종지가 떨어져 깨지고 아까운 지름과 장물이 정지바닥에 쏟아졌다. 시어머님이 야야 뭐하노 밥은 안 가져 오고 뭐 짜드는 소리만 나노 하신다. 청기서 온 시누이가 어매 걱정 말게 곧 가져가네. 하면서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여 반찬을 더 챙겨서 들고 갔다. 작은 시누이는 눈치도 빠르다.

 

삼이하고 경이가 보리를 팔아보니 비료 값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계산하고는 농사지어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면서 다른 일을 찾아본다고 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일 찾기도 쉽지 않다. 다시 재수 하고 싶다고 한다. 마침 서울로 간 지 큰 이종 사촌 형 응식이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고 하니 상경했다. 나도 지를 데리고 지 이모 댁에 가보니 동대문 근방 창신동 판잣집에 방 두 칸에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다.

 

동대문 근방 창신동 판잣집에 방 두 칸에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다. 경이는 이모댁에 신세를 지고 살아갔다. 그 나마 밤에 허리펴고 누울 곳이 있어 다행이다. 

 

그때 나도 서울에는 처음 가봤다. 영주보다는 건물도 크고 도로도 엄청나게 크고 사람들도 많고 복잡했다. 청량리 역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탈 때 신을 택시 문 밖에 벗어 놓고 타니 경이가 어매 신을 왜 벗는 고 하면서 신을 주어서 택시 안에 넣어준다. 난생 처음 택시를 타니 나도 모르게 신을 벗게 되었다. 형아 집에 도착해서 그 이야기가 나와서 챙피해서 혼이 났다. 형부님도 조카들도 막 웃어대며 이야기를 한다. 이모 댁은 자기가 너무 복잡했다. 그래서 경이는 잠은 독서실에서 자고 밥만 얻어먹고 아이들 셋 가르치며 공부를 했다. 떠나 올 때 경이한테 뜻을 세웠으니 꼭 잡생각 말고 일념(一念)으로 노력하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를 했다.

 

 

그해 또 서울대학을 시험 봤는데 떨어졌다. 다시 잠시 시골 왔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아르바이트로 재수를 또 시작했다. 나중에 지 동생 숙진이와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나중에 외대 노서아어과에 합격했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다.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다닐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다. 우리 집에도 대학생이 있어 자랑스러웠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긴 했지만. 해마다 등록금을 대기 위하여 전지나 소를 팔아야 하는 게 마음 아팠지만 없는 집 농촌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지 동갑내기로는 옆 집 큰 기와집에 사는 부자집 참봉댁의 한철이와 종가댁 옥이가 대학을 다니니 아랫마을의 자랑거리였다.

 

그때 나라는 새 대통령 선거로 어수선했다.

대학 일학년 때 군대 징집영이 나와서 군에 입대했다. 야간열차로 논산 훈련소로 가는 경이가 몸이 약해서 걱정을 많아 하시는 지 사랑어른이 영주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군대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포병교육을 잘 받고 전라도 광주 송정리 포병부대에 근무하게 됐다. 마침 윗마을 해우당 친척인 운한 장군이 포병학교 교장님으로 근무해서 사랑어른이 두 번이나 찾아갔다. 아들이 몸이 약하니 걱정이 되어서다. 복무 중에 휴가를 오며는 며칠이고 방에서 쉬면서 책을 읽는 게 기특했다. 군 복무도중 1973년 마지막 휴가를 와서 지 형 삼이가 죽은 것을 알고 대성통곡을 한다. 앞 집 집안 동생 인(재진)이가 와서 달래고 해서 마음을 잡았다. 이제 갑자기 지가 맏이가 되어서 책임감도 커 진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사랑어른이 맏이가 되었고 조모도 연로하시니 결혼도 하고 농사나 짓자고 한다. 나는 그래도 더 공부시키고 싶어 하니 나한테는 더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맏아들의 혼인

1974년 전라도 송정리 장차 며느리가 될 집에 가서 안 사돈어른을 만나고 혼인을 정했다.

 

이제 맏이가 된 경이는 군 복무를 잘 마치고 다시 대학에 복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아르바이트로 책장사 등을 했다. 등록금을 다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부분을 벌고 잡비도 벌어서 사는 게 기특했다. 방학 때 내려 올 때마다 조모가 살아계실 때 맏 손부를 봐야한다고 하니 사귀던 전라도 처녀를 보러 가자고 해서 경이와 전라도 광주까지 가서 처녀도 보고 사돈댁도 보았다. 가기 전에 처녀의 생년월일과 경이의 생년월일을 적어서 이웃 아지매한테 물어보니 8월 소띠와 2월 쥐띠가 괜찮다고 한다. 건너 마을 사주보는 아지매한테 다시 하번 물어보니 찰떡궁합이라고 한다. 며느리 될 처녀가 소띠니 김씨 가문에 오면 소처럼 열심히 일해서 가문을 일으킬 점괴라고 한다. 다행이다 싶다. 그때만 해도 벌써 풍조가 내가 결혼 할 때와는 많이 바뀌어 저들 끼리 만나 서로 좋으면 가문에 관계없이 연애결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저들 서로 좋으면 됐다. 색시 감이 얌전하고 친절하고 잘 대해주어서 승낙을 하고 왔다. 안사돈은 연신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과년한 딸을 치우게 됐으니, 그러나 처녀의 올케와 오빠는 말은 안 하셨지만 걱정스런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의 신랑감이 아직 학생이니까 그런 것 같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걱정이 많이 된다. 용기를 내어 이웃 게남댁의 도움을 받아서 사돈지를 사돈께 짤막하게 다짐 편지를 보냈다.

 

사돈 부인 전상서

 

지난번에 만나 본 이후 존체 안강 하오신지요.

못난 우리 아들과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사돈 댁 식구들을 만나 뵙고 나니 자식 혼사가 더 믿음이 가옵니다. 따님이 아주 착하고 친절해서 저희는 더없이 기쁘게 생각하옵니다. 우리 아들은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겠으나 이렇게 사위로 받아주셔서 기쁘고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안사돈께서 홀로 25년간 고이 길러 오신 따님을 멀리 출가시키시려 하시니 기쁜 마음보다는 허전한 마음이 더 크실 줄로 생각 되옵니다. 그러나 금지옥엽 길러 오신 따님을 천리 길 경상도 저희 집안에 보내주시기로 결정하셔서 우리 집안 모두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위 될 우리 못난 자식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많지만 따님과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더 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밉습니다. 저들 둘이서 양가 풍습이랑 세상 물정을 더 많이 배우기를 고대해 보옵니다. 둘이서 노력하여 아들 딸 낳아 복되게 잘 살 거라 굳게 믿고 있사옵니다.

어려우신 가운데에도 지난번에 정성껏 마련하여 주신 한과는 너무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저희 또한 넉넉한 형편이 못되어 마음만큼의 정성을 보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그러나 앞으로 따님이 우리 집 맏며느리로서 큰 어려움이 없도록 능력이 닿는 한 노력할 것이오니 사돈께서 그리고 며느리 될 사람의 오라버니와 올케께서도 지금은 혹여라도 섭섭한 마음이 있으시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사돈님 그리고 사돈댁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시도록 항상 빌어마지않겠사옵니다.

장래의 사위될 김 규진의 모 박 명서 올림

 

 

전라도 광주에서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1974년 겨울 둘을 결혼 시켰다. 사랑어른 큰집 고랑골아지뱀 내외분  예안아지뱀 서늘기 아지뱀  큰 고모 한절마 형아하고 지 동생 숙진이 하고 나하고 광주로 예식장에 갔다. 우리 신랑 쪽 하객으로는 지 대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이 몇몇이 왔다. 신부 쪽은 광주에서 오래 살아서 많이 왔다. 첫 아들 결혼은 시켰으나 지가 아직 학생이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며느리 될 새사람이 어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돈도 벌고 해서 학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하는 것이 기특하고 용했다. 속으로는 아이고 이것들이 언제 돈 벌어서 잘 살까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된 며느리를 가마에 태워서 외나무다리를 건너와서 갱변에서 잠시 쉬었다. 

 마당에서 신혼식을 올리고 시어머님 한테 제일 먼저 신부가 절을 한다. 그 다음 사랑어른과 나한테 절을 하고 술을 한잔씩 대접한다.

그 다음 큰집 할매와 고랑골아지매한테 절을 올린다.  왼쪽 2번째 팔장을 끼고 있는 모습이 나 알방석댁이다.             

 춘양에서 오신 아이들 큰고모가 기분이 좋아서 접시를 이고 춤을 춘다.  

광주에서는 예식장에서 현대식으로 결혼 하고 며칠 후 무섬으로 신행 와서 또 옛 식으로 마당에서 꼬꼬재배를 올렸다. 맏딸 결혼식이나, 40여 년 전 시누이나 내 결혼식이나 별 반 차이가 없다. 많은 요식이 간편해졌을 뿐이다. 무섬 동네는 이처럼 장례나 혼인 환갑잔치 등 큰일도 윷놀이 등 노는 풍습도 농사짓는 방식도 많이 변하지 않았다. 구시대와 신시대가 함께하고 구세대 사람들과 신세대들이 함께 살고 있고 옛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

 

아들 결혼 무렵 새마을 운동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었는데 전기불이 들어오고 초가집 마다 각각 앞 모래 갱변 모래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바꾸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때까지 친정 방석이나 무섬동네나 방마다 호롱에 석유를 넣어 등잔 주위 둘러앉아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나무로 만든 초롱은 부엌에 걸어놓고 저녁설거지를 하고. 해마다 짚으로 이엉을 이어 지붕을 잇는 것은 큰 행사고 힘들었는데 시멘트 기와를 올리니 많이 수월해졌다. 볍씨도 개량종이 나오고, 감자 등 여러 농작물 씨앗도 면사무소에서 새 종으로 보급했다. 어떤 때는 새 종자들이 잘 될 때도 있고 잘 안될 때도 있었다. 한번은 통일벼를 권해서 심었더니 웃자라서 나락이 잘 여무지 않았다. 그해도 식량이 부족해서 무척 힘든 한해였다. 그러나 대부분 농토가 물 건너 마을과 골짜기에 있어 아직도 소와 사람의 등으로 농산물을 실어 나르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거름을 실어 나르는 것도 곡식을 수확해서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그리고 나락이나 보리를 빻으러 가는 것도 모두 소등과 사람의 등에 의존했다. 외나무다리를 건거 가야 농사도 짓고 읍내에도 가니 구루마가 쓸모없다. 

 

읍내와 면소재지 주변 농촌에서는 모두 니야까 구르마와 소달구지 또 어떤 집은 벌써 경운기로 실어 나르는데 여기는 여인의 머리와 남정네의 등으로 실어 나른다. 읍내 장에 갈 때 갔다 올 때마다 우리는 이고 지고 간다. 우리 마을은 언제 면소재지나 읍내사람들처럼 저렇게 좀 수월하게 짐을 실어 나르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해봤다. 내가 여기로 시집올 때인 40여 년 전(1933)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방식으로 사는 마을이 가끔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메산골의 삶이 고달프기 그지없다. 시골에서는 아직 누에도 해마다 계속 치고 길쌈도 계속하는 집이 있으나 예전 같이 않다. 손발이 모자라서 그만 둔 집도 많다. 어떤 집은 특수 채소나 과일이나 담배를 심어서 돈을 더 버는 집이 생겨나는 게 옛날과는 좀 달랐다.

아이들은 자라면 대부분 도시로 가벼려서 여름 방학 때 내려와서 지붕을 이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아들들이 농사짓는 집은 그래도 일이 수월했다. 사랑어른만 혼자 하는 것 보다는 자식들과 하는 게 보기도 좋고 힘도 훨씬 덜 들었다. 덜 배운 자식이 더 효도를 한다. 그 이후 언젠가(아마 1979?) 무섬마을에서 머럼 마을로 가는 강위에 시멘트 다리를 놓고나서 마을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마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모양이다. 읍내에서 기얏골에 있는 문수국민학교를 거쳐서 버스도 들어오고 택시도 들어온다. 이동하기가 참 편리해졌다. 우체국 배달부도 자전거로 마을로 들어오니 너무 좋다고 한다. 마을에서도 자전거를 사는 집도 생겨났다. 외나무다리 대신 시멘트 다리 덕분이다.

어느 해 순사가 와서 막걸리 해먹는 것을 조사하고 벌금을 물리고 술을 압수해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나락가리 밑에 나무가리 밑에 숨겼는데도 귀신 같이 찾아낸다.

 

 

 

영주 장보러 가기

 

이제 영주장가기도 편리해졌다. 옛날에는 모두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십리길 문수역까지 걸어서 가서 거기서 기차로 영주 장에 다녔다.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고부터는 이제 장가기도 편하다, 쌀이나 좁쌀이나 콩이나 달걀이나 싸서 버스에 싣고 가니 한결 수월하다. 우리 같은 아낙네들이 영주 장에 제사 장보기나 큰 일이 있으면 생선나부랭이나 사러 장에 간다. 장에 가는 날은 신이 조금 난다. 색다른 것들을 보고 듣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언제나 장에 한번 따라가는 게 소원이라고 애걸하기도 한다. 장터에 가면 쇠고기 국밥도 맛볼 수 있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걸 구경할 수도 있다. 

 

                                                    각설이패

https://youtu.be/0JVHNsDI4PU

 

장터 옆 빈 공터에 딴따라가 흥겹게 노는 모습도 장관이다. 특별히 서커스나 놀이패, 각설이패가 노는 모습도 구경거리이다. 

 

어헐씨구시구 들어간다/ 저헐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라 하지만/ 이래 봬도 정승 판서 자제로/ 팔도 감사를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파 하고 잘한다/ 네 선생이 누구신지/ 날보다도 더 잘하네/ 시전 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도 한다/ 냉수동이나 마셨는지/ 시원시원 잘한다/ 기름동이나 마셨는지/ 미끈미끈 잘한다/ 뜨물통이나 먹었는지/ 걸직걸직 잘한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파 하고 잘한다/ 앉은 고리 동고리/ 선 고리는 문고리 뛰는 고리 개고리/ 다는 고리 귀고리/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파 하고 잘한다

 

 

유랑단이 움막이나 텐트를 쳐놓고 기둥을 엇갈려 세워놓고 줄을 양쪽 끝에 매어놓고 고깔모자와 색옷을 입은 아이와 어른이 줄 타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구성지게 농담을 하는 것도 책에서나 이야기에서 못 보고 못 듣던 것이다. 상스런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의 혼을 빼는 것 같다.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술 냄새를 풍기는 남정네가 뒤에서 밀치기도 한다. 같이 간 이웃 아지매가 기겁을 하고 소리친다. 그나저나 장가서 생선나부랭이를 사거나 해서 돌아오는 길은 즐겁다. 어떤 때는 사랑어른과 함께 갈 때도 있다. 사랑어른은 늘 몇 발자국 앞서서 걸어가신다. 남사시럽다고 같이 걸어 간적이 한 번도 없다.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무거운 보따리를 바꾸어 들고 또 다시 멀찌감치 앞서서 떨어져서 간다.

