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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3, 아도서숙(亞島書塾) 이야기. 무섬의 봄소식은 강가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와 더불어 온다. The news of spring in Museom village comes with the sound of ice breaking in the river.

Kyuchin Kim 2022. 8. 8. 18:50

 

 

나의 일생 3

무섬의 봄소식은 강가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와 더불어 온다.  봄이 오면 만물이 생동한다

The news of spring in Museom comes with the sound of ice breaking in the river. When spring comes, everything comes alive.

무섬마을 동네 청년들이 '아도서숙'이란 한글학교를 세워서 일제가 탄압하여 못 가르치게 한 한글을 가르치면서 반일 운동을 하다가 사람들이 옥고를 치루고 고통과 죽임을 당했다. 영주신간회가 폐쇄된 이후 여기가 주 본거지가 되었다. 

                                                                 

                                                    

정월달에는 봄을 알리는 계절 중에서 입춘(立春)이 있다. 지난 겨울 엄동설한에 문풍지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다. 한겨울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얼어붙는 추위는 갔으나 아직 날씨가 제법 쌀쌀하고 춥다. 한겨울 내내 꽁꽁 얼었던 강물이 풀리면 녹아내리는 얼음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무섬의 봄 소식은 강가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와 더불어 온다. 얼음이 녹아 깨지는 소기가 저 멀리 강가에서 딱딱하고 들려오면 봄이 오는 소리다. 강물은 아직 차나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들과 밭에는 끄트머리가 누런 보리에 봄 서리가 하얗게 내리기도 한다.  이때는 보리밭을 발로 밟아줘야 보리가 말라 죽지 않고 뿌리를 잘 내린다.

사랑어른이 아이들을 시켜서 벼루통을 내어 놓고 먹을 갈아서 붓으로 한지에 立春大吉(입춘대길), 建陽多慶(건양다경)이란 글자를 써서 대문에 붙이라고 하신다. 또 기둥 여기저기에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세영(子孫萬世榮) 등의 글씨를 써서 붙인다, 옆집 앞집 뒷집 큰집 작은 집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새봄에는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시골에서는 이처럼 절기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 우수(雨水)가 찾아오면 눈과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가는 계절이다, 이때부터 읍내 5일 장에 가서 씨앗도 사오고 면사무소에서나 이장이 나눠주는 새로운 씨앗도 받아 온다. 사랑어른 삽을 들고 논밭으로 가서 물길을 만들기도 한다. 또 벌레나 해충 알을 죽이기 위해 밭두렁 논두렁을 태우기도 한다.

 

                                         

                                         종자를 뿌릴 때 쓰는 왕골 종다래끼 짚 종다래끼 싸리 종다래끼

                                                                     싸리로 만든 싸리발

 

                                                    가는 새끼줄로 만든 소쿠리

 

                                                           대나무로 만든 채반 소쿠리

 

 

겨울 농한기에는 시아버님과 사랑어른이 왕골, 새끼나 싸리나무로 다래끼 종자 뿌릴 때 쓰는 종다래끼 거름 져나르는 마당 쓰는 싸리비도 만든다. 싸리돗자리도 만들고 왕골로 우아한 왕골돗자리도 만든다. 아이들이 자라면 아이들 지게도 만든다. 가는 새끼줄 꼬아서 소쿠리도 만들고 닭 둥지도 닭 우리도 만든다. 시아버님은 고드레돌로 골돗자리를 아주 잘 만드시고  정교한 골로 정교하고 단단한 신발도 만드신다. 짚으로 만든 짚신보다 훨씬 오래 신는다. 하나같이 농촌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대부분 직접 만드신다.

시아버님은 집안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직접 만드셨다. 개꼬랑지로 만든 빗자루는 안방 쓰는 데 제일 좋다. 매년 식구가 보신용으로 잡아 먹는 삽살개의 꼬리를 잘 무드질하여 싸리나무 자루로 만들었다. 사랑방은 시아버님이 어디서 말총을 구해 오셔서 손잡이를 크게 하고 만드셨다.

 

       짚으로 만든 닭 둥지: 봄이 되면 닭이 알을 10 -15개정도 낳으면 품어서 병아리를 깐다.

 

                   대나무로 만든 닭 우리: 우리집에는 네모 반듯한 새끼줄로 만든 닭 우리도 있다.

                                                 싸리비와 대나무비

 

 

                                 왕골로 만든 돗자리

                                                                    돌 고드레돌로 왕골 돗자리 만들기

 

                             가는 새끼나 짚을 말아서 만든 짚신 아이 짚신과 어른 짚신

우리 시아버님이 짚신 만드는 도구를 늘 닦고 간수를 잘하셨다.  손재주가 좋으셔서 아무거나 잘 만드셨는데 특히 왕골로 단단한 짚신을 잘 만드셨다.

 

정월달을 쉬어가며 지내던 농가는 음력 이월이 되면 바빠지기 시작한다. 겨울 농한기가 끝나고 농사를 시작한다. 마당에 모아놓은 거름을 소는 소바리로 사람은 지게로 밭으로 논으로 실어 나른다. 집안이나 밖이나 생기가 돈다. 이월 초하루에는 대게 봄맞이로 집안에 대청소를 하기도 한다.

 

어느 해 어느 날 영양 청기서 손 아래 시누이가 왔다. 하도 오래되서 연도도 날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설 지나고 보름도 지나고 정월 말쯤 된다. 정말 오랜만에 친정에 왔다. 나와는 각별한 관계다. 내가 무섬 시집와서 그래도 가장 가까운 말벗이었다. 내보다 3살 아래라서 우리는 서로 잘 이해하고 서로 도우고 했다. 새언니 새언니 하면서 나를 무척 따르고 나와 뭐든지 상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우애가 좋은 걸 보고 이웃에서 저들은 시누이가 아니라 오누이처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시집오고 몇 년 안 되어 손 아래 시누이도 저 멀리 일월산 영양 청기로 시집을 갔다. 마치 정든 누이동생이 떠나가니 슬픔이 몰려왔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서로 여인의 어려움을 하소연을 서로 나누었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편지를 주고 받곤해서 너무 반가웠다. 

이렇게 친정에 오니 시어머님이 무척 좋아하신다. 시아버님도 오랜 만에 시집간 딸이 오니 반가워하신다.  우리 시누이는 이야기도 잘하고 다정스럽다. 시어머님과 이야기꽃을 피운다. 잠시도 쉴세 없이 안방도 집안도 정리하고 시어님이 하시던 옷가지 꿰매는 것도 도와주고 어깨도 만져주고 한다.  "어매어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되네." "오냐 내걱정 말거레이. 너희들 식구들 아이들 다 잘 있니 이서방도 아무탈 없고." "응 우리 다 잘 있데이." "니 집 사돈네도 안녕하제이. 모시느라 니  고생이 만체이. 부모나 마찬가지니 잘 모세야지. 옛말에 약해도 부모요 글로재도 부모요 말로재도 부모란 말이 있단다. 안 아프면 다행이제. 늘 하듯이 시어머님을 각별히 잘 모셔야 된데이.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데이. 부디부디 성심껏 돌보거레이." 오랜 만에 만난 모녀는 이야기가 끝이 없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눈깔사탕과 캬라멜:  무섬 동네를 벗어나보지 못한 아이들은 객지에서 고모가 가지고 온 진기한 사탕을 무척 좋아한다. 먼 나라 먼 곳 이야기도 듣기를 좋아한다. 특히 경이는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성가실 정도로 물어본다. 객지에서 온 집안 식구니 더더욱 궁금한게 많다.

 

아이들이 들어와서 왁짜지껄하다. 청기 고모가 캬라멜이나 눈깔사탕이라도 가져온줄 알고 주위에 둘려 앉는다.  보따리에서 누가를 꺼내어 아이들에게 두 개씩 노놔준다. 모두들 우리 고모아지매 고맙데이 최고데이 하면서 받아 들고 나간다. 집안에 생기가 돈다. 이야기 잘 하는 고모가 오면 아이들은 둘러 앉아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옛날 옛날에 호랭이 담배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또 한다. 얘들아 부모님 말씀 잘들으면 호랭이도 감복해서 물어가지 않은데이. 옛날 일월산 밑에 마음착한 효자가 살았데이. 어느날 어무이가 무척 아파서 감홍수를 먹고 싶어했단다. 효자는 한겨울이라 감홍수를 구할 데가 어디일까 하고 집을 나섰데이. 아무리 걸어가도 감홍수를 찾을 수 없어서 절망에 빠졌데이. 집에서 시름시름 알코있는 어무이 생각에 기가막힌게라. 그러다가 지쳐서 어느 골자기 큰 나무아래 털썩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갑자기 구렁이 떠가도록 큰 호랭이 울움소리가 나서 정신을 바짝 차랬지. 잘못하면 호랭이한테 물려가 죽을것만 같아서. 그런데 호랭이가 이외로 효자 앞에 넙죽 엎드려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했데이. 고모 사람이 소등에 타듯이 호랭이 등에 타고 갈 수 있니껴. 그럼 그러고 말고 호랭이 등에 올라앉으니 호랭이가 날아가듯이 빨리 달려 어느 산골짜기 불발킨 집에 도착했데이. 그 집에 들어가니 마침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상에 홍수 대신 잘 삭은 김(고염)을 한사발 올려 놓고 제사를 막 끝내고 언복(음복)을 나누는 참이었지. 그래서 효자가 우리 어무이가 많이 아파서 조식을 끈고 홍수를 구해오라 해서 여기까지 달려 왔는데 홍수 대신 김을 달라고하니 주인 아지매가 지극한 효심을 딱하게 여겨 김을 싸주었지. 김을 들고 나오니 호랭이가 삽짝거리에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어서 다시 호랭이 등에 타고  집에 가져와서 어무이한테 겨울이라 홍수는 없고 홍수보다 더 달콤한 김을 갔다주고 어무이 병을 낫게 했단다. 아마도 그 호랭이가 네 어무이가 언젠가 산에서 호랭이굴에서 새끼들에게 밥을 준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제. 그리고 효도를 다하는 효자를 위해 짐슴도 감복했데이. 그러니 너거들도 언제나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가레이. 이제 이야기 끝났으니 그만 자자. 

