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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교수 세계 여행기: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200주년에: <죄와 벌>의 배경(무대)을 산책하며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의 풍경)

Kyuchin Kim 2021. 2. 10. 19:15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로부터 나왔다"는 가짜뉴스 “We all come out from Gogol’s ‘Overcoat'" Dostoevsky said. Is this true ? No it's a fake.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곁의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무대와 문학기념 박물관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1834-1882)의 그림: 작가의 내면의 진지하고 구도자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야윈 얼굴의 섬세함 모습과 평범해 보이는 가죽외투의 갈색과 어두운 올리브 색의 조합은 금욕적이면서 내적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10년간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후 이념을 버리고 인간 내면세계에 몰두하는 작품을 쓰기 시작한 시기의 그린 초상화다. 초상화가 페로프는 모스크바 트레쟈코프 미술관(Treoyakov Gallery)의 주문에 따라 1872 년에 그렸다. 페로프는 인간의 본질, 성격의 진실한 반영에 기반을 둔 진정으로 뛰어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 을 화면에 표현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문학기념 박물관을 찾아간 무더운 여름날, 학술 담당 부관장 갈리네리나 레기나 그리고로예브나 여사의 도움으로 <죄와 벌>의 무대가 되었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그)의 빈민가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었다.

택시를 타니 냄새가 났다. 택시는 네바 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운하와 작은 다리들, 우중충한 건물들, 그 옛날 러시아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동궁(지금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커다란 광장을 지나 20여분 만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죄와 벌>의 주인공들이 살던 지역에 필자를 내려놓았다.

잔디도 가로수도 없는 인도와 울퉁불퉁한 차도, 더러운 물이 흘러내리는 그리보예도프 운하, 낡은 아파트 건물들 등은 1백25년 전에 도스토예프키가 죄와 벌에 그려놓은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다. 때마침 오후 6시 퇴근 시간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옷차림으로 땀을 흘리며 뭔가를 보따리에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우울했다. 1세기 전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인물들이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죄와 벌>에 나오는 시간과 장소는 소설의 첫 페이지에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문학 박물관을 첫방문은 1990년이고 2005년도 또 방문했다.

 

“7월 초순경, 지독하게 무더운 저녁나절 한 젊은이가 S 뒷골목의 셋집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되 빌린 자기 다락방에서 거리로 나와서는 망설이는 듯 천천히 K 다리 쪽을 향해 갔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계단에서 자기의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다락방은 5층 건물의 바로 지붕 밑에 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장 같았다. 점심식사 한 기와 하녀를 함께 빌고 있는 그의 하숙집 여주인은 한 층 아래 딴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리로 나올 때마다 계단을 향해 거의 언제나 활짝 열려져 있는 여주인의 부엌 옆을 꼭 지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젊은이는 옆을 지나가면서 일종의 병적인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그런 기분을 부끄럽게 여기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여주인에게 당당한 빚을 지고 있어서 그녀와 만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이 철 역 <죄와 벌> 중에서)

 

박물관 안내양

 

집필책상
집필 책상

 

식탁

 

 

가족사진

 

집필책상
도스토예프스키(1820.2.9.-1881.1.28)의 임종 시간을 알리는 시계: 1월 28일 8시38분(1881년)

소설의 소재는 구체적이고 작가가 잘 알고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줄거리의 시점은 작품의 첫 장을 집필할 때와 일치한다. 1865년 7월 페테르부르크는 지독히 무더웠다. 바깥 태양이 비치는 곳의 온도는 40도를 가리켰다.