전쟁 후 영주 장에는 활기가 넘치고 점점 더 많은 물건들이 거래된다. 

옆집 아지매와 장보러 와가지고 여기저기 쏘 댕기면서 시장 구경하는데 자기꺼 사라고  앉아 있는 어떤 중할매가 소리친다. 산나물 파는 중할매가 보이소 요거 사소. 조금밖에 없니더 떠리 이시더. 고거 얼매껴  마카 다 백원이씨더. 할매요 고거 싸주이소.  저거는 뭐이껴 도라진껴 더덕인껴. 요거요. 산나물 뜯다가 캔 더덕이시더. 월매이껴. 요거 한웅큼 이백원만주소. 요거만 파면 오늘 볼장 다봤니더 나도 집에 가서 영감태기 미음이라도 끄래줘야제. 아이고 살기 힘드네. 오늘 마니 팔았니껴. 어데요 다해바짜 육백원도 안되니더. 그래도 생선 한마리하고 미역 좀 살 수있어 다행이제요.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와 이리 힘드는지 내참. 그러게요  또 보시더. 나도 갈라이더 우리 시아버님께 농주 안주로 더덕을 젤 조아하니더. 

 

 

시어머니의 죽음

 

우리 친정어매보다 연세가 조금 아래이신 마음씨도 고우신 시어머님이 3년간 눈이 어두워도 뒷간출입도 잘하셨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고 산다는 옛말 데로 이빨 없이 잇몸으로 진지도 잘 드셨다. 만년에는 해마다 조금씩 여위어 가면서 마지막 생애를 곱게 마감하셨다. 이제 힘이 없어 몸체가 작아져서 겨우 살아가실 때 이웃 어떤 아지매인가 누군가 화란할매요 더 오래 오래 사셔야재요 그래야 증손주들도 보고요 하니까 누가 뭐라카노 나보고 더 살아라카나 아이고 나도 이제 낙엽이 다되었다. 피골이 상접한데 어째 더 오래 살겠노. 낙엽도 시드면 나무에서 떨어져뿌는데 나도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야할 가 보다 하셨다. 오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객지에서 손주들이 오면 목소리를 듣고 누구오냐 하시며 알아본다. 짓궂은 손주 녀석들은 말없이 지 할매 손을 잡으면 누구로 하시면서 어디보자 하고 얼골을 만지시고 야가 숙진이구나 기현이구나 하시면서 알아맞히기를 하신다. 물론 단번에 알아맞히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던 중 을묘년(1975) 86세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님은 우리 친정 어매처럼 나무의 낙엽이 천천히 시들어 떨어지듯이 오래 사시면서 세월의 흐름을 따라 곱게 곱게 늙으셔서 돌아가셨다.

무섬동네는 내가 시집오떤 때 1933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도 옛날 식으로 행상(상여)을 메고 산으로 향했다. 

그래도 시어머님은 천만 다행이었다. 손부를 보고 돌아가셨으니. 아들 경이가 그 전해에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손부가 따뜻한 물을 세수 대야에 가져와서 안방에서 목욕을 시켜드리니 아이고 이게 누구로 새아가라 몇 년 만에 나를 이렇게 씻겨주니 내가 날아갈 것만 같데이하시고 무척 좋아하셨다. 사랑어른도 옆에서 보시고 아이고 이게 웬일이노 새아가 때문에 우리 어매가 모처럼 나도 못해주는 목욕을 하게 됐구나.

옛날에 친정 어매가 돌아가실 때 친정오라버니가 사람은 혼백 (魂魄)이 있어서 죽으면 백은 땅으로 가고 혼은 하늘로 간다고 하셨다. 사십여 풍상을 함께 자면서 살아오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슬픔이 몰아친다. 오래 사시고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셔서 주위에서는 다들 호상이라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슬픔이 복받친다. 옆에 청기서 온 시누이가 함께 울고 함께 상 차리고 해서 위안은 되었다. 옛날 시조모님이나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나 지금이나 장례절차는 비슷하다장례는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가정에서 가장 엄숙한 의례이다. 장례식은 염습 발인 운구 매장 일정한 장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행히 큰집 장조카되시는 고통아지뱀이 외지의 친척, 지인들에게 부고장(訃告狀)을 보내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렀다. 무섬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사랑 창문 밑 마당에 가마니와 볏짚으로 움막을 만들어 사랑어른이 상주로서 문상객을 맞이하셨다.

사랑어른이 혼자 상주로 삼베 도포, 망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집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시면서 조문객을 맞이했다. 상주가 혼자라 더욱 쓸쓸 해보였다.

상주가 혼자라 힘이 드시지만 다행이 청기서 온 이서방이 함께 문상객을 맞이했다. 예의범절은 어릴 때 보도 듣던 데로 옛 도리를 다 지키시느라 무척 힘든 것 같았다. 5일간 영주 안동 예천 봉화 등지에서 수백 명이 문상을 왔다. 다행이 춘양 큰 시누이와 영양 청기 작은 시누이와 이 서방님이 와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슬픔을 함께 해서 보기 좋았다.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20여 년 만에 치루는 상이다. 큰딸 결혼식 큰아들 결혼식 잔치를 하고 맞이한 집안의 가장 큰 행사다. 밤낮없이 음식준비로 바쁘기 정신이 없다. 다행이 일가친척들이 자기 일같이 보살펴주어서 다행이다. 이웃집 큰집 장조카가 시도를 보고 문상객들의 부조를 받고 일일이 한자로 함자와 동네이름을 장부에 기록하고 봉투에 오천원을 넣은 봉투와 담배 한 갑을 문상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무섬의 풍습이다. 사랑방에 마루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문상객들게 일일이 소반에 조졸한 음식과 술 한 잔을 대접한다.

시어머님을 실은 행상이 나가기 전날 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스무 명이 넘는 동네, 이웃동네 젊은 상여꾼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준비를 하였다.

장지는 이웃 마을의 경험많은 지관이 패철을 가지고  와서 사랑어른과 미리 풍수지리 명당을 찾아 산으로 가서 정해놓았다. 우리 시아버님도 지관을 잘 보셨다. 

 

 

                                           

                                                                              패철

상여가 나가는 날은 모든 식구들이 더 슬퍼하며통곡을 한다. 상두꾼이 소리를 하면 상여꾼들이 따라하는 소리가 처량하기도 하고 해학스럽기도 하다. 상여는 아랫동네를 한 바퀴 돌아 띠앗 쪽으로 강옆 산길로 윌미산을 지나 소두리 마을 뒷산 쪽으로 떠나갔다. 상여꾼들의 상여소리만 아련히 들려온다. 소두리 마을 뒷산에 장사를 지냈다. 묘 자리를 파고 관을 내리고 묻고 제사를 지내고 절차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땅을 파고 고를 때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나마 며칠 전에 자리를 닦고 어느 정도 파놓아서 다행이다. 사까레, 곡갱이, 가래를 가져와서 여럿이 판다. 가래 양쪽에 줄을 묶어서 세 사람이 가래질을 하면 좀 수월해 보이나 역시 힘든 일이다. 묘의 봉을 만들기까지 힘이 드니 또 장사 노래를 하면서 가레질을 사까레질을 하면서 일군들이 발로 묘를 다진다. 우리는 묘터 근방에 자리를 펼치고 새참준비를 한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이강건너 저산넘어 어어헤야 어어헤야

세상천지 여러분들 이네한말 들어보소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등잔불에 달은밝고 수십년을 홀로살고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화란할매 슬퍼마소 와란할배 만나니더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빈손으로 태어났다 빈손으로 가는인생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여기이승 사시다가 오늘저승 가시나니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인명또한 재천이라 죽어갈길 서럽구나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이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은공 값을소냐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실낱같이 약한몸에 태산같은 병이들어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오늘아침 성한몸이 저녁나절 병이드니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백년인생 다못하고 이세상을 하직하니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이팔청춘 팔팔하나 바람처럼 왔다가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동지섣달 설한풍에 달은밝고 명랑한데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이세상에 태어나서 산전수전 다겪었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한탄설움 남겨두고 푸른청산 찾아가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초로같은 우리인생 이슬같이 녹는구나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청산노송 산천경계 물건너고 산넘는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앞산뒷산 두견새는 주야장천 슬피운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세월또한 흘러가고 인생또한 늙어가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살아평생 후회말고 먹고놀다 황천가세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잘못먹고 잘못쓰면 늙어서도 후회하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이제가면 못오나니 이세상을 하직하니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잘들사오 잘들살어 살아계신 동네분들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어어헤야

 

https://youtu.be/wrSDyyYXqQY

                                                        무섬마을 상여행렬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두해동안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을 지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상석을 지냈다. 늘 따뜻한 밥 짓고 냉수를 상방에 준비한 제사상에 올리고 곡을 했다. 소상 때나 대상 때 청기 시누이가 오면 함께 더욱 슬피 울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삼년상을 치룰 때까지 정성을 다했다. 언젠가 한번 들에 일하고 늦게 오니 새 며느리가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이 많이 있어서 새로 하지 않고 그대로 제상에 올렸다고 한다. 기가막힐 노릇이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야단을 치고 머리채를 잡고 아궁이에 들어 미는 척했다. 놀란 며느리가 울면서 도망을 갔다. 할 수 없이 늦었지만 다시 밥을 해 올리고 모든 식구들이 아주 늦게 서야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며느리가 가마솥에 밥이 있어도 새로 밥을 지어서 다행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데로 해야 돌아가신 시어머니한데 효를 다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실 가셨다가 사랑어른이 오시더니 며느리를 찾아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해도 며느리가 보이지 않아 걱정을 하신다. 가만두면 집안에 들어올 거라고 하였으나 걱정이 태산인 모양이시다. 아직 시집살이가 낯이 설어 혹 강가에라도 갔을까봐 걱정이시다. 한참을 찾으시다가 뒤안 장독 뒤에서 훌쩍이는 며느리를 찾아 오셨다. 지애비는 공부하러 서울 가고 혼자서 아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너무 야단을 치지말라고 하신다. 가마솥에 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궁이에 불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며느리가 밉지만 할 수 없이 용서해주었다. 사랑어른이 새로 온 며느리 발바닥을 한지에 먹으로 본떠서 송곳으로 부엌 벽에 붙여 노셨다. 아마도 어려움이 있어도 집을 나가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이집에 시집왔을 때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내게도 그렇게 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착실하게 견뎌내는 저 전라도 도시 광주 출신 며느리가 낯 설은 농촌에서 사는 게 애처로워 보였다. 어느 날 영주 장에 갔다 왔더니 마구를 깨끗이 다 치웠다. 그 많은 쇠똥과 젖은 지푸라기들을 쇠스랑이로 마구간 문 앞 마당에 산더미처럼 퍼내 쌓아나았다. 남정네도 하기 힘든 것을 새색시가 한 것을 보고 이웃들이 놀라기도 하고 칭찬이 자자했다. 황소 같은 일 잘하는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우리 며느리가 소띠라서 그런가 보다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밥 잘 못한다고 꾸중을 하니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쉽지만 얼마 후 지 서방하고 함께 살라고 서울로 보냈다.

 

 

 

아들 대학 졸업식

 

 졸업식장에 온 친구들: 조성범  아들 김구병,    아래: 손명곤, 홍승철, 경이와 그의 댁, 유승호

1977 2월 이문동 외대 졸업식에 돌을 맞이한 손자를 안고 가 봤다. 수많은 학생들이 까만 가운을 입고 사각모를 쓰고 운동장에 모여 앉아서 하는 식은 장관이었다. 아마 대학 졸업식에 아들을 데리고 온 학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 3월부터 동화약품에 취직하여 돈을 벌게 되어 천만 다행이었다. 그 때 동화약품 회사에서 첫 출근하는 날 부모를 포함해서 가족 모두를 초청해서 회사와 회사 공장을 구경시켜주고 점심대접도 해주고 선물까지 주었다.  버스를 타고 큰 회사를 구경하기는 난생처음이다. 오래 산 보람이 있는 것 같다. 그 유명한 활명수 회사답다. 우리아들이 공부한 보람이 있어서 참 좋은 회사 다니는 것이 마음 뿌듯했다. 그런대 몇 달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한양대학교 소련 연구소에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알려왔다. 

그래 그 짦은 기간 동안 부채표 활명수 회사에서 뭐 배운 게라도 있나하고 물으니 회사는 아주 큰 회사는 아니지만 교육은 제대로 시켰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가업으로 이끌어 온 회사로 새 직원들 교육 시킬 때 다른 회사직원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야지 남을 망치고 이기기만 하는 것은 안 좋다.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야한다고 사장님이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 하나만 해도 많이 배운 거나 마찬가지라 한다. 오냐 잘 했다.

돈을 벌어야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극복하고잘 살 수 있을 텐데 걱정이 된다. 왜 돈을 못 벌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니까, 어매가 어릴 때 하도 자주 미국유학 간 윤진 형 똥이나 주어먹으라 해서 지도 더 공부해서 유학 가고 싶어서 봉급이 적지만 대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지 댁도 간호보조사로 일해서 돈을 버니까 살아갈 수 있다 고 한다. 기특하나 걱정이다. 지들이 언제 돈을 제대로 벌어서 잘 살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공부하고 싶다니 원 없이 하도록 놔두고 싶다. 미국 유학 간 윤진이 뒤나 따라 갈지 누가 아나. 속으로 무척 걱정은 되지만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아니다 다를까 한양대에 근무하면서 국비유학시험을 본다고 한다. 합격만 되면 진짜로 윤진이 형처럼 유학 갈 것 같으니 꿈만 같았다. 큰 집 윤진이 미국유학 갈 때부터 나도 꿈꾸어왔던 우리아들의 유학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왔다. 대학 입학시험 칠 때에도 하지 않았던 천지신명(天地神明) 님께 빌기도 했다. 합격을 하도록 안마루 기둥 앞에 새벽마다 시어머님이 하시던 것처럼 강가 샘에서 정화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님께 빌었다.