                               호랭이도 감복한 효자의 지극한 효심

몇 년에 한번 시누이가 오면 집안이 온통 화색이 가득하고 떠들썩하다.  나는 시누이를 위해서 특별히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 겨울이라 먹을 게 별로 없다. 아이들 보고 저 거렁가 모래에 묻어둔 배추 한포기하고 무우 하나 파오라고 한다. 이이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쏜살 같이 뛰어나간다. 고모가 달콤한 사탕을 비가를 가지고 왔으니 저들도 저절로 신이 나는 모양이다. 땅속 석자 밑에서 파네온 배추로 부엌에 솥뚜껑을 거꾸로 해놓고 배추적을 부쳤다.

                                    배추적은 시어머님도 시어버님도 좋아하신다. 온 식구가 다 좋아한다.

시골에서 먹을 거라곤 이것 뿐이다. 시누이가 백설기를 조금해와서 온 식구가 함께 먹었다.  마른 맹태도 미역도 맬치도 가져왔다. 저녁에는 조밥에 쌀을 좀금 낫게 넣고 양대도 조금 넣어서 밥을 했다. 말린호박과 우무말랭이를 물에 불려서  맬치도 넣어 된장찌게도 하고 마른 맹태(명태)도 불려서 미역국도 끄렸다.

                                          미역과 명태 

밤이 되면 이웃이 모여서 또 이야기 꽃을 피운다. 모두들 와란아지매 와란할매 복덩이가 왔다고 칭찬한다. 그러면 시어님은 활짝 웃으시며 김치물과 김치전이라도 내어와서 막걸리라도 대접하라고 하신다. 어떤 밤에는 시누이가 시어머니에게 두루마기 가사를 꺼내 읽어준다. 올 때마다 버전댁한테 빌려 온 <부인언행록>이나 <한양가를> 읽어드리는데 들을 때마다 좋아하신다. <경노의 심곡>도 다시 꺼내 읽고 시어님에게 이야기해준다. 특히 두루마기 <화전가>를 나와 번갈아 읽으며 눈물도 흘리다가 서 손잡고 우시기도 한다. 시누이나 나나 비슷한 시집살이의 한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다. 시누이는 가사도 내보다 잘 읽고 글씨도 내보다 잘 쓴다. 시아버님이 붓글씨를 잘 쓰니 딸도 잘 쓰는 모양이다. 나보다 글씨체가 똑 바르다.  농한기 겨울밤에 유일한 낙이 이런 가사라도 읽고 듣고 하는게 무섬의 풍습이다.

청기로 시집간 시누이와 내게 가사를 많이 가르쳐준 우리 집안 버전댁(법전대) 아래 버전 댁 글씨는 그 댁의 성품처럼 품위가 있다. 

 

 

아래사진: 이서방(복희 신랑), 경순(석포아지매 딸), 복희(버전아지매 딸 이서방 부인), 희자(두월아지매 딸, 한학자 이동술 선생 부인), 진옥(둘매 내 맏딸)

 

 

가세 가세 화전을 가세 꽃지기 전에 화전 가세.

이때가 어느 땐가 때마침 삼월이라.

동군이 포덕택하니 춘화일난 때가 맞고.

화신풍이 화공되어 만화방창 단청되네.

이런 때를 잃지 말고 화전 놀음 하여 보세.

불출문외 하다가서 소풍도 하려니와

우리 비록 여자라도 흥체 있게 놀아 보세.

어떤 부인은 마음이 커서 가루 한 말 퍼내놓고

어떤 부인은 마음이 적어 가루 반 되 떠내주고

그렁저렁 주어 모으니 가루가 닷말 가옷일래.

어떤 부인은 참기름 내고 어떤 부인은 들기름 내고

어떤 부인은 많이 내고 어떤 부인은 적게 내니

그렁저렁 주어 모으니 기름 반동이 실하구나.

놋소래가 두세 채라 짐군 없어 어이할고.

상단아 널랑 기름 여라 삼월이 불러 가루 여라.

취단일랑 가루 이고 향난이는 놋소래 여라.

열여섯 열열일곱 신부여는 갖은 단장 옳게 한다.

청홍사 감아들고 눈썹을 지워내니

세붓으로 그린 듯이 아미팔자 어여쁘다.

  

또 어떤날은 윳놀이도 한다. 청기 일월산에서 베어서 만들어 온 싸리 윷이  최고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무섬서는 윷 놀 때 서로 상대편 중에서 기억력이 좋고 총기가 좋은 여자가 윷말을 쓴다. 전부 머리속에 기억하는 공중 윷말을 쓴다. 시누이도 총기가 좋아서 나와는 늘 반대편의 윷말 쓰는 것을 담당한다. 나도 윷말 쓰는 데는 우리 시누이 못지 않다.  시누이가 친정에 와서 지내는 날들은 늘 웃음이 가득하고 잔치기분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옛날 달력과  1960년 달력

단기도 병기된 경자년 달력, calendar에 신희(新禧)라고 썼다. 단군과 예수 그리고 전통 간지(干支)에다 영어와 한자어까지 골고루 병기(倂記)한 것이 별나다.

 

경칩이 지나면 농촌에는 새농사 준비로 바뻐지기 시작한다.

농촌에서는 음력날자와 절기가 잘 표시된 달력을 많이 거는데 영주 참의원과 국회의원이 선물한 것이다. 절기에 따라 2월에는 개구리가 땅속에서 뛰어나오기 시작한다는 경칩(驚蟄)이 있다. 이날부터 더욱 바빠진다. 이월 달에 햇볕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바깥나들이 하기도 좋다. 날 좋은 날 하늘에는 뭉게구름과 조개구름이 떠다니고 누렁이는 집 주위를 맘껏 뛰어다닌다. 그러나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봄이 찾아와 새싹이 돋고 나무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인다. 갑자기 눈발이 나릴 때도 있다. 차가운 봄바람이 꽃을 시새움한다고 하기도 하고 풍신이 꽃을 미워하기도 한다고 친정 할매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데 무섬도 마찬가지다. 특히 강바람이 꽤 추우면 산의 참꽃도 큰집 뒤안의 매화꽃도 옴추린다. 사람도 옴추린다. 그러나 곧 다시 따뜻해지면 집안이나 들이나 생기가 넘치고 더욱 바빠진다. 새들도 짝짓기 위해 울음소리가 요란해진다. 

 

음력 2월 중순(양력321-22일경)에는 춘분(春分)이 있다. 춘분은 밤낮의 길이가 같은 날이며 봄이 한창이다. 봄이 완연히 시작되는 계절이다. 산천초목이 생기를 발한다. 사람도 짐승도 벌 나비도 활발히 움직인다. 무섬에서는 춘분이 지나면 봄보리를 갈기 위해 밭을 소로 갈아 엎는다. 보리밭이나 밭가에나 들에는 달래 나이 봄나물 들나무를 캐서 먹는다. 봄처녀 치마속으로 봄바람이 불어오면 바람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어서 청명이라는 절기가 온다. 청명(淸明)이란 말 그대로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한식날과 함께 시작할 때도 있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는 말도 있다. 또 나라에서 정한 식목일인 양력 45일 경이다. 농촌에서는 이장이 나눠 준 과일 나무 등을 심기도 한다. 농사가 바빠 읍내 주변처럼 식목일을 크게 기리지는 않는다. 봄갈이를 본격적으로 하기 때문에 청명에는 날씨가 청명하면 올해는 농사가 잘 될 거라고 시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이때가 되면 슬픈 추억의 이야기를 간직한 할미꽃을 비롯해서 양지바른 곳에 산야초 꽃이 만발한다.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싹날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천만가지 꽃중에 무슨꽃이 못되어
가시돗고 등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하얀 민들레 꽃이 피고 민들레  꽃 씨가 바람에 날아가고 나면 할미꽃이 피어난다. 할미꽃의 고양이 수염이 마르면서 하얀 할미꽃 홀씨가 솜털로 변한다. 솜털과 함께 작은 까만 씨앗이 날아가 여기저기 퍼진다.

 

 

곡우(穀雨)는 곡식이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봄비가 내리는 날이다. 이 때부터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준비하며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든다.

농사에 중요한 비가 와야 하는 이 절기에 비가 안 오면 시아버님께서 "곡우에 가뭄이 들면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되고 석 자나 말라서 갈라진다" 라고 태산 같은 걱정어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다. 시아버님은 하늘빛을 바라보시고 "내일은 비가 올 것 같다" 하시면 정말 비가 올 때가 자주 있다. "곧 비 올지 모르니 마당에 설거지 빨리 하고 장독대 잘 덮어 두거레이" 하시면 그날은 비가 온다. 이처럼 농사가 본격 시작되면 농촌의 천수답에는 비가 가장 중요하다. 일 년의 시작인 봄의 계절은 농촌에서 가장 생기가 도는 시기이다. 새색시가 아이를 낳기도 하고 닭이 알을 까서 햇병아리가 마당에서 태양을 쪼이고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풀벌레나 모이를 쪼는 모습이 보기 좋다. 누렁이도 새끼를 낳는다. 산토끼도 들짐승도 새끼를 낳는다. 벌도 나비도 산새도 꿩도 알을 낳는다. 띠얏갱변에 따가운 햇살 속에 새가 자갈을 모아놓고 집을 만들어 알을 낳는다. 2주 정도 지나면 새 새끼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가까이 가면 폴짝 날아 도망간다.       

 

 

   강변에 자갈 위에  물때새가  둥지를 자갈 사이에 땅을 오목하게 파서 만들고 4개의 알을 낳는다.