후덥지근한 무더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긴장된 신경과민을 첨예화시켰고 스톨야르느이 거리의 한 집의 뜨거운 지붕 아래에 있는 무덤 같은 협소한 다락방에서 그를 몰아냈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1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2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3

 

1907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는<죄와 벌>에나오는 지리적 명칭의 약자를 밝혔다. 작품에 나오는 S 뒷골목은 성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 스톨야르느이 뒷골목(Stoljarnyj Pereurok)이며 K 다리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의 집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예카쩨린스키 운하 (지금의 그리보예도프 운하) 위에 있는 작은 코쿠쉬킨 다리(Kokushkin most)이다. 그 외 T 다리는 투츠코프 다리(Tuchkob most)이며, B대로는 볼쇼이 대로(Bolshoj prospect)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아내가 <죄와 벌>에나오는 지형학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보즈네센쓰키 대로 3번지에 있는 집 안마당에 있는 돌을 가리켜주었다. 소설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에서 훔친 물건을 감춰두었던 곳이다.

 

(50) [지혜의 향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 자유냐, 정의냐(석영중 교수) - YouTube

 

필자는 <죄와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걸어갔던 자기 다락방이 있는 그라쥐단스키 19/5 번지 건물에서 전당포 노파가 살고 있었던 사면으로 된 커다란 건물(스레드냐야 포디야체스카야 Srednaja Podjacheskaja 15/104)까지 걸어 가보았다.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 7백 30여 걸음의 거리였다. 라스콜리니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는 걸음 폭이 비슷한 모양이다. 도시 작가의 원형이요, 러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인도주의 입장의 사실주의 작가이며, 인간심리 묘사의 대가인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이 작품 집필 당시 이 지역에 살았다.

운하를 따라 땀을 흘리며 거리와 다리를 걷노라면 작가 자신과 작가가 창조한 주인공들의 당시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 지독히 더운 여름 날씨에 운하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 먼지 나는 초라하고 삭막한 레닌그라드의 뒷골목 거리. 오늘날 누구든지 <죄와 벌>을 읽고 이 지역을 산책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것을 목격하고 느낄 수 있다.

레닌그라드는 당시에는 성경에 나오는 성자 베드로(St. Peter)의 이름을 따서 성 페테르부르크로 불렀다. 혁명 후 한때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불렀다가, 공산주의 국가 수립 후, 레닌이 죽자 그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로 불렀다. 1991년 5월에 시민 투표에 의해 다시 제정러시아 때 이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환원하기로 결정하였다. 18세기 초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서구화시키기 위한 전초기지로 핀란드 만의 습지에 건설한 도시다. 서북쪽을 향해 흐르는 네바 강가의 습지를 운하와 다리로 연결해 세운 도시로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불린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서 약 2세기 동안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고, 특히 이탈리아의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세운 고전주의 양식이 건물들이 많고 아름다워서 또한 '북극의 베네치아'로 불려졌다. 1917년 혁명 후 모스크바에 수도로서의 역할을 빼앗겼지만 문학과 예술의 도시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죄와 벌>의 무대 같은 빈민가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대도시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작품에 나오는 센나야(건초) 광장(현재는 평화(Mir)의 광장) 주위는 빈민굴 지역으로 가난한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가 사랑하며 살던 곳이다. 또 노동자, 부랑배, 술주정꾼들이 셋집을 얻어 살던 지역으로 문학사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묘사된 곳을 하나하나 밝혀냈고 화가들은 화폭에다 이곳을 자세히 담기도 했다.