 

셋째 아들 숙진(일진)이도 형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영광중학교 시험은 쳐놓고 아예 발표도 보러가지 않았다. 자식 모두를 공부시키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캥갰다. 그러나 어려서 큰 불평 없이 묵묵히 참으며 몇 해 농사지으면서 읍내에서 영농기술도 좀 배우고 나무 공예도 좀 배우는 게 기특했다. 모두 적성에 안 맞는지 그만두고 지 형이 서울 재수 하러 갈 때 서울 가서 자동차 정비학원 운전 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익혔다. 학교를 못 다니며 공부를 많이 못해도 지 살길을 찾는 게 기특했다. 혼자서 검정고시공부도 해서 영어도 세상물정도 깨우쳤다.

1977년 봄인가 어느 덧 살만 하니 결혼을 곧 하고 싶다고 참하고 건강해 보이는 색시를 데리고 시골로 찾아왔다. 결혼 날짜를 잡고 결혼하기를 고대했다. 다들 자라서 색시를 스스로 찾아오니 옛날 우리네 식으로 선보고 사돈 될 집 찾아가고 하는 복잡한 전통이 필요 없게 되었다. 세월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그렇게 빨리 바뀌는 새 풍습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그저 편리하고 쉬웠으나 앞으로 잘 살아갈지 걱정도 쓸데없이 해보기도 한다. 사주보는 풍습도 점점 사라진다.

넷째 아들 재현이도 중학교를 마치고는 공부가 취미에 맞지 않다고 지 아부지하고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갔다. 큰 형이 된 경이가 대학에 다니니 공부를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다섯째 딸 순둘이는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영주여고를 다녔다. 지 언니가 오래 전에 결혼하고 집안에서 연노하신 할매도 도와주고 집안일도 잘하고 복 덩어리다. 딸이 있으니 나도 집안에서 일이 많이 수월해서 좋다. 집안 일 생각하는 것이 아들 들 하고는 천양지차다.

한참 뒤에 낳은 늦둥이 기현이도 건강하게 잘 자라 영주 중학교에 진학했다. 어린 마음에 아부지 돕고 싶다고 한다. 농사짓는 형들이 아무도 없으니 농림학교에 진학하여 농사를 지어보고 싶어 하니 기특하다. 농사로 대를 이을 건장하게 자란 막내가 자랑스럽다.

 

아이들 다 키우고 시어어님 삼년상을 치루고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니 사설이나 가사 읽기도 힘이 든다. 더 눈이 어두워지기 전에 사랑방 벼루의 붓과 먹으로 한 많은 내 인생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쓰기도 쉽지 않다. 기억력도 사라져 가고 힘도 부족하다. 다행이 숙진이가 테이프로 녹은 한 것을 가져와서 가끔 가사를 노래를 들어보지만 옛날 같이 않다. 모두들 눈이 어두워지니 호롱불 밑에서 책 읽고 글쓰기가 불편하다. 농촌에도 저녁에 할 일이 없으면 모여서 민화토를 즐긴다. 10원짜리 동전을 모두들 한주먹씩 주머니에 넣어서 모인다. 세걸댁은 아직도 총기가 있어 화토놀이도 잘 하고 화토 창가도 잘 한다. 먼저 시작하면 모두들 따라한다.

 

 

자 화토나 치면서 노래나 해보세

 

어절씨구 지화자좋고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정월솔솔 부는바람

이월 매조 맺아 놓고

삼월 살구 산란한 맘

사월 흑싸리 흩어 놓고

오월 난초나부끼고

유월 목단 춤을추네

칠월 홍돼지 홀로누어

팔월공산 달밝은밤

구월국화 굳은 맘

시월 단풍 떨어지니

공산삼십 비삼십은

그 수가 많아서 내가 먹고

오동동추야 달밝은밤에

비 온단말 웬 말이요

어절씨구 지화자좋고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큰집 재종숙질(再從叔姪) 윤진이 이야기

아들 경(규진) 손자 제욱  윤진(삼종질)

우리 집안의 큰 자랑거리이고 무섬의 자랑거리인 우리 큰집의 윤진이 이야기를 쓰고 싶다. 어릴 때 우리 시어른한테 한문도 배우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내한데 자주 와서 이것저것 물었다. 비록 몸이 약하지만 말을 잘 하지 않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깨치는 아이라고 시어른이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재주 또한 남보다 뛰어나고 마음이 착하고 행실이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문수국민학교를 나와서 안동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섬서는 서울대학에 다니는 유일한 청년이다. 방학 때 내려오면 꼭 우리 집에 먼저 들러서 내게 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서울대학교 연필 한 자루씩 노놔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는 사랑방에 있는 천자문을 펼쳐서 훑어보고 다시 천자문을 접어놓고 한참동안 외우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어릴 때 배운 천자문을 외우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총명한지 알만하다. 천재가 따로 없다.

윤진이가 바로 천재다. 그러던 중 중간마을 박씨네 친척 각시하고 결혼했다. 아이 하나를 낳고 미국유학을 혼자서 갔다. 무섬 마을에서 미국유학 간 유일한 청년이다. 이전에 일본에 유학 갔다 온 청년들은 몇 있지만 미국에 간 것은 윤진이가 처음이다. 가기 전에 우리 집에 인사차 들렀다. 몸이 좀 약해서 걱정이 되었다. 부디 객지에 외국에 가면 몸조심하고 열심히 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 하거레이 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서울 가는 길에 먹으라고 쑥떡을 꿀에 발라서 조금 주었다.

우리 경이가 공부 안하면 미국 간 윤진 형 뒤나 따라다니라고 충고하고 꾸지람을 많이 했다. 윤진은 한마디로 무섬의 귀감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박사를 하고 한국으로 오지 않고 캐나다 제약회사로 취직해서 갔다. 나중에 지 댁하고 큰 아들 한형이를 캐나다로 불러갔다. 그때 편지로 지 댁이 비행기타고 캐나다 오는 요령을 깨알 같이 자세히 써 보냈다. 위에는 한글로 쓰고 밑에는 영어로 써서 비행장이나 비행기 안에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승무원이나 공항 근무자들에게 손가락으로 써 놓은 글을 가리키면 영어를 못해도 한국에서 캐나다로 여행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참말로 착실한 윤진이다. 윤진이가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큰집을 통해서 캐나다에서 아이 둘을 더 낳고 훌륭하게 키운다는 소식은 가끔 들었다. 큰아들 한형이와 셋째는 의사가 되고 둘째는 변호사로 키웠다고 한다. 큰집 보갈 아지뱀이 우리 둘 째 윤진이는 그만 캐나다 사람이 된 모양이다, 고향에도 한번 안와서 섭섭하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둘째 큰집 再從第 고랑골 아지뱀

 

어느 날 우리 집의 상일꾼인 암소가 약간 이상했다. 풀도 안 먹고 써준 쇠죽도 잘 안 먹는다. 쑥물을 끓여 먹여도 마찬가지다. 사랑어른이 아이를 시켜 앞집 고랑골 아지뱀을 모시고 오라하신다.

앞집에 사시는 큰 집 고랑골 아지뱀이 오셨다. 고랑골 아지뱀은 농사를 짓지만 읍내 장날은 꼭 소전에 가서 소를 거래하신다. 동네에서 누가 소를 팔거나 사면 꼭 꾸전을 드신다. 앞집은 우리 집 큰집으로 두 분은 재종지간이시다. 고랑골 아지뱀은 힘이 장사시고 건강하시고 술도 잘 드시고 목소리도 우렁차시다.

우리 사랑어른이

어이 이 보게 각규 고랑골이 올 장에 가는가.

예 형님 어째 아침은 자셨니껴.

그래 묵었네 자네도 묵었는가.

예 묵었니더 왜 불렀니껴 뭐 일이 있니껴.

그래 요즘 소끔이 어떤고 마이 올랐는가 맹 똑 같은가.

와요 소 팔아불라꼬요.

워째 며칠째 소가 조께 이상하데이 그만 팔아서 돈도 좀 장만하고 우리 경이 등록금도 줘야하고 소아지 새끼 하나 살라꼬.

예 어디 소 한 번 보시더 워워워 이러이러 어디 좀 보자꼬 이놈의 소새끼야.

고랑골 아지뱀이 소 타래를 잡아서 당기시더니 쇠코뿌리를 잡으시고 주둥이를 위로 쳐드시고 소를 이리저리 자세히 살패보신다.

이빨도 승하고 두 눈에 눈꼽도 별로 없고 괜찮아 보이니더. 뭘 잘못 먹었는가 보이니더. 소장에 가는 길에 읍내에서 동물병병원가서 약 한번 사메기고 소장에 가서 팔아보시더.

소끔이 올라야할텐데 큰일일세. 오르지요 뭐 그키 안오를라꼬요. 두고 보시더 맻시에 출발 할라니껴.

마 옷만 가라입고 가재이 그래 고랑골이 자네도 떠날 채비하게.

예 알았니더 곧 가시더.

 

그래서 두 분이 소를 몰고 이십리길 읍내장터로 떠나가셨다. 소를 파시고는 그날 저녁 무렵 두 분이 술에 취해서 암 송아지 한 마리를 몰고 오셨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고랑골 아지뱀은 소파는 사람이나 소 사는 사람 다 흡족하게 하는 말쏨씨가 좋다고 한다.

 

 

옆집 참봉댁 석포 어른

 

이웃집 석포 어른이 어디 윗마나 기얏골에서 해우당 우산어른과 술 한 잔 자시면 집에 오시는 길에 꼭 우리 집에 들리신다. 마을에서 우리 사랑어른 등 대부분 갓을 쓰고 바깥출입을 하시고 다녔지만 석포어른과 우산어른은 신식으로 나까오리 모자를 쓰고 다녔다. 소문에 의하면 두 어른이 기얏고 술도가에서 소리치며 취하시도록 마셔도 꼿꼿하게 앉아서 두루마기에 술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으신다고 무섬 양반이 다르시다고 한다. 석포 어른(위진 씨)은 우리사랑 어른의 집안 조카뻘 되시고 연세가 좀 아래다. 그분은 동네에서 유일한 인텔리시다. 일제 때 일본유학까지 갔다 오셨다. 마을에서 제일 부자 참봉댁 자손이라 한국일보도 보시고 8남매 아이들 키우며 술을 즐기시고 바깥출입을 하신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시고 일군을 부려서 농사를 지신다. 일만하시는 우리 사랑어른하고는 다르시다.  집 맞 아들 한철이하고 우리 집 둘째 아들 경이 하고 죽마고우(竹馬故友)로 학교를 같이 다니는 무자(戊子)생 동갑내기다. 둘운 불알친구다. 석포어른이 도착하시면서 큰소리를 지르신다. 술 한잔하시면 뭐가 그리 좋으신지 왁자찌껄하다. 아랫동네가 다 시끄러울 지경이다.

방석아재 집에 계시니껴 방석아재요. 아 예 방석 아지매껴 참꽃 막걸리 있으면 한잔 주이소 방석아지매 막걸리가 무섬동네에서 제일 맛 있니더.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안경을 벗어 닦으신다. 우리 사랑어른이 뒤안에서 나오신다.

석포 왔는가 또 한잔 했구멍.

방석 아재요 술 있으면 한잔 하시더.

술이 있나 물어보재 경아. 가서 한철이 오라케라.

경이가 쫓아가서 할철이를 불러오면 석포어른은 둘을 앉혀 놓고 일장 연설을 해대신다. 일본말도 몇 마디 하시고 영어도 몇 마디 하신다. 일본 노래도 하신다. 나중에 경이한테 물어보니 Boys, be ambitious. 란 말로 소년들아 야망을 가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 호카이도 고등학교에서 클라크 미국교수가 일본을 떠날 때 일본 젊은이들한테 한 말씀이라고 술만 드시면 둘을 앉혀놓고 말씀하시는 걸 여러 번 보고 들었다. 석포어른의 아들 한철이와 경이가 야망을 가지길 바라는 말씀이다. 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기특하다. 가끔 또 둘을 앉혀놓고 붓글씨를 누가 더 잘 쓰나하고 바라보신다. 석포어른은 술 한 잔 드시면 호탕하게 이야기하시면서 무척 즐거워하신다. 아이들이 술 취한 소리에 두려워하면서도 뭔가를 배우고 깨우치기를 바래본다. 술을 한두 잔 하시고는 일어서신다.

한철아 이자 밥 먹으로 그만가자. 니 애미 집에 있나.

벌써 갈라꼬 왜 더 노다 가지.

저녁이 되니 쇠죽도 끄래줘야하고 우리도 밥도 먹어야재요 방석아재네도 저녁 드셔야재요.

그럼 그만 살펴 가게이.

예 잘 이쓰소 한철아 그만 가제이.

석포어른이 가시면 아래동네에도 조용해진다. 석포댁은 일찍이 딸 하나를 낳고 저세상에 갔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으로 평은 금광이 동네에서 참한 색시가 와서 아들 일곱을 낳았다. 그 집 맏아들 한철이하고 우리 맏이 경이는 동갑이고 또 그 집 막내 일곱 번째 아들 우북(한일)이는 우리 늦둥이 기현이와 동갑이다.