 

 

                                                                        지르매(질마)

 

                                                                     옹구

봄이 오면 논에 거름을 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소등에다가 지르매(질마 길마)를 얹고 단단히 고정시켜야 거름을 잘 실을 수 있다. 사랑어른은 능숙하게 하신다. 지르매는 늘 소 마구 문 옆 처마에 보관한다.

머섬 동우도 배우더니 척척 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옹구를 걸친다. 옹구는 거름 실어 나를 때나 감자나 무 배추를 추수해서 가져올 때 사용하는 발이나 새끼로 엮은 통이다. 집집마다 귀중한 농기구이다. 소도 거름을 싣고 가고 일군도 싸리로 만든 거름지게에 거름을 지고 간다.

 

 

                                            훅지(쟁기)로 논 갈기가 가장 힘든다.

                                             벼 심기전에 써레로 논을 고른다.

                              https://youtu.be/ZCtQFrg17vk

      써레질과 나래질이 끝나면 모를 심는다

 

 

 

가장 힘 드는 일이 무논을 갈아엎는 일이다. 일꾼이나 사랑어른이 훅지(쟁기)로 무논을 간다. 그리고 써래로 갈아엎은 덩어리를 부수고 다시 한 번 널판 번지로 쭉쭉 밀어야 논이 반듯해진다. 이 힘든 일을 하는 데 우리 암소가 일등공신이다. 가는 날은 특별히 농주 막걸리 적부치기 등 참도 잘 준비하고 점심도 많이 해야 한다. 소에게도 콩을 섞어서 쇠죽도 잘 쑤어서 먹여야 한다. 시아버님이 끌과 도끼로 길고 큰 통나무를 파서 만든 쇠죽겨통에 쇠죽을 준다. 밤에는 쥐가 남은 콩 조각을 먹으려고 달려든다. 논 가는 날은 사람도 소도 힘이 든다. 일 년 농사 증 가장 힘든 일이다. 아이들도 어른들이 쉬는 시간에 소를 앞세우고 훅지를 잡고 철벅한 논흙을 뒤집어보는 게 기특하다. 어른들은 똑바로 논을 가는 데 아이들은 소를 제대로 못 몰아 비뚤어지게 간다. 그래도 어른들 따라서 해보는 게 기특하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조금씩 농사일을 배워가는 게 기특하다.

 

 

 

벌 배메기와 병아리 배메기

 

벌 베매기를 하는 사람이 주인을 속이고 꿀을 따먹으면 그 이듬해 벌이 꿀을 안 만들고 날아 가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시아버님은 벌은 영물이라고 하신다.

 

우리 집에 안방이나 아래채 소 마구간 남쪽 벽면 처마 밑에 있는 둥그런 통나무 벌통에 벌들이 열심히 들락날락한다. 우리 사랑어른은 벌을 잘 키우신다. 봄에 벌이 너무 많이 나면 산골 아는 사람들한테 배메기를 준다. 나무에 여왕벌이 날아 앉으면 수만 마리의 일벌들이 따라간다. 그러면 바가지에 꿀이나 조청을 발라서 지난해 준비한 마른 쑥으로 벌을 살살 바가지 안으로 몰아넣는다. 그 다음 둥근 통나무 벌통 위에 고정시키고 이웃마을이나 산간 마을 술미나 소두리 석탑 동네에 배메기로 준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사랑어른이 배메기 준 집에 가서 꿀을 딴다. 꿀은 반반씩 나누어 갖는다.

시조모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어느 날 벌무리가 뒤안 감나무 가지에 둥우리져서 윙윙하는 걸 사랑어른(돌아가신 시조부)이 바가지에 조청을 발라 쑥 뭉치로 몰아넣어서 우리집 벌키우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집안에 경사 대대로 날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또 해주셨다. 벌 베매기를 하는 사람이 주인을 속이고 꿀을 따먹으면 그 이듬해 벌이 꿀을 안 만들고 날아 가버린다고 한다. 벌이 미물이지만 정직하게 벌을 길러서 원주인을 속이지 않아야 된다고 한다. 벌이 날아간 그 집에는 다시는 벌을 배메기로 주지 않는다. 시아버님도 우리 토종벌을 잘 키우셔서 꿀을 많이 따셨다. 시아버님은 집안에 사는 가축 들 중 벌이 제일 영물(靈物)이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벌을 아주 잘 다루시고 소중히 여기셨다. 벌이 없으면 꿀도 없고 꽃들이 수정을 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도 못 딴다고 하셨다. 이처럼 벌은 사람한테 아주 유용한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 집에 벌을 처음으로 시작하신 시조부가 돌아가셨을 때 벌집에 금줄을 쳤는데 그 밑으로 벌이 하얀 띠를 두른 채 날아들곤 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주어서 신비롭게 생각한 적이 있다. 벌이 영물임에는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 사랑어른도 벌을 정성껏 잘 기르셨다. 우리 조선 토종벌은 뭔가 신비로운 게 있는 모양이다. 이웃집들도 벌을 많이 키우셨다. 집집마다 처마 밑에 둥근 벌통이 놓이고 봄이 되면 벌들이 열심히 들락날락하면서 꿀재료를 따온다. 여름에는 말벌이 날아와 일벌들을 물어 죽이고 꿀을 훔쳐 먹는다. 그러면 벌통 입구에 작은 망을 쳐서 작은 일벌만 드나들고 큰 말벌은 못 들어가게 해야한다. 그리고 보는 즉시 빗자루로 잡아 죽여야한다. 

 

 

                     15마리 정도 병아리와 암탉을 닭둥우리에 넣어서 산골 마을에 베매기로 준다. 

우리 사랑어른은 또 암탉들이 병아리를 많이 품으면 그것도 다 못 키우니, 15마리 정도 병아리와 암탉을 닭둥우리에 넣어서 산골 마을에 베매기로 준다. 보통 늦가을에 병아리가 다 자라서 살아남으면 절반을 우리가 가져오고 절반은 키운 집이 가진다. 물론 암탉은 우리가 다시 가져 온다. 암탉은 겨울 내내 알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랑어른은 닭과 벌을 많이 키우셨다. 이런 기술은 시조부한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이웃집의 암탉이 알을 놓는 것 같은데 달걀이 없다고 하면서 암탉을 가져오면 우리 사랑어른이 배를 만져보고 이 닭은 분명히 알을 낳으니 아침나절에 홰에서 내려와 모이를 먹고 어디로 가서 알을 낳는지 잘 살펴보라고 하신다. 큰 장닭이 있는 옆집의 나락가리나 나무가리 밑에 알을 몇 개 낳은 것을 발견한다. 그 옆집에 장탉이 힘이 세서 그 암탉을 거느린다. 우리 사랑어른은 이러 면에서 신통하시다. 어느 날 병아리 한 마리가 통시(뒷간)에 빠졌다. 사랑어른이 건져서 강가에 가서 씻어 헝겊으로 싸서 부엌 아궁이 앞에서 말려서 살아나게 하셨다. 부엌에 온통 냄새가 등청을 해서 혼났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병아리를 살려냈다. 이웃집 아지매가 "아이고 무새라(무서워라) 방석양반은 통시에 빠진 병아리도 살리시네" 한다.

사랑어른은 시어른을 닮아서 팽소에 자상하시고 집안 대소댁 일에 앞장서고, 동네일도 동네 가족이나 친족끼리 다툼이 있으면 조언도 자주하셨다. 그래서 나중에 젊은 나이에 이장도 하게 됐다.

 

 

 

3월 달이 오면 봄기운이 완연하다.

 

무엇보다도 강남 갔던 제비 오는 날이라고 하는 삼짇날은 음력 33(양력 4월초)인데 본격적인 봄이 시작한다. 농촌에서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논도 갈고 밭도 간다.

삼짇날 무렵이면 봄기운이 왕성하고 흥이 저절로 나, 특히 여자들은 산과 들로 몰려나가 참꽃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으며 봄을 맞이한다. 무섬에서는 화전놀이는 물 건너 띠얏 갱변에서 많이 한다. 갱변에서 둘러서서 노들강변이나 아리랑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고 춤을 추고 놀았다. 내 고향 방석이나 무섬에서는 이른 봄에 고리떡을 해먹었다.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어서 만든 떡이다. 또 부드러운 새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밥솥에 쪄서 떡을 만들어 먹으니 이것을 쑥떡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시아버님과 사랑어른들께 막걸리를 만들어 드리는 데 참꽃을 넣으면 향기도 좋고 맛도 좋아서 무척 좋아하신다. 나는 봄에는 참꽃 막걸리 늦가을에는 국화꽃 막걸리를 매년 만들었다. 이웃집 석포 어른이 늘 이런 막걸리 한잔 주시라고 찾아오곤 하셨다.

 

 

단오절: 그네타기와 씨름

 

단오(端午) 또는 수릿날은 한국 명절의 하나로, 음력 55일이다.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초하(初夏)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를 지내기도 하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한숨돌리고 하루 푹 먹고 마시고 쉬는 날이다.  머슴도 일꾼도 식모도 다 쉬어가며 지내는 날이다. 

 

혜원 신윤복 (申潤福: 1758-19세기 초반) - 단오풍정 (端午風情)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중에서,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보물 제 527호 <씨름(단원 풍속도첩)>, 김홍도, 26.9cm×22.2cm, 국립중앙박물관.

 

무섬에서는 초여름에 단오절(음력 55, 양력 6월초)이 오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한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어 놓고 푸짐하게 먹고 마시고 즐긴다. 농주막걸리와 떡과 적부치기는 기본이고 특별한 반찬을 준비해 오는 집도 있다.  중간 마 모래 밭에 큰 방구 소나무 밑에서 먹고 마시며 논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立夏)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따뜻한 양지바른 논의 묘판에는 볍씨의 싹이 많이 자랐다. 밭에는 보리이삭들이 팬다. 집안에서는 어린 뽕잎을 따서 누에치기를 시작한다. 논밭에는 잡초가 자라니 밭매기와 풀 뽑기에로 무척 바쁘다.