또한 작가의 손자인 안드레이 F. 도스토예프스키도 작품에 나타난 집들을 밝혀냈고, 문학사가 A. M. 도쿠소프는 1959년 <레닌그라드 문학기념 도시>라는 책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작가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았다는 스톨야르느이 골목길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술취한'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1865년 <페테르부르크 신문>은 이 골목길을 따라 16개의 건물에는 18곳의 술과 관련된 시설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톨야르느이 골목길이 연해 있는 보즈네센스키 대로는 긴 환락가를 이루고 있었다. 6개의 여인숙, 19개의 선술집, 11개의 맥주집, 16개의 술 저장소 등등. 그 중 한 여인숙에 악명 높은 주인공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살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살던 집의 현재의 주소는 그라쥐단스카야 거리 19/5번지이다. 이는 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전문가 N.P 안찌패로프가 1923년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라는 책에서 밝혔다. 이는 4층 건물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살던 방의 내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알론킨 집에 살던 방의 내부와 흡사하다고 사가들은 밝히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집에서 한쪽으로 나오면 예카쩨리닌스키 운하로 나오고 다른 한쪽으로 나오면 Na-Go 거리와 만난다. 이 소설에 사용된 거리와 다리의 약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집은 예카쩨리닌스키 운하에 연해 있는 스레드나야 포디야체스카야 15/104 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거대한 사각형 6층짜리 건물로 두 개의 마당과 두개의 대문이 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문전에서 몇 걸음이 되는 지도 알고 있었다. 꼭 7백 3십 보였다. 이것은 언젠가 공상에 열중하고 있었을 때 한번 세어보았던 것이다. (중략) 지금 그는 그 계획을 미래 해보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가슴의 울렁거림은 더욱 심해져갔다.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과 신경성의 전율을 느끼면서, 한쪽 벽은 도랑에 면하고, 다른 한쪽은 XX거리에 면해 있는 굉장히 큰 집 가까이로 걸어갔다. 이집은 전체가 여러 개의 조그마한 아파트로 되어있으며,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 제빵사, 자물쇠 장수, 요리사, 여러 잡종의 독일사람,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점은 아가씨들, 하급 관리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드나드는 거기에서는 서너 사람의 문지기가 일을 보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 중의 아무와도 만나지 않은 것을 자못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문에서 곧 오른쪽 층계 쪽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다행히도 그 층계는 어둡고 좁은 '위 층계'였다. 그러나 그는 만사를 잘 연구하고 있었다. (중략) 4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중략) 이 층계와 넓은 곳에는 당분간 노파의 방 만이 있게 된 셈이 군 거 잘됐다.”

 

돈 때문에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소냐 마르멜라도바처럼 라스콜리니코프도 세든 사람들로부터 작은 방을 되 빌려 하숙하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러 번 자기 집 계단을 올라간다. 더운 여름날 밤 그는 자기 방까지 가자면 13개의 계단을 극복해야 한다. 이 가파른 계단은 마치 골고다의 언덕길과 흡사하다고 어떤 비평가는 논하고 있다. 매번 계단 오르기를 극복하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무자비할 정도로 단조로운 나날들 즉 단계를 이겨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연구가 M. M. 바흐찐은 그의 책 <도스토예프스키 미학의 제 문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위층, 아래층, 계단, 문지방, 현관 출입구, 층계는 '주요한'의미를 띠고 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형세가 급변하고 기대치 않던 운명의 우여곡절이 일어난다. 사실 무엇보다도 라스콜리니코프는 문턱, 즉 안과 밖의 경계선에서 살고 있다. 경계선 테마는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주요 테마 중의 하나다. 주인공은 협소한 다락방에 살고 계단을 통해 곧바로 광장으로 나가고 심지어 방을 나설 때 자기 방문조차 잠그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계단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만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주인공이 마르멜라도프네 집에 갈 때도 계단을 올라간다. 전당포 노파의 집 계단, 여기서 그는 살인 후 가장 무서운 순간을 체험한다. 또한 경찰서에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형사의 사무실로 올라갈 때 그는 가장 가파른 계단과 맞부딪친다. 이처럼 <죄와 벌>에는 계단 외에 모서리, 교차로의 테마가 독특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기 집에서 나와 전당포 노파의 집까지 가는 도중에 예카쩨리닌스키 운하에 연한 거리 73번지를 지나간다. 이곳에는 소냐가 살던 집이 있다. 대부분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집처럼 소냐 네가 새든 집도 모서리 집이다.