 

 

<상동이네> <문한이네>

 

무섬에는 주로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세세대대로 살아왔다. 물론 마을의 궂은일을 하는 일군들인 타성 가족이 몇 있었다. 우리 아들 경이에게 어릴 때 젖 동양을 준 문한 애미도 살았다. 과부로 두 아들과 살면서 동네 궂은일을 도와주고 농사를 조금 짓고 살았다. 나중에 아이들이 크니까 도회로 가버렸다. 참 불쌍한 과부였으나 마음씨 하나는 착했다. 문한이가 아랫마을 강에 홍수가 난 이후 띠앗 물 나들목에 깊은 소가 진 곳에서 경이와 옆집 한철이가 목욕하다고 물에 빠진 것을 문한이가 건져 주었다. 생명의 은인이다. 경이는 문한이가 깊은 소에서 메기 뱀장어 자라 등을 잡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따라다녔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가 살까 고향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어릴 때 아픈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말은 안했지만 그들은 종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버전 댁 아래 채 온갖 궂은일을 하는 상동이네 가족이 살았다.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과 문수국민학교에 함께 다니고 잘 어울려 놀았다. 그 집 막내 용이는 우리 숙진(일진)이하고 국민학교 동창이라 잘 어울려 놀았다. 비록 부모는 양반이 아니고 종이나 다름없었지만 동네 오만가지 큰일이나 궂은일을 하는 머섬 노릇을 하고 살아갔지만. 상동이 댁도 일도 잘하고 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들도 아이들이 다 자리니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 떠나간 이후 아이들이 한 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 아이들도 아마 어릴 때 아픈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 외 가끔 타성 가족이 잠시 와서 머물다 가곤했다. 한번은 어떤 과부와 다 큰 아들이 와서 살았다. 아들은 가끔 읍내에 출입하고 과부혼자 살았다. 우리 사랑양반하고 마을 어른들이 자주 그 집에 가서 술도 팔아주고 놀았다. 보기가 흉했다. 그러나 무섬은 양반동네라 누구 하나 아낙네들이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여기는 남자들의 세계이고 남존여비사상과 부창부수 사상이 지배하는 풍습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장터에서 그 집 아들을 만나서 자초지정을 이야기 했다. 그 아들이 지 어매가 무섬 양반 동네에서 남자들의 노리개 감이 돼고 여자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날 어매를 데려가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안동하회마을에서는 종들이 양반들을 탈춤으로 놀리는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고 바깥출입이 잦은 이웃 어른들이 말해준다. 또 양반들 집에서 종이 밥을 먹는데 주인 양반은 쌀밥을 먹고 종은 보리밥만을 준다. 하루는 주인마님이 종에게 밥을 주는데 보리밥에 쌀밥 한 알이 섞여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종은 그 쌀밥퇴기 하나를 밥상 위 천정에 매달고는 너 어떻게 양반이 쌍놈한테 왔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회초리질을 하였다. 종이 자기 방에서 밥을 먹으며 중얼거리는 것을 양반이 보고 기가 막혀서 나중에는 조금씩 쌀밥을 섞어서 주게 됐다는 이야기를 시어머니가 해 준 적이 있다. 우리 사랑어른은 종이라도 반드시 사람대접을 해주어야한다고 하고 아이들 보고 어른 종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한번은 한철이하고 우리 경이가 버전댁에 세배 갔다가 나오면서 문간방에 사는 상동 어른한테 들러서 세배를 하고 왔다. 둘은 고등학교를 다니니 현대식 교육을 받아 인간은 다 동등하다고 배워서 비록 그들이 양반은 아니지만 어른으로 생각하고 그리한 것 같다. 그런데 마을의 고지식한 어른들이 상놈한테 절을 했다고 떠들썩한 적이 있다. 세월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는데 이 산골짜기 양반 동네에서는 아직도 그런 엣 풍습에 젖어 있는 어른들이 있다.

 

 끝

 

 

부록:  알방석댁 이야기, 자녀들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글

 

1.불효여식 때문에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다.

 

첫째, 딸 둘매(진옥 鎭玉)

 

남동생 경(규진)이가 어머니에 대한 책을 낸다고 어머니를 그리는 글을 써 보내라 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연필을 잡았다. 어머니한테 아래한글을 좀 배웠는데 붓으로 쓸까 하다가 노트 장에 연필로 두서없이 몇 자 적어보았다. 막상 연필을 잡으니 무슨 생각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가 다 소실되어 아쉽다. 편지가 있으면 그걸로 대체해도 의미가 있을 텐데. 내가 맏딸이라 할머니가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이 컸지만 살림살이에는 무척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어릴 때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다른 아들들 보다는 어머니 속을 덜 썩이고 어머니와 더 자주 부엌이나 길쌈할 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어머니는 말할 때 마다 꼭 사자성어를 쓰시면서 말을 시작한다. 너무 서두르면 천리길 도 한걸음부터라고 차곡차곡해야 한데이.” 하셨다. 사필귀정이라고 뭐든지 바른 마음으로 해야 일이 잘 풀어진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학교는 문턱에도 못 가보셨지만, 초등학교를 나온 나보다도 더 자주 더 많은 사자성어를 쓰셨다. 아마 사자성어를 잘 구사하신 할배한테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기도 하고, 무섬마을에서 가사를 아주 잘 하시는 두월아지매, 버전아지매, 뒤세아지매, 게남아지매 한데 가사를 배우고 사돈지, 편지 쓰는 것을 배워서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또 윷놀이 할 때 보면 윷말을 쓰는 책임자가 되어서 윷말을 다 외워서 윷말을 잘 쓰셨다. 무섬 시골에서는 정월달에 윷놀이를 자주 했는데 모두 공중 윷말만 썼다. 또 어머니는 여러 가지에 대해서 호기심이 남달라 이것저것 책을 읽고 배우기를 좋아하셨다. 글도 깨우쳐서 가사도 즐겨 외웠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를 알방석댁이라 부르고 팔방미인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어머니는 무척 예쁘셨다.

 

어머니의 앉은뱅이 미싱

 

할머니와 어머니와 나는 해마다 열심히 누에를 길러 명주도 하고 아부지가 재배한 삼으로 배도 짰다. 우리 집에는 배틀과 명주 배틀이 두 개나 있었다. 아부지가 목화도 많이 심어 무명도 짰다. 어머니는 무명을 짜서 내가 결혼할 때 자우세이불(누비이불)을 만들어주셨다. 한두 해 짠 명주 15필을 팔아서 머럼 원적골에 있는 큰집 논빼미 5마지기 를 사려고 흥정까지 했다. 그런데 그 동네 아랫것들이 돈을 조금 더 준다고 해서 그만 놓쳐버렸다. 어머니는 큰집의 그런 태도에 무척 못마땅해 하고 아쉬워했다. 우리는 논이 적어서 늘 이밥(쌀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듯이 논 사는 대신 어머니는 할배께 논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사시자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우선 그 돈으로 안동에 가서 앉은뱅이 미싱(손재봉틀)을 사왔다. 어머니는 앉은뱅이 미싱으로 뚝딱하면 옷을 한 벌 만드시곤 했다. 미싱으로 식

구들과 동네사람뿐만 아니라 이웃동네 사람들에게도 옷을 만들어주고 돈도 벌고 곡식도 받기도 했다. 어머니는 농사 하나만 지으시는 아부지와는 달리 농사도 짓고 길쌈도 하시고 미싱으로 옷도 잘 만들어 팔았다. 돈을 벌어서 나중에 다른 논과 밭도 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방 이후 큰집 논밭을 붙여먹고 살았는데 나라에서 토지개혁을 하면서 소작농이 원래 붙여 먹던 논밭을 신고하고 세금만 조금 내면 우리 논밭이 된다고 이웃 게일아재가 적극 권했다. 그런데 할배는 큰집 논밭을 그렇게 빼앗아 오면 경우가 옳지 않다고 해서 나중에 다 돌려

주셨다. 다른 이웃들은 나라가 정해주었다고 그렇게 한 집도 더러 있다. 그런데 그런 집들이 나중에 별로 잘 살지도 못했다. 할배 말대로 아마 경우와 도리에 어긋나서 그런 같기도 한다.

 

 

8번째 막내아들을 일을 하시다 낳으셨다.

 

몇 년도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음력 421일 날 우리 막내 기현이 출생 날이 생각난다. 아침을 먹고 모두 마당에서 명주 길쌈을 내고 있었다. 몇 달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와 내가 명주 배틀로 짠 명주에 풀을매기고 큰 틀에 늘여뜨려서 솔로 잘 다듬어야 한다. 그동안 할머니,

양 고모, 어머니와 내가 명주 내느라 바삐 시간을 보내는데 어머니가 10시쯤 되어서 배가 아프다고 방에 들어가셨다. 할머니가 배가 부른 어머니가 걱정이 돼서 따라 들어가셨다. 야들아! 니 어미가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 어서 준비해라. 물을 끓이고 새 천을 가져 온나. 준비

를 서둘러라.”고 소리치셨다. 나는 준비를 하면서도 또 남동생이 생겨서 딸인 나만 더욱 죽도록 고생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아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밉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시골 무섬마을에서 산파역할을 하셨다. 우리 8남매 다 받아내시고, 이웃집 참봉댁 71녀 아이들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고모는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얼른 방으로 가시고 나는 부엌에 가서 물을 끓였다. 어머니는 곧 8번째로 아들을 또 순산했다. 그때 어머니 연세가 45세인가 되었다. 우리 집 막내가 또 아들이라고 할머니가 무척 좋아하셨다. 정신없이 물을 끓이고 출산 준비하고, 미역국 끓이고 새로 밥을 했다. 그러고 나서 하던 명주 길쌈을 할머니랑, 고모랑 마쳤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일을 하던 중에 아이 여덟을 낳으셨다. 나의 경우는 들에서 일하다가 태기가 와서 황급히 집에 오자마자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부르는 내 이름이 둘매(들매)였다. 어머니는 일평생을 아이 낳는 날도 편히 쉴 시간이 없이 바삐 일생을 사셨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 무척 고생하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비록 이웃들이 알부자알방석댁이니 불렀지만, 돈 벌려고 그렇게 애쓰셨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고 회갑을 얼마 앞두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막내가 태어나자 3주 동안 금줄을 대문에 걸어두었다. 삼칠이 지나자, 윗마을 해우당네 우산 아지매(필영 모친)가 내려와서 우리 막내를 보고 나무 귀엽다고 발가락을 만지면서 아이고 방석 아지매는 워째 그렇게 아들도 잘 낳니껴?” 하면서 부러워했다. 그 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였다. 어느 날 아직 어린 막내 기현이를 내게 맡기고 어머니는 영주 장에 갔다 오셨다. 아이는 하루 종일 배가 고파 울어대서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영주 장에 갔다 와서 퉁퉁 부른 젖을 손으로 웃물을 좀 짜버리고 아이 입에 갔다 물리니 두 손으로 잡고 젖을 실컷 먹고는 쌕쌕 잠이 들었다. 아기가 울지 않고 잠 잘 때가 제일 귀여웠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리고 그 옛날 언젠가 연도도, 날짜도 기억나지 않지만 5월 달이었다. 한창 모내기로 바쁜 계절이었다. 어머니가 물 건너 놀기미 논에서 모내기하는 일꾼들을 위해서 점심을 머리에 이고 물을 건너다가 넘어져서 밥이랑 반찬이랑 못 먹게 되었다. 집으로 가져와서 개와 돼지 밥

으로 주었다. 그날은 개와 돼지는 아주 좋은 밥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부리나케 나는 엄마와 더불어서 다시 점심과 반찬을 준비해서 들에 가져갔다. 아부지가 왜 이리 점심이 늦었노?” 하셨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다가 늦었다고만 했다. 이래저래 고생이 말이 아

니었다. 어머니 인생에 풍파가 그칠 날이 없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이 자식들이 많으니 늘 온갖 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하시면서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를 때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따듯한 밥을 해서 상석에 차리고 슬피 우셨다. 하도 슬피 우는 모습이 어머니가 제 정신이 아니신 것 같아 건강이 걱정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몇 년도 인지 기억이 안 나는 데 할머니 소상 때 고향 무섬에 가서 네 살 박이 내 아들 동직이를 어머니한데 맡겼다. 어머니는 맡 외손자를 친손자 보다 먼저 보셔서 무척 좋아하셨다. 며칠 후 셋째 일진이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어서 어머니가 동직이를 데리고 영덕으로 오셨

다가 곧 바로 무섬으로 돌아가셨다.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시고 밥도 제대로 안 드시고 무리해서 통근열차로 무섬에 가셨다. 어머니는 늘 우리 자식들한테는 밥은 꼭 챙겨 먹으라고 하시면서 막상 어머니 자신은 대충 먹고 다니셨다. 그 길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뇌막염이 다시 도져서 의식을 잃으셨다. 마침 시골에 있던 동생 재현이하고 순둘이가 어머니를 영주 순창병원에 택시로 모시고 갔다. 순창병원에 근무하는 친척 백이 어른이 보시고 가망성이 없으니 안동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다시 택시로 가는 도중 평은 쯤에서 의식이 거의 없어서 무섬으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이튿날 어머니 부고를 받았다. 그 이후 3여 년 간 어머니 없는 삶이 너무 슬퍼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잊으려 해도 잘 잊혀 지지가 않았다.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하고 걱정을 많이 해서 머리가 아프셨다

는 것을 생각하니 불효자식으로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일만하시다가 일찍 저 세상으로 가신 우리 어메를 추억하며

여섯 째 딸 순둘(鎭姬)

 

우리 어메는 1917년에 이웃마을 방석서 태어나셔서 16살에 무섬으로 시집오셔서 1977년 환갑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무섬서 언니 한 명, 오빠 4, 나 그리고 남동생 한명, 모두 7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일생동안 아이들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시고 1977년 돌아가실 때가지 가난을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하시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연도?) 언니 일로 충격을 받으신 우리 어메는 머리가 아프시다 며 쓰러지셔서 영주 순창병원에 입원하셨다. 한 보름 입원치료 받고 퇴원하셨다. 그 동안 커다란 가마솥에 밥하고 국 끓이는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이웃집 내 친구 순이 어머님(의인 아지매)이 오셔서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 걸 보고는 아이구 야야 어린 네가 어찌 그 큰 솥에 밥을 다 하노 하시며 기특해하셨다.

우리 어메는 늘 머리가 아프시다 며 하얀 가루약 뇌신을 자주 드셨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3학년 때(1974) 큰 오빠(삼이 오빠)일로 충격을 받으셔서 또 쓰러지셨다. 그때는 안동 도립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다. 그 이후 어메는 시간 나면 버전형님 집에 모여 자주 하투놀이를 하셨다. 충격 받은 일을 잊고 싶어 하신 것 같았다. 그전에는 겨울 밤에 가사도 읊으시고 붓으로 가사도 베껴 쓰시곤 했다.