한창 농번기이지만 단오 날은 모두들 쉬면서 논다.

 

 

방석 우리 친정 마을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무섬 마을에서는 마을 앞 모래사장에 자라는 커다란 방구 소나무에 그네를 달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네타기를 즐긴다. 소나무 밑에서 청년들은 씨름도 하고 어른들은 팔씨름을 하면서 술내기를 한다. 가끔 짚으로 긴 줄을 꼬아서 줄 당기기 놀이도 한다. 물론 남정네들만.

 

여자들은 단옷날에 치장을 한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 창포물은 창포 잎과 뿌리를 삶아 서 만든다. 이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 윤기가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풍습 때문이다. 그리고 피마자기름으로 머리를 가다듬는다.

                        약쑥은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달아둔다. 

 

 

단오 때부터 하지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 년 동안 사용할 쑥과 익모초를 뜯어 말린다. 약쑥은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달아둔다. 이는 나쁜 벌레나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린 익모초는 말 그대로 여인들의 월경고통을 덜어준다고 하고 배가 아플 때 따려 마시기도 한다. 뜨거운 여름철 더위를 먹어 식욕이 없을 때 익모초 즙은 식욕을 왕성하게 한다고 시어머님이 자주 말하셨다. 농가에서는 약쑥을 뜯어 말렸다가 여름날 마당가에서 저녁을 먹을 때 피우면 모기가 몰려오지 않는다. 이날 시어머니는 부적을 만들어 기둥에 붙이기도 한다.

단오절에는 각종 놀이가 있다. 남자들은 마을 앞에서 그네를 타지만 여자들은 집 뒤 산협에 만든 작은 그네를 타기도 한다. 물론 김 씨네 일가끼리 총각 처녀들이 쌍그네를 타기도 한다.

특히 여자들은 술도 빚고 봄나물로 적도 부친다. 봄이 제철인 쑥으로 쑥떡도 해먹는다. 한해 내내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 쑥떡을 만들어 먹는다.

단오 날은 동네사람들이 특히 박 씨네 김 씨네가 한데 어울려 논다. 무섬 동네에서 가장 큰 행사인 앞에 이야기한 늦가을 외나무다리 놓을 때도 양성(兩姓)이 어울려서 화목하게 일을 하고 먹고 마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날이나 정초에는 양성이 함께 즐기지 않고 김 씨네는 김 씨 일가끼리만 박 씨네는 박 씨네 일가끼리만 제사지내고 음복을 나눠먹는다. 혼사나 환갑잔치에는 주로 남자들만 타성 잔치에 간다. 물론 무섬 내에서도 박 씨와 김 씨 간에 혼사를 치러서 사돈 간인 집안이 더러 있다. 원래 무섬은 물 건너 마을 머럼(탄산리: 원암)에서 3백 여 년 전에 박수할배가 무섬에 처음 정착했다. 지금 만죽재(晩竹齋)
란 고기와집인데 나와 일가라서 나는 각별히 친하게 지낸다. 
나중에 김 대 할배가 박 씨네 각시한테 장가들어 처가살이 하면서 식구들이 불어났다. 지금은 박 씨 가문보다 김 씨 가문이 더 많다. 박 씨들 중에서 깨친 사람들은 일찍이 마을을 떠나 안동 대구 등지로 출세하러 나갔다. 그러 때마다 여유가 있는 김씨 가문에서 집과 터를 사들이곤 했다. 시어머님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무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만죽재 댁 도기천 어른이 아들이 죽자 실망하여 마을을 떠나려고 집과 뒷산을 우리 친척인 게일 아지뱀네 한테 팔기로 문서를 닦았다. 이를 알고 박촌의 영감어른이 그래도 무섬의 상징인 박씨 종가댁이 김씨 가문에 넘어가는 게 섭섭하여 두 분을 불러다가 잘 타이르고 해서 매매계약을 물리게 했다고 한다. 우리 큰집 보갈 아지뱀네도 이사 나가는 박씨 가문한테서 집과 터를 샀다고 한다. 나중에 김 씨 들 중에서도 깨친 가정은 읍내로 안동 대구 서울 심지어 일본으로 유학가거나 돈 벌러 간 사람들도 꽤 있다. 나는 반남 박가라 무섬 박 씨네와 한 성이다. 박 씨 촌에 나보다 높은 항렬도 있고 낮은 항렬도 있어 처음 시집왔을 때도 덜 서먹한 게 사실이다. 무섬 큰 동네라 이처럼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화수회(花樹會)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꽃이 만발한 따듯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질 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아낙네들이 강가 갱변에 모여서 흐드러지게 노래를 부른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는 늙어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노래다. 모두들 흥겹게 어울려 합창을 한다. 그리고 재간 있는 아지매는 멋지게 자기 노랫말을 붙여서 부른다.

 

노세 놀아 젊어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요래 해서 날 속이고

저래 해서 날 속이고

속이는 당신은 좋거니와

속는 이 내 맘은 어찌 헐고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당신과 내가 정들 적에

아들자식 딸자식 잘 낳아

백년 살기로 약속한데

10년도 못살고 생이별이 웬말이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https://youtu.be/JwZTa3O7WuM

 

늦봄에 박 씨 가문은 박 씨끼리 김 씨 가문은 김 씨끼리 화수회를 간다. 꽃피고 잎 필 때 청명한 날 잡아서 놀러간다. 무섬은 갱변이 넓고 깨끗하고 커다란 버들나무가 강가에 가지를 느러뜨리고 있어 그 밑에서 놀기 좋다.

무섬동네 김 씨네는 단오절 무렵 여자들이 띠얏갱변이나 윗마 갱변에서 모여 하루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처녀들 젊은 며느리 아주머니들 근력이 좋으신 할머니들도 한데 어울려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고향을 찾아오는 딸네들도 함께 어울려 더욱 신나게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쑥떡 적 부침개 기지떡 등 맛있는 음식도 준비한다. 집에서 만든 막걸리도 마신다. 춤을 출 때는 아리랑이나 노들강변을 합창으로도 하고 독창으로도 한다. 두월댁은 자기 이야기를 가사로 구성지게 잘도 읊는다. 아리랑에 무섬 이야기를 담아 즉석으로 부르는 재주꾼도 있다. 석포댁은 노래도 잘 한다. 하루 노래하고 춤추며 보내면서 쉬기도 하고 고달픈 농촌 일을 잠시 잊어버린다. 처음에 무섬 갱변에서 모여서 노들강변을 부를 때 노들강변이 무섬 갱변을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무섬에서는 노들강변 대신 무섬갱변이라고 불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섬갱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무섬갱변 백사장 모래마다 밞은 자국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어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무섬갱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을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https://youtu.be/8NIBEIrhpGE

 

술이 좀 취하면 노래 소리도 더욱 다양해지고 긴긴 겨울에 안방에서 모여 앉아 읊조리던 창부타령 사랑타령을 더욱 구성지게 부른다. 웃마을 과부댁은 창부타령의 애틋한 가락을 쉬임없이 읊조리면 모두들 가슴 뭉클해진다. 당시에 호열자로 동란으로 청상과부가 많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모양이다. 어디 하소연할 데 없는 여인들의 삶이 슬프기 그지없어 그런 모양이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아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창문을 닫혀도 스며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인가 달빛이 사랑인가

텅 빈 내 가슴 속엔 사랑만 가득히 쌓였구나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보일 듯 아니 보이고 보일 듯 하다가 놓쳤으니

나 혼자 만이 고민한가는 게

그 것이 사랑의 근본인가

얼씨구 절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진 못하리라 아니 노진 못하리라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아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진다고 서러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은 나도 번연히 알건만은

모진 손으로 꺾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픈손가

숙명적인 운명이라면 너무나 아파서 못 살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나 노진 못하리라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

 

6월 초 사랑어른이 달력에서 절기를 보고 벌써 망종(芒種)이다 하시면 말 그대로 가을 곡식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이다. 특히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알맞은 때이다. 하지가 가까이 다가오고 무더운 여름이 시작한다. 농촌이 바쁘지 않을 때가 별로 없지만 장마와 가뭄 대비도 해야 하므로 이때는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다. 여름 누에치기 감자 수확 꼬치 밭 흙 돋우기 보리 수확 및 타작 그루갈이용 늦콩 심기, 일이 끝이 없다. 꼬치 밭에는 흙 돋우기 전에 목훅지로 흙을 먼저 간다. 꼬추들이 떨어지지 않게 소 대신 삼이가 앞에서 목쟁기를 땡기고 사랑어른이 목훅지로 조심스럽게 꼬치 심은 골과 골 사이의 밭 흙을 갈아 올린다. 그러면 경이나 숙진이가 그 흙을 호미로 고른다. 그래도 꼬치가 떨어지면 다 주워와서 먹는다.

꼬치들이 떨어지지 않게 소 대신 삼이가 앞에서 목훅지(쟁기)를 땡기고 사랑어른이 목훅지로 조심스럽게 꼬치 심은 골과 골 사이의 밭 흙을 갈아 올린다.  소를 사용해서 쇠훅지로 갈면 고치가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사랑어른을 따라 들로 가야한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데 시기를 놓치면 감자도 썩고 난리다. 감자 캘 때 이따금 썩은 감자는 냄새가 고약하고 흐물흐물 하지만 버리지 않고 따로 주 담는다. 집에 가져가서 독에 물을 넣고 푹 삭혀서 나중에 가루로 양대나 굵은 콩을 넣고 감자떡을 만든다. 시어머님과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감자떡

구름만 지나가도 비가 온다는 여름에는 하루도 쉴 날이 없다. 비가 많이 오면 일하기가 힘들어 사랑어른들이 띠나 부들로 엮은 되랭이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사까래를 들고 논물을 보러 가신다. 시집와서 오랫동안 이런 모습을 많이 봤다. 지금은 우산이 있어 다행이지만.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섬다고 모든 게 시가 있는데 이것저것 하다보면 때를 놓치는 게 많이 있다. 곡식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망종무렵 서둘러 모내기를 해야 했다. 무섬에서 모내기는 보통 큰집이 먼저 한다. 그러면 작은 집 식구들과 이웃들이 가서 도와준다. 그리고 그 품앗이 한 덕분에 작은 집이 모내기하면 큰 집 식구들과 이웃들이 도와준다.