교차로의 모서리에 있는 집은 주인공들로 하여금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주기도 하지만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망설임도 불러일으킨다. 라스콜리니코프(Raskolnikov)라는 이름 자체도 '이중인격, 분열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콜(Kol)의 콜롯(Kolot)는 '분열시키다, 쪼개다'의 뜻이며, 라스(Ras/Raz) 접두사는 '두 동강으로'라는 뜻으로 라스콜리니코프는 '두 여인의 머리를 쪼개는 자'라는 뜻도 된다. 콜롯(Kolot) 라는 동사의 그리스 어원은 '분열된 마음'이라는 뜻도 있다. 또 러시아어 라스콜(raskol)은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17세기 분리파교도(Old believers)들은 전통을 고수하다가 스스로 반동적이 되고 학대받게 됐다. 그라즈단스카야 거리와 프르제발리스카야 거리의 교차점에 서면 모두 네 방향을 바라볼 수 있고 동시에 건물들의 벽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긴박한 궁지가 늘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다녔다. 그는 이런 상황이 생매장당할 것 같은 자기 다락방으로부터 탈출할 구멍을 그에게 주지 않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선술집에서 술에 취한 가난한 관리 출신 마르멜라도프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어떤 인간이라도 어디든지 갈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 하거든요, 꼭 가야 할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집 딸년이 처음으로 황색 감찰(창녀 허가증)을 가지고 나갔을 때, 나도 역시 나갔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한동안 공중에 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도, 소냐도,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결국 둘은 시베리아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볼쇼이 대로와 시에즈진스카야 거리 교차로 모서리에 있는 소방서 망루 옆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코쿠쉬킨 다리 옆에는 <죽은 혼>과 <검찰관>과 <네프스키대로>의 작가 고골리가 한때 살던(1829-31) 즈베르코프 집도 있다. 여기서 스톨야르느이 골목길을 따라가면 당시 말라야 메쉬찬스카야 거리로 불리웠던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 왼쪽 구석 9번지 건물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1864년 4월부터 살다가 8월에 맞은편 7번지로 이사했다. 이 건물은 차 도매상인 알론킨의 소유였다.

당시 대상인은 상인들 세계에서 정당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듯이 대상인 알론킨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물질적 곤궁을 알고 있어, 집세를 독촉하지 않으면서 작가가 집필하고 있는 창가의 불빛을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첫 아내와 형 미하일이 죽고 잡지 <에포하>(시대)와 <브레먀>(시간)는 폐간하게 되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형의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미리 돈을 받고 출판업자 스쩰로프스키와 한 달 안에 장편 하나를 써주기로 거의 불가능한 계약을 맺었다. 그는 자기를 도울 속기사가 필요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는 속기사 학교의 우수생으로 1866년 10월 초 알론킨 집 앞에서 지갑 속의 쪽지를 꺼낸다.

“스톨야르느이 골목길, M. 메쉬찬스카야 모서리, 알론킨 건물, 아파트 13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을 것”.

그녀는 이 작가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벌써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토대로 한 소설<죽음의 집의 기록>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에서 <죄와 벌>의 첫 장을 썼다. 당시 상황을 후에 안나는 이렇게 회사하고 있다.

11시 25분에 나는 알론킨 집을 찾아가서 수위에게 아파트 13호를 물었다. 건물은 큼직했고, 수공업자들과 장사꾼들이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가 많았다. 그것들은 <죄와 벌>에 나오는 집을 상기시켰다. 아파트 13호는 2층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체스판 무늬가 있는 초라한 초록색 상의를 걸친 중년의 하녀가 문을 열었다. 그 후 나는 곧 <죄와 벌>을 읽을 때 이런 옷차림이 마르멜리도프네 식구들의 묘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도움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장편 <도박자>를 26일 내에 끝마칠 수 있었다. 작가는 이제 한숨 돌릴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도박자>는 인간의 도박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소설이다.

그러나 <러시아 통보지(Russkij Vestrik)>잡지사는 <도박자> 다음에 연재할 원고를 독촉했다. 또다시 속기로 받아쓰기가 시작됐다. 안나의 재빠른 솜씨로 1866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끝마쳤다. 이 두 작품을 완성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고 곧 약혼했다.