우리 어메는 늘 일에 바빠서 좋아하시는 적()을 구우실 시간도 없어 내가 중, 고등학교 때 영주서 자치하다가 토요일 오후에 집에 오면, 야야 순둘아 풍로로 숯불 피워서 솥뚜껑에 적 좀 부처다고 하신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적을 타지 않게 잘 구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든 해(1977)에 어메는 또 쓰러지셨다. 영주 순창 병원에 택시로 갔더니 안 된다고 안동으로 가리고 했다. 넷째 재현 오빠와 택시로 안동으로 출발했다. 평은 쯤 갔을 때 내가 오빠한테 애기했다. 오빠 그만 무섬 집으로 돌아가요, 아무래도 어메가 의식도 전혀 없고, 숨도 제대로 못 쉬시니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안동 가기 전에 차에서 돌아가실 것 같아요. 그래서 오빠와 나는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집에 돌아 온 후 몇 분 후에 어메가 44여년 사시면서 자녀 일곱을 낳으신 안방에서 숨을 거두셨다. 곧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어메 없는 농촌 생활

 

그 때부터 어메 자리는 내가 채웠다.

, 빨래 등 아부지 수발을 내가 도맡아 했다. 들일도 도와야 했다. 그때 동네 형님들 아지매들이 아랫마을에 삽짝(?)이 없어 진듯하다 며 다들 우리 어메의 죽음을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난 일년 정도 어메 생각 때문에 슬픈 나날을 보냈다. 여름에는 홀로 강변에 누워 동요와 가곡을 부르며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강가에 앉아서 강을 건너가는 어메 행상을 보면서 아부지나, 나나, 내 동생 기현이 셋 중에서 누구 하나 죽어서 어메하고 같이 갔더라면 어메가 외롭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메는 (1958? 40)에 나를 낳았다. 내가 철이 들 무렵 동네 사람들이 나한테 니가 막내 할래 하고 물으면 난 안해요 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막내란 소리가 어린 내겐 방매이(방망이) 할래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메가 45세에 내보다 다섯 살 아래인 기현이를 낳았다. 위로 딸 하나 아들 넷을 낳았는데도 할메는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고 섭섭해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또 아들을 낳았으니 집안에 큰 경사가 난 것이다. 난 음양이 바뀌어서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 성격이 가만히 있으면 여자 같지만, 일 추진력은 남자 못지않을 때도 있다. 내 성격이 꼭 지 어메 닮았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한다. 어메는 모든 것에 적극적이었고 억척 같이 일을 하셨다.

우리 어메는 가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 하시고 또 남의 은혜는 꼭 갚아야 한다, 고 자주 말씀 하셨다.

중학교 3학 때(1974?)부터 친구 따라 다니던 성당을 7년간 열심히 나갔다. 그때 수녀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어린이 반 교사도 했다. 그래서 어메 한데 난 수녀가 되고 싶은데 하니까 그럼 난 딸 재미를 못 보겠네 하셨다.

요즘 생각하면 수녀가 안 되기를 잘 한 것 같기도 하다. 열이 많은 나는 머리에 수선이나 모자를 쓸 수가 없어서다.

어메 돌아가신 후 꿈에서는 늘 살아생전의 모습이 보였다. 헤진 러닝셔츠를 입은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어메가 돌아가시고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메가 그믐에 나타나서 나 이제 사무직에 취직해서 간다고 하시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다시는 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내 슬픔도 끝났다.

 

난 일찍이 세 죽음을 목격했다.

 

3(1974) 큰 오빠, 1(1975) 할메, 고등학교 졸업 때(1977) 어메, 이렇게 3년 사이로 세 죽음을 본 것이다. 연세가 많아서 천천히 늙어 가신 할메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서 잠을 주무시다가 가셨기에 충격이 크지 않았다. 할메는 늦게 눈이 좀 어두워져서 내가 화장실에 모시고 가고, 담뱃불도 붙여드렸다. 세숫물도 방에 떠드렸다. 할메를 도와주는 일도 많았다. 우리 할메는 부처님 같으신 분이었다. 할메는 내게 열녀 이야기를 자주해 주셨다.

학교 다닐 때 겨울에 서리가 내려 뽀얀 외나무다리 건너가다가 미끄러져 물에 빠져 집으로 돌아오면, 야야 순둘아 추운데 학교 그만 가고 쉬라고 하셨다. 나는 추운 날 학교 안가고 할메 덕택에 할메 옆 아랫목에 쉬는 것이 너무 좋았다.

식사할 때는 할메는 아부지와 겸상을 하셨다. 자주 아부지는 식사를 하시면서 할메에게 뭔가 불평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할메는 아부지 말씀에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으시고 묵묵히 밥만 드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메는 대단한 인내심을 지닌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둥근 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아부지는 그때 유난히 큰 오빠한테 불만이 많으셨다. 밥을 먹는 중에 야단을 치시면 큰 오빠는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안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면 아부지가 저 빌어먹을 놈 문 닫는 꼬라지 봐라 라고 소리를 치셨다. 모두들 눈치를 살피며 긴장한 가운데 밥을 빨리 먹었다.

우리는 어릴 때 문을 반드시 소리 안 나게 조심해서 잘 닫아야 했다. 우리 아부지는 남 한데는 성인군자이셨다. 늘 남을 도와주시길 좋아하시고, 좋은 말을 해주시고 칭찬을 하셨다. 그런데 우리 한데는 상 호랑이셨다. 조금만 잘못하면 곧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랑방 문설주 위에는 늘 가느다란 싸리나무나 뽕나무 회초리가 준비되어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종아리를 맞곤 했다. 난 말을 잘 들어서 별로 맞지 않았지만. 내 바로 위 재현이 오빠는 자주 맞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섯 살 적은 내 동생과 자주 싸운다고 야단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되면 옆집 순이와 앞 강물에 가서 살았는데 아부지가 보시면 바로 불러 드렸다. 친구들과 놀 때면 꼭 불러서 집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놀 때 친구들이 우리 아부지를 먼저 보면 야 순둘아 네 아부지다, 빨리 숨어라, 고 하면 나는 얼른 숨어 있어야, 친구들과 다시 좀 더 놀 수가 있었다.

자주 소를 몰고 들로 가서 소 풀을 뜯게하거나, 고추를 따거나 했다. 어메가 돌아가시고 아부지와 둘이서 농사를 지었다. 그때 나는 모도 심어보고, 깨밭에서 깨 벌레도 잡아보고, 고추 밭을 갈면 내가 소처럼 훅지(쟁기)를 당기면, 아부지가 뒤에서 조정을 하셨다. 깨 벌레는 나무젓가락으로 집어서 깡통에 담아야하는데 징그러워서 잡기가 무척 싫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깨 벌레 잡는 일이 제일하기 싫었다.

한번은 띠앗 밭에서 고추를 따서 나 혼자 미리 집에 가라고 하시면서 한보따리 머리에 얹어주셨다. 물을 건너 집에 와서 하도 피로해서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런데 너무 무거운 것을 오래 이고 와서 목이 이상하게 아팠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목을 좌우로 흔들어 운동을 하면서 목을 풀었다. 그 이후 허리가 자주 아파서 영주 기독교 병원에서 엑스레이(X ray)를 찍어보았더니 척추 뼈 두 마디가 디스크라고 했다. 그때 의사가 무거운 것을 들거나 머리에 이지 말고, 빨래 같은 거 앉아서 오래 하지 말고 시간 나면 무릎을 세우고 똑바로 누워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주 누워서 책을 보거나 뜨개질도 누워서 했다. 그래서인지 디스크는 자연치료가 되었다. 다행이다.

우리 어메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영덕 언니 어린 아들 동직이를 좀 데리고 있었다. 일진이 오빠 결혼식이 날자가 잡혀서 동직이를 언니 집에 데려다 주고 승문역에 서는 통학 기차를 타고 오셨다. 그때 나도 노트리 쪽으로 물을 건너오는 데 앞에 가시던 어메가 자꾸만 아이구 머리야 머리야 하셨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영주 병원에 가셨다가 다시 안동병원으로 가시다가 희망이 없어 집으로 돌아와서 곧 돌아가셨다. 신경이 예민한 어메가 외손자 보느라 신경을 쓰시고, 돈도 없는데 둘째 아들 장가도 보내야 하는 등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일찍 돌아가신 게 더 좋았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생이 끝이 없고, 더 힘들고, 가슴 아픈 일 안 봐도 되니까.

그 이후 난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은 어찌 보면 고생의 끝이니까. 내가 지옥이 아닌 천국이나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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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들, 숙진(일진)이가 쓴 인생추억담 1.

1960년대 어머니 이야기

 

우리 집은 60년대 암퇘지 한 마리를 꼭 먹이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소나. 돼지등 가축이 없는 이웃집에 가서 음식 찌꺼기와 쌀뜬물을 가져오곤 했다. 온 동네 집들을 다니면서 가지고 온 쌀뜬물에 당가루(당겨), 쌀겨, 보리겨를 타서 암퇘지에 주고는 했다. 지극한 정성으로 키우니 우리 집 돼지는 새끼를 잘도 놓고, 보통 10-12마리까지 놓을 때도 있었다. 열 마리가 넘는 돼지새끼들이 누워있는 어미돼지 젖을 물고 빠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우리는 냄새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돼지우리에 매달려 구경하고 소리치곤 했다. 한 달 보름 정도 키워서 영주장날 어머니는 머리에 한 마리를 다레끼(망태기)에 비닐 종이를 깔구 이고, 나는 다래끼에 두 마리를 짊어지고 가는데 등받이에는 비닐을 대고 영주장날 가곤 했다. 돼지 새끼가 오줌 싸면 바지와 신발이 젖고 냄새가 나고 해서 무척 힘들었다. 무섬에서 영주역전 앞 돼지 판매장 까지는 12킬로를 아침 일찍 걸어서 가서 10, 11시경 도착해야 팔수가 있다. 아침밥은 먹는지 마는지 허둥지둥 한 달에 몇 번이고 팔로 간다. 그 당시 점심으로 자장면 한 그룻 사준다구 징징 거리면서도 가야했다.

철길 따라 가는데 부산에서 청량리 가는 열차가 오면 옆으로 비켜서다가 또 가구 하는데 어머니에게 문수역에서 열차타구 가지구 때를 쓰기도 하지만 소용없다. 열 차비를 아끼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짐승은 열차에 태워주지 안은 것이 보통이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열차 안 탄다구 간다고 징징 거리고 어머니는 듣는지 마는지 먼저종종 걸음을 하구 간다. 나는 무조건 뒤따라가야 했다. 돼지새끼 판돈으로 할머니 반찬으로 고등어 한손사구 쌀이 귀한 시절이라 가족 양식으로 밀가루 한 포대, 틀국수, 광목, 옥양목, 바지, 저고리 만들 옷감 등등을 사서 걸어서 무섬까지 온다.

점심으로는 중국집에서 그 당시 5-10(?)인가 자장면 한 그룻 정말 맛있어서 돼지새끼 지고 온 것도 힘든 것도 잊고 먹은 거다. 집으로 오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제일 싸구 양이 많은 눈깔사탕 한 개와 알롱달롱 한 과자 한 봉지를 사서주면 맛있게 먹으면서 무섬까지 오곤 했다. 영주 장보고 같이 오는 광택 씨랑 동래 아주머니 세걸아지매 등등. 바지에 돼지 오줌 묻은 것을 보고는 너 오줌 싼 거지 하구 놀리기도 한다. 등에 업고 간 돼지 오줌이 흘러서 그런 것인데도. 그래서 나는 다음 장날은 안 간다구 어머니께 때를 쓴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번만 더 가자구 달랜다. 두서너 번 5-6마리를 팔구 나면, 나머지는 동래 이집 저집 싸게 팔기도 한다.

한번은 새끼 놓은 어미 돼지가 배가 고파서 네모 모양의 나무로 지어놓은 돼지우리 밑을 파구 나와 우리 집 아래쪽에 있는 박 씨촌의 어른네 보리밭에 어미돼지가 들어가서 보리를 뜯어 먹고 밭을 망쳐놓았다. 이를 본 도기촌 어른이 도끼로 우리 새끼가 딸린 어미돼지 뒷다리를 찍어서 우리는 어미 돼지를 잡아, 이웃에 팔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하고 우리도 먹어야했다. 박씨 어른은 오래 전에 고인이 됐지만 그 당시 우리 철부지한테는 무서운 할아버지였고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 새끼 돼지가 8마리나 있는데 약 한 달도 안 된 터라, 어미돼지 없이 어머니가 밀가루, 쌀가루 죽을 써서 새끼 돼지를 키우는데 너무 힘들어 하시는 게 눈에 선하다. 그러나 돼지를 다 팔면 꽤나 돈도 많이 벌었다. 밤이 되면 어린 새끼 돼지들이 어미를 찾아 꿀꿀 많이 울기도 해서, 할머니가 박씨 할배 댁에 가서 항의도 하구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 돼지가 남의 밭을 망가뜨렸으니 당연한 일이나, 그러나 돼지 혼자 우리를 탈출해서 저지른 일인데 주인들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 돼지가 잘못이라고 가서 용서를 빌기도 했다. 그 당시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 10개월에서 1년 키워서, 갔다 팔기도 하고, 동네 집안의 환갑이나 결혼 장례 같은 큰 일이 있을 때 잡아먹곤 했다. 우리 누나 시집갈 때도 키우던 돼지를 잡아먹었다. 또 아주 옛날에 한 번은 늑대가 밤에 나타나 돼지우리 밑을 파고 돼지를 몰고 간 적도 있다고 할매가 이야기해준 적도 있다. 늑대들이 우리를 파기 시작하면 돼지가 찍소리 한번 못 지르고 가만히 있다가 늑대 두 마리가 산으로 몰고 가면 순순히 앞장서서 갔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피던 아주 옛날이 아니라 할머니가 무섬시집 와서 살 때였으니 6.25. 한국전쟁 전의 일이라고 한다. 전쟁 이후는 늑대가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한다. 전쟁 통에 사람만 많이 죽은 게 아니라 산짐승, 들짐승들도 많이 희생된 가보다.