                      띠나 부들로 엮은 되랭이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사까래(삽)를 들고 논물을 보러 가신다.

 

그래서 망종이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 고 사랑어른들이 말한다. 정말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또한 하지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까지 앞강에 은어가 올라오고 하지가 지나면 서천을 따라 영주나 내성천을 따라 봉화까지 올라간 은어가 알을 낳고 내려간다. 동네에서 청년들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두 번 씩 은어를 잡을 기회가 있다. 강물고기 중에서 은어가 수박향기도 나고 맛도 제일 좋다. 사랑어른들은 아이들이 은어를 잡아 오면 "어디보자 이리다고" 하시면서 회를 쳐서 막걸리 안주로 삼으신다. 보통 다른 피라미들은 매운 풋꼬치를 넣고 된장으로 찌개를 해먹는다. 무섬 와서 배운 물고기 반찬이다.

 

무섬에서는 반두로 은어와 물고기를 잡는다. 수박향기 나는 물고기: 은어

 

게메기(겨메기):  무섬에서만 하는 기가막힌 고기잡이 방법이다.

 

무섬에서만 하는 게메기로 잡은 피라미들과 붕어는 여름에 맛볼 수 있는 물고기다. 그것도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나 맛볼 수 있다. 여름마다 삼이 경이 숙진이가 게메기로 고기 잡는다. 또 강가 버드나물 뿌리나 바위 밑에서 맨손으로 뱀장어 메기 붕어들을 잡아 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물고기 반찬을 해먹었다. 마을 앞 강가에 물이 낮게 흘러가다가 작은 깊은 쏘가 지는 곳이 있다. 거기 낮은 물살이 흘러가는 곳에 마당 정도의 크기로 사까레로 모래를 파서 빙 둘러 막는다. 아래 입구 문에는 양팔 정도로 넓게 하고 약간 깊게 판다. 그리고 바로 그 양옆 둑에 물고기가 뛰어오를 수 있게 통을 만든다. 게메기 안쪽으로는 낮게 하고 뒤는 높게 한다. 그리고 게메기 속에 된장을 약간 섞은 당겨나 밥 찌꺼끼 닭빼 등을 여기 저기 넣어 놓는다. 그리고 마른 당겨를 물위에 조금 띄워 보낸다. 아래 깊은 쏘 속에 있는 물고기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입구 문 쪽 물가에 나뭇가지를 꽂아 놓는다. 그리고는 멀리 언덕 나무 밑에서 반시간 정도 기다린다. 쏘에서 놀던 물고기들이 음식 냄새를 맡고 먹으로 천천히 게메기 안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먹고는 여유롭게 지낸다. 그때 발을 들고 나뭇가지를 세워놓은 곳 까지 살며시 다가간다. 그다음 갑자기 뛰어가서 입구를 발로 막는다. 게메기 안에서 먹고 놀던 고기들이 자기가 들어왔던 물이 약간 깊은 입구 쪽으로 달려온다. 거기에 높은 발이 있으니 뛰어올라 봤자 나가지 못하니 다시 입구 쪽에 만들어 놓은 통으로 뛰어 오른다. 많이 먹은 큰 물고기들은 대부분 다 통에 저절로 뛰어 오른다. 거기로 뛰어오르면 바깥으로 나갈 거라고 생가각해서다.

 

 게맥이이로 잡은 강물고기는 시골에서 유일한 고기이다. 많이 잡으면 온식구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노놔 준다.

무섬에서만 하는 기가막힌 고기잡이 방법이다. 조상의 지혜가 담겨있다. 시아버님이 아래동네서는 게메기(겨메기)로 물고기를 제일 잘 잡으셨다. 우리 사랑어른은 게메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 삼이가 커서 물고기를 잘 잡았다. 그래서 조손이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게쓰나 다랭이로 피라미 붕어 사징어 모래무지 먹지 은어 등 여러 물고기들을 주어 와서 배를 따 창자는 닭에게 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운 여름에 고기가 상한다. 많이 잡을 때는 바께스로 절반 가까이 잡을 때도 있지만, 보통 세숫대야로 한 대야 정도 잡는다. 보통 낮에 점심때에도 게메기를 하나 저녁 해질 무렵에 만들어 놓고 저녁을 먹고 어두울 때 가면 더 많은 물고기들이 모여들어 따듯한 게메기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있다. 밤 게메기에는 메기나 뱀장어 자라도 들어올 때가 가끔 있다. 밤에 물고기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습성이 있는 모양이다. 세숫대야나 양푼이 가득 많이 잡으면 큰집 작은집 이웃과 노나 먹기도 한다. 고기나 생선이 귀한 농촌 동네가 대부분이지만 무섬 동네는 그래도 물고기를 자주 많이 잡아먹어서 다행이다. 이웃 동네가 부러워할 지경이다. 내가 어릴 때 매꼴 방석에서는 겨우 도랑에서 가재나 잡고 논에서 골뱅이 미꾸라지를 잡는 게 전부였는데 무섬 오니 물고기가 참 흔하다.

 

 

 

가뭄

 

                                       거북 등 처럼 말라서 갈라진 논바닥

 

어느 핸가 하지 무렵 비가 너무 오지 않고 가뭄이 들어 논바닥이 갈라졌다. 밭도 타들어갔다. 산야에 나무도 풀도 메말라갔다. 이때는 게메기도 못한다.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있으니까. 옛날 조선시대에 임금이 덕이 없으면 온 나라가 가뭄이 연거푸 든다고 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 탓인가. 나라와 읍 면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고 야단이다. 시골마을에서는 대부분 천수답이라 막막했다. 그나마 작은 못이 있는 놀기미 구렁은 좀 나았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밭농사도 논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가 없다. 올해도 흉년이 오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가 가장 큰 걱정이다. 모두들 걱정이 태산이다. 몇 년 전에도 이런 한재(旱災)가 있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아갔는데 올해도 이런 걸 가지고 살아가야한다니 가난도 지긋지긋하다. 없는 살림에 동냥하러 다니는 거렁뱅이도 늘어나고 중들도 더 자주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린다. 한쪽 팔이 없거나 한쪽 다리가 시원찮은 육이오동란 상이군인(傷痍軍人)들도 가끔 먹을 것을 요구한다. 각설이 타령도 더 자주 들린다. 작년에 왔던 거렁뱅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나라나 가정이나 어려움이 말이 아니다. 나라에서 구호식량이 배급된다고 하는데 농촌 가정까지 얼마나 배당될지 의문이다. 농협에서는 곡식을 조금씩 빌려주고 내년에 갚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도 턱 없이 모자란다. 가뭄이 들 때마다 저수지나 못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썩 해대지만 제대로 실천이 안 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루아재비와 오조카

 

 

하지가 지나고 7월초순경 소서(小暑)가 온다. 말이 작은 더위지 정말로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한다. 보리를 베어낸 자리에 그루갈이로 늦가을 수확할 오조(일찍 심는 서숙)을 심는다. 7월에는 그루조(늦갈이 서숙)를 심는다. 사랑어른이 씨삼태기에 서숙씨를 담아 뿌리면 아이들이 뒤따라가면서 발로 살짝 밟아준다. 조밭의 김매기는 초복 무렵에 애벌을 매고 중복 무렵에 두 벌을 매고 말복 무렵에 세벌을 맨다. 한여름에는 잡풀이 왜 그리 빨리 자라는지 정신없이 밭을 매줘야한다. 하도 무더워서 조조안자서 내리쪼이는 따가운 햇볕을 등에 지고 조밭을 매면 무릎 밑이 문다. 

시골에서 그루아재비와 오조카가 있는 집이 더러 있는데 오조 그루조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 이다. 한집에서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느지막에 시어미가 또 아이를 낳으면 그렇게 말한다. 즉 항렬이 낮은 조카가 먼저 태어나고 항렬이 높은 아재비가 늦게 태어나서 그루아재비라 한다. 이때 안방 아래묵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 아기 즉 손자를 받아내어 수발을 하고 또 며느리가 시어머니 아이를 즉 시동생을 받아내어 수발한다. 

 

 

                                                   

                                                        달밤에  피는 야생화 달맞이꽃

어느 한해 점심을 먹고 집에서 4시경까지 집에서 쉬다가 일을 하러 들에 갔다. 달이 뜨기 시작하고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오는 데 밭둑에 노오란 꽃이 피어났다. 사랑어른이 이는 '월견초(月見草)'라고 부르는  야생화로 달맞이 꽃이니 꽃을 조금 따 가지고 가자고 한다. 달이 뜨는 저녁에 피기 시작하고 아침에 지는 꽃이라 해서 달맞이 꽃이다. 울타리 가에 피는 나팔꽃과 비슷하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인사를 하는 나팔꽃은 새벽에 피고 낮에 진다. 달맞이 꽃은 피부병에 좋은 약초로도 쓰고 여름 절 잘 쉬어지지 않는 기지떡을 만들 때도 사용한다. 어릴 때 할매가 애처롭고 슬픈 달맞이 꽃이야기를 해준 적이 생각난다.