그 후 둘은 이곳저곳으로 여행과 이사를 거듭했다.

1878년 도스토예프스키는 1846년 몇 달을 살면서 <이중인격>을 완성했던 쿠즈네츠느이 골목길 5번지 클리코스트렘의 건물로 이사해서 사망할 때인 1881년까지 이 아파트 10호실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푸쉬킨에게 바치는 글>와 <작가일기> 등을 썼다.

안나는 훗날 이 아파트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파트는 6개의 방으로 구성돼있다. 거대한 책장이 있고, 현관과 부엌은 2층에 있다. 쿠즈네츠느이 골목길을 향해 7개의 창문이 나 있고, 현관과 부엌은 2층에 있다. 그곳에 남편의 서재가 있다. 거기에는 대리석 책상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복도가 거실까지 뻗쳐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몇 해를 보낸 이 아파트는 부인 안나의 명에 의해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왔다.

1918년 혁명 후 스탈린 시대(1953년)까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소련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971년 11월 13일,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1백 50주년을 맞아 문학기념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국내외서 문학 애호가와 어린이들의 발길이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건물 정면에는 건축가 M. E. 예고로프와 조각가 N. A 소꼴로프가 만든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이 걸려 있다. 매년 한국의 <현대문학> 잡지가 3000여명의 한국작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영향 받은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라고 하면 거의 매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꼽는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안나 도스토예프스카야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Анна Григорьевна Достоевская, 1846-1918)는 러시아의 회고록 저자, 속기사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아내이다. 결혼 전 성은 스니트키나이다.

안나 스니트키나는 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였는데, 그녀의 친구들은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따서 안나를 네토츠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였다.[1] 안나는 20세에 당시 빚으로 인해 출판업자에게 소설을 제때 넘기지 못하면 모든 저작권을 몰수당할 위기에 놓여 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속기사로 고용되었다. <도박꾼>(1866), <죄와 벌>(1866)은 도스토옙스키가 구술하면 그녀가 속기하고 다시 정서하는 방식으로 집필되었다. 안나는 총명하고 유능한 여성이었으며 까다로운 성품의 도스토옙스키도 이내 안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병든 예술가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새 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청혼했고 18674, 안나는 21세의 나이에 46세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빚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과 도박으로 인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던 도스토옙스키를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며, 작품을 직접 인쇄하여 판매하는 등 출판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말년에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전기적 내용을 담은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의 일기>(1867)는 사후인 1923년에, 회고록인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1925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안나   참조)

 
 

 

 

러시아 수프 보르쉬치

 

거리모습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서 만난 시베리아에서 온 가족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

 

인간혼과 고뇌의 예술적 표현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년)는 세계 문학 속에 비유할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의 가난한 군의관 가정에서 태어나 성 페테르부르크 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관직에 나아갔으나 곧 사직하고 창작에 몰두했다.

그의 초기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1845)>과 <백야(1848)> 등에서는 도시 뒷골목에 사는 빈민의 심리를 비상할 정도로 예리하게 전개했다. 그 기조를 이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인간적 동정이다.

그는 사회주의 이상을 러시아 사회에 실현시키려는 꿈을 꾸며 페트라셰프스키 비밀결사운동에 참가했다가 1949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처형대의 총구 앞에서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됐다.

4년간 팔과 다리에 족쇄를 차고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감옥 생활을 하고 그 후 6년간 시베리아 군 근무를 거치면서 정신적, 사상적 변혁의 길을 걷는다.

그는 사회주의 무신론을 버리고 싶은 종교적 인간이 되어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제카브리스트 가족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얻은 성경을 몇 번이고 탐독했었다. 이후 모든 생활 조건에서의 변혁의 의의와 가능성을 부정하고, 인간 불행의 원인과 불행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인간 내부로부터 추구하게 됐다.