우리 외할머니 이야기

우리 어머님이 조밥이 먹기 싫어 매일저녁 마다 굶고 자는데, 배에서 꼬르룩 소리가 나면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조당수(차좁쌀) 죽을 끌려서 먹이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너무 가난한 집이라 소나무 껍질을 베껴서 싸레기() 가루를 조금 넣고 떡을 해서 먹던 시절이다. 그러면 뚱구영(똥구멍)이 막혀서 손가락으로 아이들 똥구영을 후벼 파내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우리 집 할머니, 아버지가 토종꿀을 많이 생산해서 안방 다락방의 하아얀 백자단지에 두고 외손자, 중황형님, 중식이 형(춘양고모의 아들들), 무원형님(청기고모의 큰 아들), 등등, 그리고 오래전에 고인이 된 우리 집 큰형님(삼이 또는 상진)이나 주고는 했다. 할머니는 회장실 가시는 때를 제외 하고는 늘 안방다락문에 기대어 앉아서 꿀을 지키셨다. 우리가 다락방에 있는 꿀을 훔쳐 먹기 위해나는 동생 재현이랑 둘이서 깨를 부리기 시작했다. 재현이 보고 할머니에게 닭집(닭장)에 닭이 죽은 것 같다고 말하면, 할머니가 닭 보러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나는 몰래 다락에 올라가서 그 먹고 싶은 꿀을 훔쳐 먹곤 했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할매, 옆집 석포새아주머니(한철 씨 모친)가 배가 아프다구 할매보고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하네요.”하면 그때는 또 할머니가 다락문 앞자리를 비우는 사이, 재현이가 꿀을 훔쳐 먹곤 했다. 토종꿀을 많이 먹으면 술 취하는 것 보다 더 해롱해롱해서 겨울강변에 뛰어 놀아도 추운 줄도 모르고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경이(규진)형은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제일 허약하고, 건강이 안 좋아 아버지께서 1년에 한두 번은 꼭 한약을 지어 먹이곤 하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 몰래, 한약봉지 속 달콤한 지황을 꺼내먹고는 한양 봉달이(봉지)를 원래대로 잘 싸놓아도, 표시가 나서 아버지께 숙진이 이놈아 니 또 지황 빼 먹었구나!” 하고 야단맞고 혼나고 했다. 규진형은 쓴 약이 먹기 싫어서 아버지 몰래 내게 반잔 정도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겨울밤에도 우리들 5형제들로 하여금 완전나체로 옷을 홀랑 벗게 하구 잠을 재우셨다. 그래야 이가 덜 생긴다구 하셨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는 작고하신 큰형님이 남에 집 항아리를 깨고 왔다구 야단나구 하고서 우리 큰형님 삼이(상진), 경이(규진), 나 일진, 동생 재현이를 모두 뽕나무 회초리와 싸리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3.5.대를 때리셨다. 상진형님은 매를 맞으면서 징징 울면서 서있었고, 규진형은 아버지 회초리를 손으로 잡고 뺑글뺑글 돌고 한대라도 덜 맞으려고 안감 힘을 썼다. 나는 고집이 있어 껌적(꿈적)도 않고 가만히 서서 맞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한두 대만 때리고 말았다. 재현이는 안 맞으려고 토끼같이 깡충깡중 뛰고 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생생하네요.

우리할머니 이야기 어느 날 여름달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강가에 썩은 감자 삭히느라(삭이시느라) 항아리를 강가에 두었는데, 비가오니 떠내려갈까 봐 찾아갔는데, 톳제비(귀신?)에게 홀킨(홀린) 건지 들어오지를 안으니까, 아버지께서 강가로 찾아가셨다. 할머니는 강 건너 철한이네 뚝방 부근에서 항아리를 찾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모시고 온 일도 있었다. 정말로 귀신에게 꼬임을 받아 물 건너까지 가셨는지 모른다.

우리 반일꾼인 또는 반머섬(반머슴)이신 박 씨네 용산 어른은 3일은 자기 집에 일하구, 4일은 우리 집 일을 하셨다. 그 당시(1950년 후반??) 보통 머슴은 함께 살며 1년에 벼 16가마니 받는데 반일군은 8 가마니 받곤 하였다. 한번 언젠가 용산 어른이 소를 몰고 꽃듬이(꽃등산)에 나무를 하려가셨다. 나무를 해서 내려오니 소가 풀을 먹으로 멀리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속이상하고 화가 나셨다. 용산 어른은 시간을 많이 소비하시고 겨우 소를 찾아 소 등에 나무를 싣고 와서 집 앞 대추나무에 소의 코궁지()를 하늘로 쳐다보게 높게 메어놓았다. 벌을 받고 있는 소가 땀과 허연 침을 흘리며 무척 힘들어했다. 어머니가 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불쌍한 소를 풀어주셨다. 아주 순한 우리 암소는 우리 가정에 중요한 또 다른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한철이네 집의 용이라는 일꾼이 아침밥을 먹는데 우리 집 일꾼 용산 어른이 장난끼가 심해서, 용이 일꾼 아침밥 먹는데 가서 나두 먹자구 하면서 큰 그릇에 담긴 많은 밥 위에다가 된장국을 부어서 용이로 하여금 다 먹게 한 이야기도 있다.

 

일진이 이야기:

내가 국민하교 3학년 때 보갈아재(우리 큰집 재당숙)께서 머슴일군 집의 (용이, 용섭이의 아버지) 상동 어른을 불러오라고 나를 심부름 보내셨다. 그때 그들은 기한 씨 문간방(아래채 방)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 용섭이와 같은 3학년이고 친구여서 어린나이에 친구의 아버지에게 상동어른요, 보갈아제네 집에 빨리 오라니더했다가 보갈아재의 긴대나무 대코바리(담배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건 데 얼마나 아픈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왜 요놈아, 상동어른이 뭐로(무슨 말이냐)? 하시면 상동이지하셨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당시 몸종이나 혹은 머섬(머슴)에게 존대말 했다구 야단을 치신 것이다. 상놈, 양반사회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무섬 강변여름 이야기

 

무섬 강변여름 이야기가 생각난다. 무섬에서는 주로 낮에는 남자들이 목욕을 하구, 밤에는 여자들이 목욕을 하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재미있게 여자들이 밤에 목욕 할 때 몰래 살금살금 강가에 옷을 벗어놓은 것을 가지고 강변중간쯤 갖다 놓으면, 아녀자들과 아가씨들이 옷 찾으러 이리저리 찾아다니곤 했다. 그때 짓궂게 옷 갖다놓은 강변중간 후라쉬 (손전등) 으로 비쳐 주면 옷 가지러 살금살금 나왔다. 멀리서 완전 나체 몸을 보고 웃고는 했었다, 동심이라 재미가 그만이지.

겨울밤에 밤은 길고 배는 고프고 해서 앞집 명택이 뒷집 재진이, 일진이 등등 머럼동네 강도야네 집으로 밤중에 닭서리 하러 간 적이 있다. 주인이 문을 못 열게 지게작대기로 문을 막아났지만. 닭서리를 해서 먹었다. 닭서리는 좋았는데, 그 뒷날 난리가 났다. 강도야가 무섬에 찾아와 강변에 닭털을 묻어놓은 것을 파보고 자기네 집닭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도둑을 잡는다구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다. 그 전날 저녁에 박촌 박승걸 어른 집에 사위가 와서 씨암탉을 잡아준 건데, 강도야가 자기네 닭털이라구 문수 지서에 신고 해서 경찰이 나오고 야단이 났다. 악동 셋 명택이. 재진. 일진이는 구경하면서, ‘하하 우리가 도둑인데 남에 집, 사위만 혼이 나는구나.’ 한 사건도 있었다.

또 어느 여름날 무섬마을 한가운데 아주 멋진 기와집에 사는 박종우씨네 집에서의 일이다. 그 당시는 종우씨의 할배를 모두들 통대구 영감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당에 큰 왕 매실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마을에 대추나무 외에는 과실나무가 별로 없는 데 유독 이 집에만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탐을 내곤했다. 황금 같은 매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 있는 것을 통대구 영감(할아버지)님이 낮잠을 잘 때, 일진. 명택이가 돌팔매로 매실나무에 던지면 매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면 통대구 영감님이 벌떡 일어나셔서 누구야 누구야, 이놈들아!”하고 소리치신다. 우리는 마을 앞 거대한 방구소나무 뒤에 숨어 있구, 소두리(무섬 아래동네)서 온 전영달. 김태문 둘이를 통대구 영감에게 보내면 떨어진 매실을 주어가게 했다. 영달이와 태문이의 아버지는 소두리서 통대구 영감네 논밭을 부치는 소작농을 하고 있으니까 매실을 주고는 했다. 영달이 태문이가 주어가지고 나오면 좋은 것은 명택이랑 일진이가 나눠가지고 영달이 태문이는 나뿐 것만 먹곤 했다.

무섬하면 다들 양반 마을이라 대추나무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초가을이 되면 대추가 주렁주렁 많이 열려 있는 집은 무섬 종가 댁인 닭실 어른 댁, 지금 광옥 씨네 집이다. 우리들은 밤만 되면 몰래 대추나무에 올라가서 잘 익지도 않은 풋대추를 따다가 강변에 묻어 놓고 표시를 해두면, 이틀만 지나면 대추가 모래의 열을 받아 맛나게 빨갛게 익는다. 모래밭에서 익힌 대추를 맛있게 먹고 놀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소들이 형님(형진 씨))께서 우리 아버지에 대해 들려주신 이야기:

 

                  우리 집, 소마구채 벽에는 애림벽보가 붙어있었다. 이장네 집 애림벽보는 동네 게시판이다

 

 

1946-7년경, 아버지는 무섬에서 최연소(20?) 동래 이장을 하고 계실 때였다. 우리 집, 소마구채 벽에는 애림벽보가 붙어있었다. 이장네 집 애림벽보는 동네 게시판이다. 그때 초여름 밤 반장회의가 있는 날이다. 중간마을, 지금 종우 씨 집 뒤쪽 가자골 어른이신 박돈우 씨의 아버지 집에서 회의를 하구 승이네 집 옆 골목길을 나오는데 방구소나무 뒤에서 영주경찰서 경찰3명이 숨어 있다가 아버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잡아서, 좌익이라 하면서 빨갱이 대장을 만나고 온다고 하고서는 마을 뒤, 지금 치류정 정자 뒤쪽, 윗마을 우영이네 밭에 데리고 가서 아버지를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면서 빨갱이 대장을 만났느냐고 자백을 강요했다. 아버지는 반장 회의만 했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거의 초죽음이 되다 시피 맞았다. 하도 많이 맞아서 긴 밭두렁을 3번씩이나 뒹굴다가 의식을 잃자. 경찰들은 죽은 줄 알구 가버렸다. 마침 소들형님이 산위에서 지켜보다가 아버지를 업구서 우리 집 사랑방 오니, 아버지는 초죽음이 되었다고 한다. 온몸에 멍이 들고 가슴만 벌떡 숨소리가 나길레, 할아버지께서 토종벌꿀을 타 먹이고 해서 겨우 살려놓은 것이다. 경찰에 매를 맞은 이유는 그 당시 승이 작은 아버지 박약우 씨, 무섬 출신으로 가장 바둑 잘 두는 천규 씨 부친 윤우씨의 중형이 경북북부지방 빨갱이 대장을 하고 있는 지라 누군가가 밤마다 우리아버지가 빨갱이 대장을 만난다구 경찰서에 거짓말을 해서 아버지가 매를 맞게 된 사건이다. 그 후 아버지는 좌익에 낙인찍혀, 우리들 자식들은 공무원 시험도 못보고 한다고 해서, 그 당시 망동아재 처남 자유당 이정희 영주 국회의원에게 할아버지가 백자에든 토종꿀단지를 수십 통 갔다주면서, 재발 아버지 좌익에서 풀어달라구 부탁 부탁을 했다고 한다. 망동아제 조카에게도 여러 번 부탁을 해서 아버지가 좌익에서 풀려나 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이후 우리들에게 절대로 정치도 하지 말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사상을 배우지 말라고 한 것이 기억난다. 그때 많이 맞은 게 원인이 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셨다. 특히 겨울철에는 신경통이 심해 걸어 다니는 데 많은 불편을 가지고 살았었다. 소들이 형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그 당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우리 집 둘매(진옥)누나 한 분 빼고는 6남매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섬서 알방석댁이라 불리신 어머니 이야기

집도절도

 

우리 어머니는 16살에 문수면 방석 마을에서 반남 박 씨 집에서 우리 마을 무섬으로 시집을 오셨다. 예쁘고 귀엽다고 해서 할아버지에게 늘 예쁜 며느리로 기억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돈이 조금 있으셔서, 지금 놀김이 중식(우리 고종)이네 논밭 3070(10마지기)을 살돈이 있어서 그걸 사려고 하였다. 사실 이 우리 고모부의 논밭은 아마 고무부가 열차사고인지 잘 모르나 돌아가셔 보상받은 돈으로 할아버지가 사준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시아버지이신 우리 할아버지에게 농사는 짓고 싶지 않다고, 할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당시 방석 박진우 아버지이신 박찬오 씨(나중에 문수면장하신 외가집친척 어른)집에 재봉틀이 있는 거라, 시간 있을 때마다 가서 재봉 일을 배우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아버지께 논, 밭 사지마시고 재봉틀을 사주시면 바느질로 바지, 저고리를 만들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시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 집에 있는 어머니 손때가 묻은 싱가 손재봉틀이 그렇게 해서 구입하게 된 것이다. 무섬에도 부잣집 한철 씨네, 세병 씨네, 선광 씨네, 광옥 씨네, 제균어른 댁네, 종우 씨네, 천세 씨네 집 등등에 재봉틀이 있었으나, 재봉틀로 돈벌이는 안하는 집이고 우리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약속한 일이라 무섬반경 누구네 집이든지 바지, 저고리를 부탁하면 솜씨 있게 만들어주고 품씩으로 좁쌀, , 녹두, , 감자, 고구마, 병아리, , 강아지 등등 받아와서 잘 살게 되어서 알방성댁이란 별명을 얻었다. 내가 이웃동네 옷 심부름을 제일 많이 하구 다니는데 이웃 동네 여학생 옷, 빤스나 우아끼(샤스) 같은 것은 챙피해서 직접 못 전해주고, 그 여학생 집 대문밖에 두고 온 일도 있었다. 그러고 오면 어머니는 품삯을 안 받고 왔다고 다시 보내기도 했다. 문수국민학교 2.3.4.학년 때 궁터, 전닷, 잔들이, 원전골, 분계, 고랑골, 뒷골, 노틀이, 다락골, 방석, 술미, 소들이, 도래와 더 먼 곳 석탑, 맥실, 등등 누구네 집이라고 적어주는 쪽지를 가지고 열심히 다녔다. 그러면 대개 착한 아이라구 대추, , 호두 등 과일을 주면 맛있게 받아먹으면서 집에 오기도 한 것이 기억난다. 우리 엄마는 그처럼 하구한날 옷을 만들어 돈도 많이 버셨다. 또 할머니와 누나와 명주, 삼배 등 길 삼을 하여 돈을 많이 모았다. 여름 농한기나, 초겨울 우리 집에는 배 짜는 소리, 명주 짜는 소리가 늘 요란하게 들렸었다. 어머니는 또 기나긴 겨울밤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자주 모여 사설인가 전설인가, 옛날 이야기, 특히 상주 유대감 이야기등을 줄줄 외우는 것을 자주 들었다. 늙으셔서 눈이 어두워서 책을 읽기가 힘들 때는 화투치기도 좋아하셨다. 붓으로 옛 한글로 고모에게 편지 쓰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시집오실 때 교육도 못 받고 글도 깨우치지 못해 일자무식이었지만 동네에서 세병씨 모친에게 글을 배워서 책도 읽고 붓으로 글씨도 쓰곤 하셨다. 동네 상당한 아주머니들이 글을 못 읽어서 어머니가 늘 읽어주면, 다른 글을 읽지 못하는 새걸아지매 등 여러 아주머니들이 함께 낭송 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우리 마구채 애림벽보:    1960년대 시대상 자료인 반공 방첩 간첩신고 표어판으로 두꺼운 마분지가 사용되었다.