옛날 어느 산골 외딴 마을에 달밤에 홀로 달을 바라보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어여쁜 처자(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처자는 노오란 수가 놓인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달밤에 귀신인지 뭔가에 홀키어(홀리어)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시골에서는 과년한 처자가 가끔 달빛에 약간 이상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그 처자는 어떤 이름 모를 총각이 자기를 자세히 바라보고 지나가는 것 같음을 느꼈다. 뭔가 느낌이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처자는 그만 그 순간 사라진 총각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자는 혼인이 정해진 규수였다. 혼인 날자가 다가오자 불안해진 처자는 어느 달밤에 다시 그 총각을 만날까 하고 골짜기로 갔으나 총각은 만나지 못하고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사라진 처자를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웃 동네 총각이 혹시나하고 어느 달밤에 처자를 처음 만났던 골짜기로 갔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키가 크게 자란 노오란 달맞이꽃을 발견했다. 그는 처자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왔다. 아침에 다시 그 골짜기를 찾아가니 달맞이꽃이 보이지 않고 꽃잎이 시들어져 있었다. 이렇게 달뜨는 밤에는 화려한 모습으로 꽃을 피우고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아침 오면 시들어버리는 그 꽃은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부모가 정해준 신랑과 결혼해야지 헛되게 다른 총각을 꿈꾸면 달맞이꽃 신세다 된다고 한다. 할매 이야기는 언제나 교훈적이다.

이어서 7월 중순경 대서(大暑)가 시작하면 더욱 덥다. 삼복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면 일년 내내 키운 누렁이 멍멍이를 잡아 집안 식구들이 보신을 하면서 더위를 식힌다. 너무 더워서 농민들이 좀 숨을 돌리고 쉬기도 한다. 무섬은 강이 있어 물만 있으면 쉴만하다. 젊은이들은 더위를 피해 계곡이나 산으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한낮에는 어른들은 집안이나 마을 앞 소나무 그늘에서 쉬고 낮잠을 자고 아이들은 강물 속에서 논다.

 

 

                                                                똥장분(똥장군)과 오줌 장군

                         

4시가 너머 해그름 해지면 그때서야 온 식구들이 밭으로 들로 가서 퇴비를 준비한다. 무섬에서 퇴비는 여름 동안 웃자란 풀을 산더미처럼 베서 쌓는다. 밭에서 뽑아낸 풀과 함께 통시에 모아 둔 대변을 똥장분으로 그리고 소변이 든 오줌장분을 소와 지게로 날라 풀 위에 뿌리고 또 흙으로 덮고를 되풀이해서 퇴비와 두엄을 만든다. 한 달 이상 지나면 가을 농사 준비할 때 쓰는 소중한 퇴비다. 시골에서 언제나 늘 비료 값이 비싸서 보통 퇴비로 비료를 대신한다. 농촌 시골집에는 모두 이 장분(장군)이 한두 개씩 있다. 겨우내 모아둔 인분이나 오줌은 중요한 거름이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지 않은 이웃들이 우리 통시에 와서 뒤를 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만큼 농촌에서 인분과 오줌은 중요한 거름이다.

                                             퇴비와 두엄 거름

늦 여름 풀을 베서 쌓고 오줌 장분 똥장분으로 오줌과 인분을 담아 날라서 풀 위에 뿌리고 흙을 뿌린다. 이를 되풀이 해서 겹겹으로 퇴비를 만든다. 물론 마당가에 만들어 놓은 거름(두엄)을 소바리에 싣고 와서 퇴비와 섞어서 밭의 밑거름으로 사용한다. 오랫 동안 해내려온 친화경 농사법(유기농법)이다.  이 퇴비 만들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같이 힘든 작업이지만 해마다 되풀이 해야 한다. 아이들이 더운 여름에 풀을 베야하고 오줌 똥을 날라다 뿌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러면 새참으로 달래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어느 핸가 하지가 지나고 소서까지 무척 더웠다. 비도 안 오고 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살아남기가 난감했다. 다행이 대서가 지나서야 견딜 만 해졌다. 늦여름에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해서 산천의 초목도 들에 풀도 밭에 곡식도 살아난다. 바닥을 보이던 앞 강가에도 물이 흘러가니 물고기도 나타난다. 밭도랑에도 논도랑에도 작은 징개미와 버들피라미가 왔다 갔다 한다. 이처럼 비가 소중한 걸 또 다시 느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시던 시어머님 말이 생각난다. 비가 오면 말라빠진 강에 생기가 다시 돈다. 물고기도 징개미도 피라미도 잡을 수 있다. 강물 속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 뿌리 속을 아이들이 손으로 훔쳐서 물고기를 잡아낸다. 큰 바위 주위를 사까레로 둘러 막고 여끼라는 독초를 바위에 문질러 그 물을 사까레로 바위밑으로 퍼 넣으면 조금 있다가 미기와 뱀장어 붕어 등이 꾸물꾸물 기어나온다. 그러면 반두로 한 마리씩 건져낸다.  

 

무섬에서 아이들이 나무뿌리 밑이나 바위 밑 속에 숨어 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반두로 잡는다. 그날 저녁에는 모든 식구들이 물고기 된장조림을 맛볼 수 있다. 고기 먹는 날이다.  

무섬에는 비가 안와도 먹을 물은 구할 수 있다. 어릴 때 내 친정 방석에서도 몇 번 가뭄을 겪었는데 샘이 말라 먹을 물이 부족하면 가장 고통스러웠다. 아이들이 물지개로 강가에 파놓은 물을 지고 날라서 편할 때도 있지만 이른 새벽에 물이 필요하면 버지기를 이고 가서 물을 떠와야한다. 무섬에서는 여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작은 버지기로 물을 이고 나르는 것을 배운다. 다행이 무섬은 강바닥을 파서 샘을 만들어 먹을 물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사시사철 모래 사이로 생겨나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무섬은 복된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샛골에 사시는 이빨 잘 고치는 박 씨 영감이 무섬 사람들은 건너 마을 머럼 사람들 보다 대게 이가 더 튼튼하다고 한다가난한 사람들은 읍내 치과에 못 다니고 손재주가 좋은 박 씨 영감한테 가서 이빨을 한다.

 

알방석댁 알부자라 불린 나도 1933년에 시집와서 40여년이 지나 70년대 중반까지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주위에는 우리보다 더 비참해서 결국 시골에 못 살고 도회지로 이사 가기 시작해서 무섬마을은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개 일제시대때 독립운동 한 가정은 살아가기 더욱 힘들었다. 아비없는 시골 집안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투사 나온 집안은 3대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우리도 먹고 살기 바쁘고 도와 줄 건덕지가 없어 맘이 아플때가 많았다. 그집 아이와 우리 집 아이가 잘 어울려 놀아도 끼니 때가 되면 슬그머니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 집으로 간다. 사실 있어봤자 얻어먹을 게 별로 없으니.  어느 집이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게 내 일생 내내 눈으로보고 겪어왔다. 지긋지긋한 가난 언제 벗어 날까 생각했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인생 너무 힘들었다. 죽어서야 이 가난 이 고통 잊을 것 같다.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집안의 아이들은 영주로 안동으로 대구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나가는 집이 계속 불어났다. 우리 아이들도 농사를 지어서 먹기 살기 힘든다고 도회에 사는 진척의 신세를 지면서 떠나갔다. 

초가을 곡식도 초가을 채소도 자랄 수 있어 다행히 올 겨울을 견딜 것 같다. 해마다 날씨에 따라 그해 농사를 잘 지으면 겨울나가기 좀 수월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이런 가난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걱정이 태산이다. 농촌에서는 아직도 입에 풀칠을 제대로 못하는 집이 많다. 이런 상황이 내가 시집올 때부터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난을 겪고 목격하고 살아왔다. 아이들이 언제 다 자라서 돈을 제대로 벌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지 까마득하다. 일찍이 도회지로 나간 이웃집 아이들이나 우리 아이들도 먹는 것은 좀 더 나아졌지만 아직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우리 앞집 숙헤와 문갑이네 4형제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농촌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모두 도회지로 가버렸다. 가끔 숙해가 새 양은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와서 놋그릇으로 바꿔갔다. 그 후 소식이 끈겼다. 배운 아이들은 그래도 살아가는 게 좀 나아보였다. 더 많이 배우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시아버님이 하시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맏이 경이가 대학을 나오니 지댁하고 벌어서 살아가지만 형제들과 부모를 제대로 돌볼 여유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아이고 이것들이 언제 돈 벌어서 잘 살게 될지 내 살아 생전에 볼지 모르겠다.

 

 

입추(立秋), 가을의 시작

 

지독한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대서가 지나고 열닷새가 지나면 음력으로 7월 초순 입추라는 계절이 시작된다. 반가운 계절이다. 농촌에는 가을농사 채비를 시작한다. 아직 한낮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무덥지만 강가에 나가면 저녁에는 견딜 만하다. 음식물 등을 서늘하게 보관하거나 머리에 이고 나를 때 사용하는 광주리나 망태를 들고 고추밭에 가서 붉은 고추를 골라 따서 말라야한다. 이것저것 할 일이 태산 같다. 농촌지도소에서 새로 개량한 무우와 배추 씨앗을 사와서 심는다. 배추씨앗이나 무우 씨앗은 너무 작아서 고무래로 밭의 흙을 잘 고른 후에 뿌리고 다시 발가락 고무래로 살짝 흙을 덮거나 그냥 발로 밟으면 된다. 서너 개의 발이 나란히 달린 발고무래도 있다. 삼사일이 지나면 싹이튼다.