그는 러시아 정교에서 구원의 길을 모색하려 했다. 그는 인간 고뇌의 원천은 인간의 혼 속에 있는 원죄에서 기인된 것으로 사회제도의 제 조건과는 무관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악과 죄와 투쟁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도덕적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 구제의 길은 신에게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신론으로 신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을 구제의 길로부터 봉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유형 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현실 속의 새로운 비판의 길을 떠나 형이상학의 예술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는 <죄와 벌>에서 반역과 폭력, 혁명을 상징하는 라스콜리코프의 오만성과 무신론을 소나의 온순성과 신앙심으로 대립시켜 후자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악령(1872)>에서는 인류의 다수자의 이름으로, 즉 혁명의 이름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국법과 신의 법도를 파괴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을 악령에 홀린 자로서 자신을 망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치(1869)>의 주인공 므이쉬킨 공작은 라스콜리니코프와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 이상과 확실하고 완벽한 개인적 초상화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므이쉬킨은 러시아 전래 동화에 나오는 ‘지혜로운 바보’(바보 이반)의 19세기적 화신이다.

그는 백치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의 간질 발작과 지독히 예민한 감수성은 평범한 사회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꾸려나가기에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비평가는 므이쉬킨을 돈키호테와 예수를 합쳐놓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80)>속에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의 그의 기본적인 주제와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 작품은 카라마조프 가문, 아버지 표도르, 장남 드미트리, 차남 이반, 삼남 알료샤, 그리고 표도르가 백치 여자의 몸에서 얻은 스메르쟈코프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전개되는 갈등 어린 이야기다.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는 장면을 정점으로 하고 있으며, 알료샤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파멸을 맞게 되고, 폭력 옹호자 이반의 무신론에 대하여 온순한 알료사의 기독교적인 승리를 그려 나갔다.

도스토예프스키 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혁명과 사회주의의 길, 개인주의의 길, 온순함과 무지함의 길, 그는 첫 번째 길을 버리고 세 번째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혁명과 사회주의, 나아서 서구 자본주의를 악마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내심 자신의 기독교적 무저항 정신이 승리하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옛날의 혁명정신이 숨어서 부단히 항의의 외침을 내질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악마의 친구인 라스콜리니코프,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 이반 카라마조프 등을 작가는 비난하면서도 역시 흥미 깊고 생기 찬 형상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반대로 작가의 사상을 펴기 위해 긍정적 인물로서 묘사한 소냐 마르멜라도바, 므이쉬킨, 알료샤 카라마조프 등은 생명 없는 형상으로서 독자는 그 현실성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이리하여 작가의 사상은 작품 속에서 충분하게 형상화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작가 자신에 의하여 부정되어 그의 작품은 객관적으로 반영된 생활의 진실, 바로 그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이는 과거의 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서도 가끔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예술은 언제나 진실을 요구하며, 허위와의 공전이 허락되지 않는다. 즉, 참된 예술적 형상은 이따금 작가 자신의 세계관보다도 넓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뇌의 찬미자라고도 말한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작가로서, 전달하려는 사사, 즉 모든 악을 용서하는 사랑과, 모든 죄를 속죄하며 회오시키려는 가르침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격심한 고뇌인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고뇌를 그리려 한 것은 이를 찬미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훌륭한 문제로서 고뇌하는 인간혼의 절규를 없애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원죄를 속죄했다는 의식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작품의 불변의 모티브는 아니었다. 그가 매번 도시의 뒷골목과 지하실과 천정 밑의 골방 사람들, 가난한 학생, 하급 관리들, 그리고 학대받고 수모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로이다. 특히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어린이를 그리는 그의 필치는 강력한 항의가 스며 있다. 이러한 무권리한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그의 형이상학은 그림자를 감추고 그 자신만이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자태를 나타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독특한 문체를 갖고 있다. 그를 문장가로서 부족하다고 보는 비평가도 적지 않다. 원고를 여덟 번이나 고쳐 쓸 여유가 있었던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와는 달리 언제나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작품을 써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문장을 다듬을 여가가 없었다. 그의 문장은 긴장과 충동적 강력성이 있다. 심리 묘사의 깊이에 있어서 그에 필적할 작가는 없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그도 가끔 공포감이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을 묘사하는데, 이는 생활의 제 조건 자체를 가장 긴장된 폭발적 순간으로 그릴 때의 수법이다. 가끔 범죄가 모티브로 된 것도 생활의 모순과 갈등을 아주 예리한 발상으로 표현할 때이다. 그는 레스코프와 같이 러시아 작가 중에서는 드물게 구성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서로 복잡하게 엉켜서 때로는 상반된 줄거리가 하나로 얽혀 전체를 구성한다.