 

                                     우리 마구채 애림벽보: 자나깨나 산불조심 벽보

 

무섬 천재 홍진형님 이야기

 

1965-6.년경 초겨울 날 집안 홍진이 형님이 정신이 좀 이상해서인지, 영어공부를 하신다고 혼자서 영어책을 들고 다니면서, 심지어 강 건너 띠앗강변에서도 그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다니면서 중얼중얼 하고 영어를 하는 것을 기진형님이 보고 있었다. (규진)이 형 이야기로는 이 홍진 형님한테 중학교 영어 책을 들고 가서 많이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추운날씨에 강변에 헤메이시는 것을 보신 홍진 형님 동생이신 기진형님이 큰형님이 아무래도 큰일을 저지를 실까 봐 충청도 공주 계룡산 정신병원 요양소에 보내셨다. 그런데 그 이듬해 3월 초경 요양소를 탈출해 무섬까지 일주일 동안 배를 굶으며, 손발이 퉁퉁 붓고 아주 상거지 모습으로 오셨다. 모친이신 영춘아지매는 안동, 영주 한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이고 해서, 집에 함께 데리고 살았다. 그 집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 집 뒷집 옆 무섬사료관 뒷 터다. 어느 초여름 날 집 처마에 볏짚을 싸둔 곳에 작은 뱀 한마리가 들어간 것을 보고서 형님이 뱀 잡는다고 불을 질러 집도 조금 태우고 야단법석이 났다. 동네 어른들을 많이 걱정을 하구 우리들은 형님을 노리게 감으로 비웃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경(규진)이 형님은 절대로 비웃지 않고 늘 홍진형님을 존경하고 따르며 영어를 많이 배웠다고 한다. 그해 가을 박촌 박하서 씨네(지금은 없어졌지만), 두병씨 네집 앞 큰 소나무가 몇 그루 있는 곳에 콩 농사를 많이 지어 콩가리를 싸아둔 곳에 콩싸리 해먹는다고 불을 질러서 콩 약10가마니 정도나 태워버렸다. 동네사람들이 반쯤 타버린 콩을 아이들이 주어먹으면 야단쳤다. 기진형님이 돈으로 다 값구 힘들어 한 적도 있다. 홍진형님은 머리가 비상해서 정신이 이상한 것 문제였다. 한번은 신문을 들으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시고 거기에 난 것을 이야기도 해주셨다. 정말 아까운 천재였었는데 정신 이상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런 형님을 놀려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의 철부지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후회가 된다. 인정이 있는 규진이 형이 홍진이 형님을 왜 그렇게 불쌍히 여기고 따랐는지 알만하다.

 

 

어머니와 번데기

다섯째, 아들 재현(在鉉)

 

어머니와 추억은 년도는 기억할 수 없으나 문수국민학교 입학 전후 누에고치로 명주실 뽑을 때 부엌에서 번데기 건져 주는 거 많이 먹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조금 커서는 늘 논밭갈이 하고 김매기 하라고 할때 하기 싫어서 뒷산에 올라가서 낮잠 자고 있으면 나를 찾으러 여기

저기 다니시는 어머니를 알면서도 바로 가지 않고 많은 애를 태웠던 기억이 많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죄송하고 후회가 된다. 우리 형제들의 학자금을 위해 유일한 돼지 키우기를 하여 매일아침 이웃집을 전전하며 구정물과 쌀 뜬물을 수거하여 돼지를 길렀다. 새끼를 놓으면 대략 한두 달 뒤에 아버지께서 만드신 다래끼에 담아서 나는 등에 짊어지고 어머니는 머리에도 이고 하여 영주 장날 팔아서 먹을 거리 조금 마련하였다. 나머지는 우리 형제들 학비 또는 옷값으로 사용하는 것이 많은 기억이 난다. 어떤 해에 우리 집에 멍멍이가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다. 3달 정도 크면 어미 개가 강아지한테 젖을 잘 물리지 않는다. 그러면 클 만큼 컸다고 생각하고 무섬 동네 이웃에서 사면 팔고 남으면 영주 장에다 갔다 팔았다. 어머니가 한 마리 다래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나는 두 마리를 다래끼에 짊어지고 영주 장에 삼십리(12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돼지 새끼 팔 때처럼 팔아서 제사 장보기를 해오기도 했다. 나는 장에 걸어가는 게 싫었지만 형 숙진이가 없으면 구체 없이 내가 해야 했다.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이 꿀맛 같아서 참았다. 비가나 눈깔사탕을 사주기도 했다.

내가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하고 놀기만 할 때면 어머니는 늘 내게 아이고 이놈아! 저래서 밥은 벌어먹겠냐! 사람이라면 밥값은 해야제.” 하셨다. 어느 날 실컷 놀다가 와서 밥상에 앉으니, “아이고 이놈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이제야 집에 오니, 그래가지고 니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니?” 하신다. 옆 집 친구 하고 바둑만 두고 놀고 있으면 어느새 어머니가 오셔서 그게 밥 먹여 주냐?” 하셨다. 철없을 때 왜 그리 어머니 말 안 듣고 속만 썩였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죄스럽고 불효한 게 후회된다.

어머니 살아생전 불효를 많이 저질렀지만, 아주 드물게 칭찬 받는 일도 했다. 나는 여름에는 앞 강가에서 물고기를 아주 많이 자주 잡았다. 무섬에서만 하는 개매기로 물고기를 한 세숫대야씩 잡아 오면 어머니가 니 참 용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았노?” 하시면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셨다. 또 반두로 은어, 먹지, 피라미 등을 많이 잡았다. 작은 그물을 긴 나무 가지 끝에 삼각형 모양으로 매달아서 강물을 타고 오르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따라다니며 잡았다. 힘은 들지만 무척 재미있다. 물고기를 잡아올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미소를 잊어버릴 수 없다. 물고기는 여름 한철 우리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고기였다. 많이 잡으면 큰집, 작은집과 나누어먹기도 했다. 또 겨울철에는 산에서 산토끼와 꿩을 가끔 잡아 왔다. 어느 형제보다 내가 특히 잘 잡아서 어머니는 여러번 칭찬을 해주셨다. 그러면 나는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아서 다음에 또 잡으러 산에 가곤했다.

 

 

어머니와 화투

일곱 번째, 막내아들 기현(基鉉)

 

방석댁(어머니) 막내 아들로 태어난 천덕꾸러기, 어머니 치마폭에, 등딱지에 원숭이처럼 붙어서 생떼만 쓰다가 아버지 뽕나무 회초리에 엉덩짝에 종아리에 무지하게도 많이 맞았다. 무더운 여름에 누에 뽕 따는 어머니 옆에서 칭얼대며 붙어 다니니 아버지 눈엔 자식이 아니라 짐 보따리로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초저녁 매타작을 하고 나면 어머니 등에 업혀서 훌쩍훌쩍, 국수 삶는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였지만 그래도 땀 냄새 베인 삼배적삼 어머니 등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릴 적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아마도 하루도 안 빠지고 화투를 치러 가신 것 같다. 법전 아주머니 집에서 초저녁부터 권련(새마을 담배)개비 내기 민화투를 치시러 가야 하는데 껌딱지 막내가 발목을 잡으니 품 안에 안고 재우기 시작한다. 하루종일 물에서 놀고 산에서 놀다 지친 나는 금방 곯아떨어진다. 추운 겨울 어두운 밤길을 휙, 법전 아주머니 집으로 아마도 나를 재우면서도 눈앞에 화투장이 가물거렸을 것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집살이에 딸, 아들 일곱을 키워야 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하루는 늦은 밤 화투놀이로 힘든 일들을 조금은 잊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용히 늦은 밤까지 즐겼으면 좋으련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내가 사고를 친다. 혼자 자다가 잠이 깨었다.

으앙…….”

깜깜한 안방에 어머니의 팔 베게는 없고 무섭고 두려움만 덮친다. 울음소리가 그칠 리 없다. 사랑방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작은 형님을 깨운다. 엄동설한에 이불 밑에서 자다가 깬 형님은 골이 이만저만 난 것이 아니다. 우는 막내를 업고 화투놀이 하는 집으로 찾아 다닌다가

법전 아주머니 대청마루에 나를 내버려 두고 집에 가 버린다. 한밤중에 마루에서 앙앙. 어머니는 얼른 나를 안고 방으로 들고 가서 달래지만 설움에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설움도 설움이지만 여러 번 경험을 해 본 터라 울면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을 아는 나는 쉽게 울음을 그칠 리 없다.

짜잔! 호랑이가 제일 무서워한다는 곶감이 법전 아주머니 벽장에서 서너 개 나온다. 어릴 적 곶감은 제사 때나 맛볼 수 있는 귀한 것인데 아마도 지금의 초콜릿보다도 더 달콤하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것은 한밤중에 우는 것과 아버지 뽕나무 회초리가 전부인 듯. 국민학교 마치고 중학교로 자취를 하러 영주로 떠났고, 작은 방에서 누이랑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이 오기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투덜거리며 5리 길 학교를 다녔다. 언제나 토요일은 즐거웠다. 토요일엔 무섬에 보고 싶은 어머니를 보러 갈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설레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막내는 다 그런 건가? 주말에 무섬에 오면 언제나 어머니 품은 내 차지였다. 땀 냄새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잠든 토요일 밤이 환갑이 지난 지금도 생각난다. 부모님 마음 어느 자식 하나 귀하지 않았을까? 마흔이 넘어서 생긴 막내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보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두 해의 겨울이 가고 고등학교를 안동으로 가게 되었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중학교 때 기성회비(육성회비, 지금의 수업료)3년 동안 입학식 때 빼곤 제 날짜에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따로 불러서, 우표 붙인 편지 봉투를 주시면서 부모님께 편지하라고도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뿐이 아니고 촌에서 자란 아이들 모두가 그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공부도 못했지만 학비의 스트레스에 고등학교를 가기 싫었지만 그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유 불문하고 가야한다기에 학비가 저렴한 농업계 고교를 선택하여 안동농고로 갔다. 좀 멀긴 하지만 기차통학을 하니 좋았다. 아침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들고 갔다가 저녁이면 집에 오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와의 만남은 너무나 짧았다.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인 고등학교 1학년 초. 어머니가 위독하여 영주 순창병원에 계신다는 전화 한 통. 조퇴하고 영주로 달려갔는데 영주에선 힘들다고 안동으로 가라고하여 아버지와 형님, 나는 의식 없는 어머니를 태운 택시를 타고 안동으로 향하다 예고개 밑에서 돌려서 무섬으로 되돌아온 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되었다.

 

내가, 니 장가갈 때 까지 살라?” 하시던 말씀이 어른거린다. 어찌 어린 막내를 두고 그리 쉽게 눈을 감으셨는지 안방 아랫목에 누워서 거친 숨만 들이쉬며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어머니는 떠나셨다. 환갑을 한해 앞둔 5월의 봄날에…….

어머니날 앞산에 어머니를 묻었다. 막내라는 이유로 어머니와의 만남과 이별은 겨우 17년이 전부였다. 가슴 깊이 남는 무한한 그리움과 못다한 사랑은…….

 

 

어머니,

 

영영 돌아오시지 못할 그 길을 어찌 그리 쉽게 가셨나요?

가시는 그 길이 그리도 편하시던가요?

삼배 적삼 땀내를 그리는 어린 막내를 두고

이른 봄, 진달래 꽃길 따라

개울 건너 문전옥답 놀기미

술미꼬 고추밭길 뒤로하고

은모래 반짝이는 뛰앗갱밴을 두고

초저녁 달빛 아래 멱 감던 앞개울을 건너

꽃상여 타시고 가신 어머니

다시 못 올 그 길을 어찌 가셨소?

그립고 또 그립소

큰솥에 누릉지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

동솥에 호박국

어머니를 추억하며 237

부엌 아궁이에 고등어구이

숯불 위에 된장

주름진 어무이 얼굴이 그립고 또 그립소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신 그 길

그곳은 평안하신가요?

그리움에 지친

못난 막내도 언젠가는 그 길을 가겠지요?

부디 평안하시길 …….

 

 

 

 

 

우리 집안 증조할배 낙자 수자 할배 이야기입니다.

[무섬마을 전설] 화마 막은 효부 씨 부인 이야기

무섬마을에는 치마자락을 펼쳐 화마를 막은 효부 권씨 부인의 보훈이야기가 실화같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무섬마을에 살던 선비 김낙수(樂洙 1822-1892)15세에 혼인하게 돼 봉화 유곡의 안동권씨 규수와 혼인말이 오갔는데 혼인날이 가까워 지면서 소문이 나기를 규수가 간질병 환자라는 것이다.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온 집안이 사랑방에 모여 대책을 논의한 후 파혼하기로 했지만 낙수는 양가의 혼사결정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쪽에서 파혼한다면 이 또한 세상이 다 알게되고 파혼당한 규수에게 그 누가 청혼할 것이며 결국 그 규수는 일생동안 우리집을 원망할 것이 자명하고 또한 불쌍한 그 규수의 가슴에 칼을 꼽는 일입니다. 소자는 초행길을 떠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집안 어른들께 고하고 신행길을 떠난다.