 

 

                                             발고무래

 

 

두 달이나 되면 겨울 김장용 무우가 허옇게 속살을 내놓고 땅에서 삐죽이 올라온다. 배추는 곧 지푸라기로 묶어주어야 속이 제대로 찬다. 이때는 서숙 밭 김매기가 가장 힘들 때다. 여름방학 때 내려온 아이들이 오금 밑이 문다고 조밭 매는 것에 질색을 한다. 그래도 잘 달게서 데려가야 한다. 일손이 부족하니 어쨀 수 없다. 그런 것만 하면 그래도 좀 한가해지기 시작한다. 8월에는 수수대가 바람에 건들거리듯이 아이들도 어른들도 어느 정도 건들거리며 놀고 쉬는 시간이 생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서 살찐 메뚜기도 잡아 온다. 부엌 숯불에 구워먹어도 맛있고 많이 잡아 오면 튀겨도 먹는다. 

 

                    두 달이나 되면 겨울 김장용 무우가 허옇게 속살을 내놓고 땅에서 삐죽이 올라온다.

                   배추는 곧 지푸라기로 묶어주어야 속이 제대로 찬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서 살찐 메뚜기도 잡아 온다. 나락 잎을 파먹는 나락 메뚜기가 제일 맛있다.  초가을 아이들의 주점부리로 최고다. 큰 방아깨비는 구워먹기 좋다. 

       

                                     큰 방아깨비는 드물지만 잡기만 하면 부엌 아궁이 불에구워먹기가 좋다.

 

이제 진짜 가을 같은 날씨인 처서(處暑)가 시작되면 모두들 숨을 제대로 쉬어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폭염과 열대야기 식어지고 매미소리도 잦아지고 밤이 되면 귀뚜라미가 나타난다. 이제 가을 맛이 난다. 하늘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면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기분이 좋아진다. 논의 나락도 저절로 익기 시작한다. 세월의 변화는 농촌에 여실하게 나타난다. 논두렁에 물꼬만 잘 보살피면 된다. 메뚜기도 살이 쪄서 잡아먹기 좋은 계절이다. 시골에서는 처서에는 하늘이 개야지 비가 오면 다된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처서에 혹 비가 내리더라도 조금 내리고 마는 수가 많다. 간혹 비가 오고 늦더위가 시작되기도 하지만 이제 누구나 가을 채비를 본격적으로 한다. 해가 지고 달이 뜨듯이 계절의 변화는 신비로울 지경이다.

                              일가친척들과 조상의 묘를 찾아 낫으로 일일이 벌초를 한다. 

 

처서 무렵에 사랑어른은 소주와 안주를 가지고 자식들을 앞세워 일가친척들과 조상의 묘를 찾아 낫으로 일일이 벌초를 하신다. 여름내 웃자란 풀도 베고 혹 장마에 무너져 내린 묘 봉우리도 손질해야한다. 이때 기승을 부리는 말벌때도 조심해야 한다. 묘소 주위에는 살갗을 쏘는 풀벌레도 많다. 조상 묘들이 여기저기 큰 산, 먼 산에 있는 큰집들은 품앗이를 해서 하든지 사람을 사든지 재궁지기로 하여금 하도록 하기도 한다. 조상을 모시는 것이 농촌에서서 무엇보다 중요해서 지극정성을 다한다. 요즘 젊은 자식세대는 언제까지 이런 힘든 일을 계속해야 되는지 회의적으로 묻기도 한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아직 누구나 다하는 연중행사다.

 

왜가리와 백로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9월로 접어드는 백로(白露) 무렵이면 논의 나락은 저절로 익는다고 사랑어른이 말하던 게 기억난다. 농촌에서도 여유가 있어 5, 10일 장날 읍내에 가는 햇수가 잦다.

어느 해인가 뒷집 조카 이진이가 농악대를 몇 명 데려 와서 아래 강변에 모여서 장구치고 꽹과리 울리고 춤을 추었다. 이진이는 말은 좀 더듬을 때가 있지만 재주가 좋아 선창을 하면 농악대가 울리고 우리 모두는 후렴을 부르면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덩실덩실 춤추던 때가 그립다.

이진이는 재주도 좋아서 뭘 부탁하면 안 되는 일도 잘 되게 한다. 말 잘 안 듣는 아이가 있으면 이진한테 부탁하면 얼마나 잘 구워 삼는지 금방 해결한다. 면소재지나, 지서에서 순사가 와서 너무 심하게 농주를 적발하거나 무리하게 해되면 조리 있게 따지고 야단도 잘 쳐서 무사하게 해결한다.

꽹과리는 천둥 번개 소리요 장구는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이며 징소리는 바람이고 하는 등 농악에 대해 설명하는 것 보면 어디서 많이 보고 놀아본 경험이 있다. 

 

https://youtu.be/HRY037sToVQ

무섬 이야기를 해가면서 부르는 선창 노래는 얼마나 구성진지 들을수록 신이난다. 나중에 그런 노래를 적어달라고 했더니 이진이가 가져왔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무섬 갱변에는 자갈이 총총 모래가 총총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앞강 속에는 물고기 총총 피라미가 총총

 

물건너 솔밭에는 솔방울이 총총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뒷산에는 굴밤이 총총 알밤이 총총

띠얏 밭에는 서숙이삭이 총총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놀기미 논에는 벼이삭이 총총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노세노세 젊을 때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노세노세 마시고 노세 술마시고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앞강물이 술이라도 술잔 없인 못마시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뒷강물이 술이라면 우리모두 취해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우리아지매 백발되기 전에 놀고 또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우리할매 늙기전에 춤추고 놀아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이내청춘 다가기전에 노세노세 놀아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강변에는 자갈도 많고 시어머니는 말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노세노세 오늘도 놀고 내일도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비오면 못노나니 비오기전에 놀고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얼시구 좋다 어절시구 좋고 또 좋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 놀고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해떨어지면 못노나니 어서 놀고 또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월미산에 달떠오르네 어서 놀고 또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서쪽산에 별빛 비추네 어서 놀고 또 노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놀지않고는 못 노니 놀고보세 놀고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술없이는 못노나니 술떨어지기 전에 놀아보세

춤추며 노래하며 놀아보고 또 놀아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노는 팔자 상팔자니 놀아보세 놀고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내 가슴에는 수심도 많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여름농사를 다 짓고 추수할 때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이므로 옆집의 아지매들이 친정 나들이를 간다. 나는 친정 어매가 살아계실 때는 다녔지만 어매가 돌아가신 이후 친정 오빠네가 객지로 이사 가고는 방석은 갈 일이 없어서 영주 한절마 형아네 집만 아주 드물게 다녀왔다. 형아내도 형부님이 별로 일자리가 없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서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맏이 응식이가 이발기술을 배워서 근근히 식구들이 살아갔다. 

나이가 드니 무섬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아마 나뿐만 아니라 시골 사는 아낙네들 대부분이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일단 출가하면 시집이 고향이나 다름없다. 태어나고 어릴 때 살던 친정 고향보다 시집에서 서너 배 더 오래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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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서숙(亞島書塾

                                                              복원한 아도서숙

시집와서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는데 이 무섬 마을에 큰 수난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에 일본인들이 조선을 강압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아도서숙이'란 한글학교를 세워서 동네청년들이 일제가 탄압하여 못 가르치게 한 한글을 가르치면서 반일 운동을 하다가 사람들이 옥고를 치루고 고통을 당했다고 시어머니와 이웃집 할머니들이 이야기해주었다. 일본 순사와 그 앞잽이들이 그만 아도서숙이란 학교를 불태웠다고 한다. 참봉댁 금당실 아지뱀이 윗마을 초입에 땅을 내주어서 지은 작은 공회당이다. 우리집안의 어른이신 한분(김성규: 문전아지뱀)이 천재라서 서울로 유학가서 신학문을 배워와서 읍내에서 무슨 항일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성규(문전 아지뱀)의 청년시절   

 

또 무섬에서 해우당(海愚堂) 어른(김화진)과 아도서숙을 만들어 동네청년들을 가르치시며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성규님의 사위가 그 유명한 조지훈(趙芝薰: 본명 조동탁: 趙東卓, 1920-1968) 시인 교수이다. 조서방님이 처가에 오면 우리 사랑어른과 석포어른과 우산어른과 갱변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지내다가 술이 떨어지면 술을 얻으러 오시곤 했다. 아랫마을 이웃집 유동댁은 남편(김종진)이 항일 독립 운동하다가 고생을 해서 해방 이후 병마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셔서 혼자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분의 두 아들 식이하고 근이가 있었는데 근이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아주 잘해서 칭찬이 자자했다. 아부지가 없으니 더 이상 공부를 못한 것이 아까웠다. 또 일가친척 어른 한분(김명진 이르실 어른)도 독립운동하시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 집에도 두 아들 벽이와 제락이가 있었는데 가장이 없는 집안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다. 나중에 벽이는 서울로 가서 자수성가했다고 한다. 벽이는 아주 야무지고 우리 삼이와 아주 친하게 나무도 같이하고 우리 집에 와서 밥도 같이 먹고 했다. 윗마을 해우당의 어른 한분(김화진 줄포 어른)은 도일(渡日)하였다. 훗날 문전 아지뱀이 불러와서 영주와 무섬에서 항일 독립 운동하다가 주모자(主謀者)로 잡혀가서 그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고 한다. 그분도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선도했다. 그런 집안이 모두 김 씨 가문에 다섯이나 되고 박 씨 가문에도 한 두 명이 있다고 한다. 이웃마을 어떤 이는 일본앞잡이 노릇하며 재산도 많이 모아 그 자손대대로 잘사는 데, 우리 양반마을의 독립 운동가들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부지가 안 계시니 그 자녀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한편으로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반동네 사람들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를 위해 몸을 받친다는 옛날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난 것 같아 감동을 받았다. 동네 청년들이 어른들한테 배운 창가를 불렀는데 하도 우렁차서 이웃 아이한테 가사를 적어달고 해서 속으로 몇 번 따라 불러 본적이 있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벽장의 게종을 들어보시오

한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

인생이 백 년 가기 주마 도다.

 

이외에도 노래가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바깥출입을 많이 하신 석포어른 우산 어른이 아도서숙 다녔던 옛 어른들 한테 배워온 것을 누가 적어주었는데 무척 맘에 다가왔다. 노래로 못 배운 게 한이 되었다.