모든 출중한 예술가의 경우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적 재능은 국민의 운명에 대한 관심과 굳게 결부되어 있다. 그는 부당하게 학대당하고 수모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비통한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농노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러시아 사회의 예술적 연대기이며,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중요 문제를 제기하였고 작가로서 그 해답을 최선을 다해 던져주려고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 묘비: 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티흐빈 묘지(Тихвинское кладбище:Tikhvin Cemetery)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 있는 역사적인 묘지다. 차이코프스키 등 주로 예술가들의 묘지(Некрополь мастеров искусств)가 있다.

 

<죄와 벌>에 나타난 초인사상

 

그의 대표작 <죄와 벌>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사람을 끈다. <죄와 벌>의 줄거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특정한 지역에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특정한 시간에 한정돼 있다.

1860년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법대생인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는 대학 강의를 포기하고 서구에서 러시아로 이입된 새로운 사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류를 구제할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적인 대학 강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사상은 분열되어 있다. 드디어 그는 도끼로 전당포 노파와 죄 없는 노파의 여동생까지 살해했으나 그 돈을 유효하게 쓰기는커녕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자기가 초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정신착란증에 걸린 계모와 자기의 언니 동생들을 위해 몸을 파는 이 불쌍한, 그러나 정신적으로 고상하고 신앙심이 깊은 소냐 한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 행위를 고백하고 구원을 갈망한다. 그는 갑자기 몸을 굽혀 방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발에 입 맞춘다.

이 작품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는 서로 상반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즉, 라스콜리니코프는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라고 하는가 하면, 소냐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들 둘은 점차 서로 사랑하게 되고 소냐의 사랑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무신앙을 이긴다. 이 소설이 발표되자, 당시의 러시아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로 유배될 때까지 자기의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죄의 본질은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는 점이다. 범죄의 결과로 당연히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민하게 된다. 거리에 소냐가 나타나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이상의 여인으로 묘사된다. 소냐는 기독교적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 사랑에 의해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은 이룩된다. 즉, 기독교적인 사랑에 의해서만이 인간의 구원은 가능하다는 명제를 역석하면서 이 작품은 끝난다. 또 여러 주인공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구원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비정상적이고 괴이하지만 강한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단점은 역시 너무나 자주 우연한 사건이 지배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죄와 벌>은 1860년대 러시아 수도 도시의 인간들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오늘날 레닌그리드에서 125여 년 전 소설 속에 그려진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 인민의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난 70여 년간 공산주의 시대는 공허의 기간이었다고 한 러시아 학자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1991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이모저모

 

 

에르미타주박물관(구 동궁 광장)

 

동궁광장에서 예카쩨리나와 댄스

에르마타주관객
보트킨의&amp;amp;amp;amp;amp;amp;amp;lt; 춤&amp;amp;amp;amp;amp;amp;amp;gt;
미술학교 학생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별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하자 톨스토이는 이웃도시 모스크바에 살면서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를 한번도 못 만난 것울 후회했다. "작가들은 허영심이 많고 질투가 심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와 견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