봉화 유곡의 규수댁에 무사히 당도해 혼례를 치르고 규수와 첫날 밤을 맞았지만 간질병이 발작해 사지를 틀고 입에 거품을 머금고 인사불성이 됐다. 그러나 어린 신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신부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도포자락으로 닦고 손발을 주무르는 등 극진히 간병해 이 모습을 문밖에서 몰래 보던 사람들이 왈칵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무섬 권씨부인은 신랑댁으로 신행 온 후 주야로 간병하는 등 정성을 쏟았지만 신행한지 16개월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세월이 흘러 1877년 무섬 대화재가 일어나 전 동리가 다 탔다. 그때 락수 집만은 타지 않고 남았다. 고가들이 지붕을 맞대고 꽉 들어차 있는 동네에 불이 났으니 지붕의 기와가 불에 달아 튀면 몇십미터를 날아가 온통 화마가 온 동리를 삼켰다. 이때 이 불길이 낙수의 집을 넘어 온 동리를 태우면서 왜 그 집만은 온전히 남았는지 의문이 남게 됐다.

화마가 온 동리를 휩쓸 때 낙수의 집 지붕위에서 녹의홍상<다홍 치마에 녹색 저고리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의 복장을 뜻하는 말로 결혼을 준비하는 신부가 갖춰 입어야 하는 결혼 한복의 가장 기본이 되는 관례복을 의미하기도 함>을 입은 젊은 아낙네가 치마자락을 펼쳐 번져오는 불길을 막았다고 한다.

이것을 직접 보았다는 동네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 녹의홍상을 입은 새댁은 바로 유곡에서 시집온 권씨 부인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실화와도 같은 이 이야기가 아직도 권씨 부인이 시댁의 후덕에 보답하고자 지붕에 나타나 화마를 막았다고 믿고 있다.()

 

에필로그

나의 어머니 박명서

넷째 아들 경이(김규진)

 

나의 어머님은 16살에 문수면 방석 마을에서 멀지 않은 무섬마을로

출가하셔서 8남매를 낳아서 7남매를 키웠다. 주경야독이라고 밤낮으

로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낮에는 아버님을 따라 들과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아래한글을 깨우치고 가사를 공부

하였다. 환갑을 앞두고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일생에 대해서 글을

쓰시다가 뇌막염이 재발하여 갑자기 돌아가셨다. 무섬동네에서 알방

석댁이라 불린 어머니 이야기는 맏이인 내가 어머님이 남긴 가사와

일생 이야기를 어머니 관점에서 정리하고 재창조한 것이다.

 

20세기 체코의 대표 작가이며 로봇이란 신조어를 그의 희곡 <

>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카렐 차페크(1890 -1938)는 자기 집에서 동

시대 마사리크 대통령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서 시대와 문화에 대해

서 많은 토론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차페크는 마사리크 대통령과의

대화를 기록하여 나중에 <마사리크와의 대화>라는 책을 마사리크,

페크 공저로 출판하였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따와서 나도 어머님이

남긴 조그마한 기록과 평소 우리 자식들에게 이야기 한 것을 기록하

여 어머니와 공저로 이 책을 출판한다.

왜 어머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조금밖에 남기지 않았는데 내가 대신

어머님의 자서전을 쓰게 되었을까?

이 인연은 꽤 오래 전의 작은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님은

내가 대학 졸업하던 해인 1977년에 내 아들, 그러니까 어머님의 손자

제욱이를 업고 내 졸업식에 참석했다. 어머님은 그해 5월에 돌아가셨

.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198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머

님은 그렇게도 원하시던 내 유학길을 알지도 못하고 저 세상에 가셨

.

1989년 나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체코,슬로바키아

어과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0년도에 스웨덴 스톡홀

름에서 전 세계 슬라브학자 300여명이 학술대회를 개최하는데 나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고르바초프가 기조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내 발표논문은 13세기 말 체코의 필사본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은 체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귀중한 필사본이다. 여기에는 신구약 성경 및 체코역사, 수도원의 명

부 등이 실려 있는 방대한 필사본이다. 책 한가운데는 중세에 사람들

이 생각한 악마의 그림이 있다. 이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다.

1970년도 한국외대 노어과 다닐 때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하시

는 스웨덴인 로젠(S. Rozen) 교수를 만났다. 그는 한국 고어연구 학자

였다. 그때 어머님이 초등학교 헌 교과서에 가사 <경노의 심곡>을 붓

으로 쓴 것을 그 교수에게 드리고 연구해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까

마득하게 잊어버렸다가, 2010년 스톡홀름에 가려고 준비하다가 40

년 전에 그 교수님에게 우리 어머니 필사본을 준 것이 생각났다. 어머

님이 77년도에 돌아가시고 평소에 가사를 읽고 연습하고, 청기 고모랑

주고받은 아래한글 붓글씨 편지 등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유일한 어머

니의 친필 글씨가 이 <경노의 심곡>이다. 나는 그때 아래한글로 된 이

글을 잘 못 읽어서 이게 어머님의 당신에 대한 글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가사를 베낀 것이다.

그래서 한국외대 스웨덴어과에서 알아낸 그 교수님의 주소로 편지

를 썼다. 40년 전에 제가 선물한 어머니 가사 연습 글씨가 어머님의

유일한 유품이라고, 혹 가지고 계시면 돌려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물로 드린 것이니 돌려주기 싫으면 복사라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

. 답이 왔는데 자기도 나이도 많고 은퇴해서 스웨덴 앤 왕립도서관

에 귀중한 자료들과 그 책을 기증했는데 도서관 관계자에게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한 달 후에 편지가 왔는데 앤 왕립도서관에 이야기를 하니까 헌 교

과서에 붓으로 쓴 고어로 된 한국 문서가 도서관에 그렇게 귀중하지

않고, 한국의 어떤 교수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라서 돌려주기로 결정

했다고 하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그 책을 항공우편으로 보내왔다(

). 어머님 돌아가시고 33년 만에 어머님의 친필 유품을 받으니 너무

행복했다. 어머님의 친필이 33년간이나 스웨덴 앤 왕립도서관 서고에

서 잠자고 있었다니!

 

1989년 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자유화 된 이

후 극작가 출신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스웨

덴 정부에게 17세기 당신 나라의 군대가 프라하를 침공해서 수많은

보물과 도서, 그림들을 탈취해갔는데 그 중에서 <코덱스 기가스,

Kodex gigas> 한권 만 돌려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그 필사본은 엔 왕

립도서관 현관에 철저한 보안 상태로 전시해왔는데 하벨 대통령의 이

요청을 듣고 다시 지하 저장고로 옮겨버렸다. 훗날 다시 하벨 대통령

이 간곡히 부탁하여, 그러면 <코덱스 기가스>를 고향 프라하 국립 도

서관에 전시라도 하게 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프라하에서 전시 될

때 나도 그 것을 보러 프라하로 갔다.

<코덱스 기가스, Codex Gigas>에 대해 발표하면서 서론으로 스톡홀름 슬라브

학술대회에서 스웨덴 교수가 우리 어머니의 유품을 돌려주었으니,

웨덴 정부도 17세기에 체코에서 탈취해 간 <코덱스 기가스>를 체코

하벨 대통령이 그처럼 원하니 돌려주는 것이 도리라 하니, 그때 세미

나 장에 참석했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 교수들은 박수를 쳤다. 어떤 젊

은 스웨덴 교수는 박수를 치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세월이 흘러가서 나는 한국외대에서 2014년도 가

을에 은퇴를 했다. 은퇴 후 나는 내 자서전 가칭 <호기심은 창조를 낳

는다>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안방 다락에서 100

여년 된 고리짝 두 개를 발견했다. 1919년도에 작고하신 증조할아버

지께서 주역에 대한 공부를 하시고 연구한 친필 서책들, 1953년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제문과 친인척과 다른 문중 어른들의 편지, 제문

등과 어머니가 헌신문지에 가사 연습하셨던 글씨를 발견했다. 어머님

은 여유가 없어 한지에 쓴 것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헌 신문지에 써서

좀이 먹고 많이 훼손되었다. 100여 년 전에 증조할아버지나 70여 년

전에 쓴 할아버지의 글씨는 한지라서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한학자

서수용 씨한테 보여줬더니 상당히 귀중한 글이 있다고 하면서 몇몇

개를 표구로 만들기로 했다.

또 동생 일진이가 45여 년 전인 1975년 경 어머니가 호롱불 밑에서

가사 <fb대감 이야기>와 큰집 보갈 아재(원규)와 윗마을 한제이 아재

(희규) 한문 낭송하는 것을 녹음한 것을 보내왔다. 이로써 어머님의 친

필과 평소 듣고 보고 했던 어머님의 가사 공부와 낭송, 암송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데 당신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

를 쓰고 싶다고 하시면서, 종이를 구해달라고 해서 사드렸더니 당신

이야기를 막 쓰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돌아가셨다. 1960

대 중반 뇌막염으로 안동도립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한 달 만에 회복하

10여년 사시다가 뇌막염이 재발하여 갑자기 돌아가셨다.

평소에 어머님이 주경야독이라고 낮에는 집안 일, 들과 밭에서 일하

시고 저녁에는 특히 겨울 저녁에는 가사를 틈틈이 공부하여 아래한글

을 깨치셨다.

어머님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용기를 내어

어머님의 입장에서 못다 하신 어머님의 이야기를 써봤다. 먼저 각종

사진 자료들을 엮어서 블로그로 만들어 친구, 친척들에게 보냈다.

들 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 써네스트 출판사 강완구 사장님

께 어머님 자서전 이야기 블로그를 보냈더니 읽어보시고 1930년대

70년대 한국의 농촌 생활을 한 여성의 입장에서 조명한 것이 뜻깊다

고 출판제의를 해왔다.

어머님에 대한 일가친척들의 회상 이야기와 살아 있는 우리 6남매

의 도움이 컸다. 특히 어머님의 목소리를 녹음한 둘째 동생 일진의 노

고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어머니 추억을 부록

편에 실었다. 생생한 자녀들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책을 출판해주신 강완구 사장님께 특히 감사를 드리고 싶다.

삼가 어머님의 영전에 이 책을 받친다.

 

2023. 7. 學山 김규진

 

 

우리집 가계도 

육영회, 6형제는 몇대부터이지요? 그리고 6형제 성함은?

1세 상 

10세 담 

 

무섬할배 20세 대 

 

21세 유련 裕鍊

22세 영형 종진유동댁?

23 3?형제

 

1) 21세 유연裕鍊 -보문할배 22 (?) 영용永瑢??

 

1. 23세 영용 永瑢 24세 락기 樂沂 25세 원규 遠奎 (보갈아재)- 26세덕진 德鎭 고통형님, 선광(영해)

2. 23세 증조부(?) 24세 조부- 25세 각규(고랑골), .26세 재진, 이진, 

25세 정규(예안) - 우현,

3. 23 증조부(금당실할배 박씨), 24세 휘완(와란)- 25: 신규(방석)

26 . 진옥, 규진, 일진, 재현, 진희, 기현,

27세: 제욱, 경미, 경선, 제황, 한창, 아람, 제원, 제익

28세;  승후, 은후.

 

23 2). (??) 24 (?) 영기 ( 25세 광규 ), 26 (?)주사댁 ,27세 두월댁, 28세 두병, 이병, 기병, 구병, 세병, 영숙....

이르실댁 제관, 제벽제락

미동댁(김용: 서병, 무병모친) 김용: 경북고, 중동고, 대구도립병원서무과장. 김일성 따라감 서울시청 근무(김일성하에)- 이문열 부친과..

23 3.) 24(?)영구 25(?), 26 (오록형님) 27세 한경

 

23 4.) 영형 종진유동댁

 

23세 낙진-24세 휘걸-25세 호규, - 26세 웅진, 홍진, 병숙, 뇌진, 승진, 민석(옥광).

25세 성규  26세 동웅, 난희(조동탁. 지훈)

 

 

23 5.) 24세 영돈 - 25세 서늘기아재( 26세 진남, 진섭, 진환) 25세 세걸아재네(26세 진하, 진국, 명교)

23 6.) 24세 영황 (참봉?) 25세 의인아재( 26세 정숙), 26세 위진;석포형님(조상 참봉댁),

25세 명규(농당) 26세 법전형님, 27(기한, 복희 )

 

큰 할아버지: 이모, 우영이 할매, 어매,

 

둘째 할아버지:

 

선돌; 안정면

3째 할아버지: 박준서. 손주들 찬익7, 삼이5, 숙자, 숙희 숙영, 미자(외 육촌)

4할배.

 

 

 

숙영 미자,

이모. 숙희 아부지 어매.

찬업; 광시 언니 육촌

박진우 어매의 7촌 조카:

 

 

 

23세 (택호 감천, 금당실) 시조부 낙철 樂徹(철종1853년- 1919년 7.20일 67세)

맏 시조모 함양박씨咸陽朴氏 1866년- 1685?년 1.20일 19세)

둘째 시조모 풍산김씨豊山金氏 1908년-1950 월일??? 42세)

 

24세 (택호: 와란) 시아버님 휘완(輝完): 고종 1889년- 1953년 1.4. 65세)

시어머님 남양홍씨 (고종 1891년- 1975년? 85세)

 

25세 (택호: 방석) 남편 김신규 1916년(?)-1999년 음 7월 29일 83세? 몰

나: 반남박씨: 박명서 1917년(?) -1977년 음 3.19일 60세? 몰

 

 

우리집 족보: 손자 제욱 기준

 

선성김씨(宣城金氏) 또는 예안김씨(禮安金氏)

23세 고조 할아버지 낙철 樂徹(철종1853년- 1919년 7.20, 66세)

고조할머니 풍산김씨 豊山金氏(1908년-1950 월일??? 42세)

고조할머니 함양박씨 咸陽朴氏(1866년- 1885??년 1.20)

 

24세 증조 할아버지 휘완 輝完(고종 1889년- 1953년? 1.4. 65세)

증조할머니 남양 홍씨南陽洪 氏(1890-1975, 85세

25세 할아버지 신규 愼奎(1916-1999, 83세 )

할머니 박명서(朴命緖, 1917-1977, 60세)

26세 아버지 김규진(圭鎭 1948-- )

어머니 최연자(崔蓮子 1950---

27세 김제욱(濟郁 1976---)

포브 페아라(1980---

 

23세 증조부(금당실할배 박씨), 24세 휘완(와란)- 25: 신규(방석)

26. 진옥, 상진() 규진, 일진, 재현, 진희, 기현,

27: 제욱, 경미, 경선, 제황, 한창, 아람, 제원, 제익

28; 승후, 은후. 한창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