 

https://youtu.be/RrHfwmd1qU4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게종을 들어보아라

소년이로(少年易老)에 학난성(學難成)하니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불가경(不可輕)일세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나고

낙락장송(落落長松)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기쁨 잊지마라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東天朝日) 비쳐온다.

 

 

사랑어른이 아이들 가르칠 때, 늘 '소년이로(少年易老)에 학난성(學難成)하니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불가경(不可輕)이니 열심히 한문을 배우라'고 할 때도 이 문구를 인용하는 걸 자주 들었다.

또 우리 딸 둘매 나이 또래는 남자 아이들도 여자 아이들도 무섬 노래를 만들어 씩씩하게 불러댔다. 우리 뒷집 재주 좋은 큰집 조카 이진이가 가사를 지었다.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하고 단결하는 데는 노래가 최고이다.

 

 

<무섬의 청년들의 노래>

 

 

학가산 상상봉 정기를 받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무섬의 청년들 서로 뭉치니 거룩한 존재여 선김 화수회

순결한 정신에 이상을 걸고 그 옛날 그 업적 길이 빛내리

 

앞내를 본받아 쉬지를 말고 흐르는 강물과 어깨 겨누어

오늘도 내일도 굳게 싸우는 위대한 존재여 선김 화수회

우뚝 선 소나무 그 정신 같이 그 옛날 그 업적 더욱 빛내리

 

백사장 넓은 땅 우리의 일터 깨끗한 모래알 우리의 마음

비바람 눈보라 휘몰아쳐도 백사에 뭉쳐진 선김 화수회

숭고한 정신에 이상을 받아 우리의 이름을 길이 빛내리

 

 

무섬 딸들의 노래

 

문필봉 솟은 아래 의좋은 터전

무섬에 빛내리라 우리 딸들아

중엄한 산새 속에 자라난 딸들

억만년 이어나갈 우리 딸들아

딸들의 자랑 무섬에 자랑

그 생명 길고 길어 만세 만만세

 

의에 죽고 참에 살던 송백과 같이

아침하늘 햇빛 같은 우리 딸들아

비바람 불어쳐도 끝없이 싸워

억만년 이어나갈 우리 딸들아

딸들의 자랑 무섬에 자랑

그 생명 길고 길어 만세 만만세

 

 

 

 

추석 풍경

 

무섬마을의 추석명절은 정말 명절답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높게 떠서 유유자적한다. 철새들도 하늘 높이 이러 저리 날아간다. 붉은 가을 고추잠자리도 위로 솟구치면서 하루살이를 사냥한다. 들판에는 오곡이 익어간다땡그랑땡그랑 깡통이 달린, 머리만 달린 허수아비가 바람에 소리를 내는 풍경은 정겹다. 모든 집에서는 물론 아낙네들이 추석제사 준비하느라 무척 고생하지만. 그러나 집안의 전통을 이어온 조상을 기리고 한해 농사를 잘 지어서 그런 조상에게 새로 지은 알곡, 과일 등으로 떡을 하고 밥을 해서 제사를 지낸다. 설날처럼 제사가 많지 않은 우리 집에서 간단히 지내고, 둘째 큰 집, 의인 아지뱀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안에 제일 큰 집안 보갈 아지뱀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옆집 참봉댁에서 큰 마루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면 거의 반나절이 지나간다. 아이들은 자치기 놀이를 하거나 갱변에서 짚으로 만든 공이나 돼지 위(밥통)로 만든 공으로 공차기를 한다. 사랑어른들은 모여 앉아 술 마시고 논다. 아낙네들은 설거지 하고 집안 정리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 이처럼 명절잔치는 먹을 것이 여유 있고 좋으나 뒷처리를 우리 여자들이 다해야 하니 힘이 든다. 그러나 힘든 기색 없이 묵묵히 해야 한다. 여인네들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다. 맏딸이 있는 집은 그래도 수월하다.

 

큰집 설 제사:  작은 집부터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큰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돌아가신 윗대부터 지내는 제사라서 여러 상을 차리고 일가 대소댁이 제사에 참여한다. 커다란 안마루도 비좁아서 바닥에 돗리를 깔아 놓고 절을 한다.

 

 

이러한 연중 풍습이 내가 시집오던 193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1970년대 중반)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오고 있다. 마치 그때부터 소와 사람으로 힘으로 농사짓고 곡식을 소로 실어 나르거나 지게로 지고 나르거나 하는 것처럼. 70년대에 읍내에 가면 가는 길에 경운기도 보고 자동차도 보고, 우마차도 봤다. 여기와는 별 세계 같다. 읍내 가까이에는 니야까로 농사짓고 짐 나르는 것을 봤는데 무섬 마을은 아직도 해방 전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우리 바깥양반도 말없이 열심히 일하시지만 일이 힘 든다고 하실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다 지게나 소로 실어 날라야 하니까.

 충추절(음력 9월 9일경)에는 남자들은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낸다. 

 

바쁘지만 풍성한 음력 815일 중추절이 지나고 양력 922추분(秋分)이 오면 완연한 가을 날씨다. 이제 밤이 낮보다 길어지기 시작하여 하루가 금방 지나가는 것 같다. 윤달(閏月)이 있으면 추분이 먼저오고 추석이 나중에 온다. 추분이 와도, 햇볕이 따가워 곡식이 무르익는다. 가을 곡식이 가장 풍성하게 익어야 다가오는 한해를 잘 지낼 수 있다. 3월 춘궁기까지 버티어야 한다. 겨울나기가 쉬운 게 아니다. 해마다 가을 날씨가 그해 겨울울 어떻게 보내야할지를 결정한다. 늦은 태풍이나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면 다되어 가는 곡식을 망치기 쉽다. 밭에는 콩 서숙 수수 들깨 참깨 여물어가고 김장용 배추도 알이 차고 무우도 굵게 자란다. 허수아비도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제 역할을 한다. 논에는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메뚜기도 한철

 

가을곡식을 제대로 맛보려면 음력 9월 초순 경 다가오는 절기인 한로(寒露)가 지나야한다. 한마디로 오곡백과 익는 계절이다. 제비 등 여름 철새들이 강남으로 가고 기러기 등 가을 철새가 날아오기 시작한다. 무섬 강을 따라 기러기 때가 지나가면 가을이 깊어지나 싶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아이들이 논에 가서 나락 잎을 파먹어 살찐 메뚜기를 잡아 온다. 메뚜기는 시골에서 아주 좋은 영양분이 있는 먹거리이다. 소금을 쳐서 복아 놓으면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이 추석 제사용으로 나락 벤 자리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오며는 추어탕도 맛이 있다. 들판도 산도 서서히 붉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풍년이 드는 가을이면 너도나도 신이 난다. 시아버님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가을이 농촌에서는 제일 좋은 시간이다. 강 건너 논밭 두렁에 알밤이 떨어진다. 중간마을 박 씨네 도기촌 댁 뒷산에는 굴밤이 대굴대굴 떨어진다. 아이나 어른이 할 것 없이 굴밤 주어모아 묵을 만들어 먹는다. 날 잡아 먼 월미산으로 굴밤을 주우러 가기도 한다. 이 시기에 사랑어른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웃 큰집 친척과 더불어 먼 산소에 시제(時祭)를 다녀오기도 한다.

 

사랑어른이 음력 99일 중추절이 지나고 음력으로 9월 중순이 넘어 상강(霜降)이 오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고 호박도 고추도 밭에서 빨리 가져와 한다고 재촉하신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겨울채비로 분주해진다.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다. 그러나 아직도 한낮의 날씨는 매우 쾌청하고 산에는 나무들이 들에는 풀 입들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추석에 햅쌀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맛만 보았으나 이때가 되면 대부분 농가에서는 잡곡 등 햇곡식으로 밥도 해먹는다. 햇고구마, 토란도 캐서 보관하기 시작한다. 붉은 고추를 집집마다 말린다. 무섬에서는 주로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모래 갱변에 발을 깔고 말린다. 깨도 들깨도 단으로 묶어서 서로 맞보기로 세워서 말린다. 다 마르면 이불을 펴놓고 깨를 턴다. 이때는 또 여러 가지 곡식을 한꺼번에 추수해야한다. 조 수확은 10월 초 중순이다. 조와 벼는 수확시기가 같았기 때문에, 이때쯤이 되면 벼 베랴 조 베랴 정신없이 바쁘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계절이 연속된다. 그러나 알곡 터는 재미로 힘 드는 줄도 모른다.

 

 

                             상강이 오면 집집마다 마당이나 갱변 모래위에 붉은 고추를 말린다. 

 

참깨를 잘 말려서 털어야 깨끗한 참깨 씨앗을 수확할 수 있다.

       

                    건강에 좋다는 들깨를 잘 말려서 털어야 깨끗한 참깨 씨앗을 수확할 수 있다.

이 외떨어진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섬 같은 평화로운 무섬마을에도 큰 수난이 몇 번 있었다. 위에 쓴 일본제국주의 탄압에 희생된 항일 독립운동을 한 가족들이 가장 큰 희생이다. 옆에서 보기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모두들 가난한 살림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 더욱 안됐다. 옛말에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은 3대가 가난으로 고생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언젠가 마을 뒤에 내성천과 영주천이 만나는 곳에 산협이 병목 같이 잘록해서 거기를 파서 댐을 만들어 물길을 돌리고 무섬 앞 갱변에는 토지로 개발한다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이 지형을 재고 줄을 긋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 시아버님 등 동네어른들이 그런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곰방대로 후려쳐서 못하게 해서 순사들이 와서 잡아가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 곧 물길을 만들고 댐을 만들면 무섬 동네 망한다고 어른들이 난리였다. 결국 계획을 세우다 만 사건이다.

 

다음에 제 4편이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