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학의 도시 레닌그라드(유럽을 향한 창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과 문학의 도시 레닌그라드(유럽을 향한 창,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경
레닌그라드市에는 마침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네바江 삼각지 늪지대, 핀란드만에 접해 있어서 습기가 많고 자주 비가 내린다. 택시에선 휘발유냄새가 풍기고 거리의 포장이 파헤쳐져 있는 등 모스크바보다 초라했다. 그러나 시가지로 접어들면서 보이는 고풍스런 건물과 뾰족탑이 모스크바보다 훨씬 인상깊었다. 1703-1712년 표트르大帝가 이 늪지대에 도시를 건설하느라 수많은 농노와 노동자들이 희생되어 “인간의 뼈 위에서 세워진 도시”라 불리는 레닌그라드. 혁명 전까지의 이름은 표트르의 도시(원래는 성 베드로 St. Peter의 도시), 즉 페테르부르크였다. 페테르부르크는 19세기 러시아문화가 유럽을 따라잡는데 중심역할을 했다. 또 이곳은 푸쉬킨,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요 민주화운동 화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1905년, 1917년 혁명의 시기와 그 후 내란의 시기(1918-23)에 문학-예술의 부흥을 가져왔다.
청동기마상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의 기마상.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서사시 <청동 기사>에서 유래한 이름.
푸쉬킨이 이 기마상을 보고 영감을 받은 시 <청동의 기사, 페테르부르크의 이야기,
Медный всадник: Петербургская повесть> 일부를 감상해보자:
"파도치 는 황량한 강가(바닷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그는 서 있었다
파도치는 황량한 바닷가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스웨멘을 겁주리라.
이곳에 도시를 세워
오만한 이웃 나라를 제압하리라.
대자연이 우리에게 이곳에
유럽을 향한 창문을 내도록 명하고
바닷가에 강인한 다리로 서 있으라 했으니.
이 곳으로 새 로운 바닷길을 따라
모든 깃발의 선박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고
우리는 마음껏 주연을 베풀리라."
(A. 푸슈킨 r 청동기마상J , 석영중 옮김)
이 도시는 모더니즘, 상징주의 詩의 배경이다. 러시아 민족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푸쉬킨의 시에 의해 찬양되었으며 러시아문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고골리의 사실주의 산문에 의해 잘 묘사된 도시다. 러시아혁명의 원조인 제카브리스트 반란의 주모자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연루된 페트라세프스키 서클 멤버들이 갇혔던 “표트르 및 파벨 감옥”의 뾰족탑,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고전적 가로등이 장식된 다리와 여러 사원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강물에 반사되고 있어 여행자의 감회를 자아냈다.
푸른 숲 속에 솟아있는 이삭 성당의 금빛 돔형 지붕은 태양의 빛을 반사해 태양처럼 찬란히 빛난다. 푸쉬킨이 찬양한 「청동의 기사」인 표트르 대제의 기마 상 조각은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금방이라도 채찍을 휘둘러 무질서한 러시아 인민들을 다스릴 것 같다. 푸쉬킨의 시에 묘사된 장엄한 모습이 세월을 넘나들고 있다. 표트르가 창조한 위대한 도시는 온갖 건축물의 寶庫이다. 그 아름다움과 더불어 북쪽의 베니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타로프, 라스트렐리, 보로니힌, 쿠아렌기, 로시 등 많은 이탈리아 조각가들이 와서 건축물과 예술적 조각품을 만들었다. 그중 라스트렐리의 작품인 에르미타주 박물관건물과 조각작품들은 예술작품의 최고봉을 자랑하고 있다. 또 박물관의 내부장식과 소장품의 질-규모에서도 세계3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레닌그라드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새로운 이념, 경제정책 등으로 제국의 교육,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중심이 되었다. 유럽을 향한 창으로서 이 도시의 발전은 동방정교의 이질적이고 낙후된 러시아제국의 문화를 유럽문화와 합류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는 일본보다 1세기 반, 한국보다 2세기나 앞선 개혁과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이 도시의 급성장은 古都 모스크바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했다. 표트르대제 때 기반을 닦은 이 도시는 그 후 18-19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면에서 발전해 제국의 문화전성기(19세기)에 수도다운 면모를 과시했으며 러시아 문화와 과학의 선구자들이 이 도시에 집중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무대
페로프의 <도스토에프스키 초상화>
푸쉬킨 동상앞에서 그의 시 "삶"을 읊어보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즐거운 날이 오리니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현재는 우울한 것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ет,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레닌그라드 대학학생 나탈리아의 안내는 너무 친절하고 상세했다. 행운이다.
“이 저명한 작가이자 개인적인 친구였던 푸쉬킨의 초상화를 위해 키프렌스키(Orest Adamovich Kiprensky, 1782-1836)는 고대 흉상을 연상시키는 정적인 구도를 선택함으로써 푸쉬킨을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과 비교했습니다. 관람객을 지나 끝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활기찬 "나폴레옹" 자세는 시인의 모습에 기념비적인 분위기를 더합니다. 머리 주변의 배경은 약간 밝게 처리되어 순교자의 후광처럼 빛나는 광채를 자아냅니다. 배경에는 뮤즈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는 푸쉬킨의 시적 소명과 신들의 수호를 기리는 의미입니다. 푸쉬킨의 어깨에는 타탄 체크 망토가 걸쳐져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최고의 시적 천재였던 조지 바이런(George Byron)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에선 우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살던 가난한 구역과 白夜속의 낭만적인 네바 강변의 사랑 이야기가 떠올려진다. 「죄와 벌」에서 혹독한 상인의 횡포와 지주의 농노탄압에 의분을 느낀 인텔리 대학생들이 분노하던 도시, 그리고 고리대금업으로 약한 인민을 착취하는 전당포노인을 초인 이론을 앞세워서 도끼로 쳐죽이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타나던 도시. 한편 가난 속에서도 애절한 사랑을 꽃피우는 푸쉬킨의 이야기와 고골리의 날아다니는 「외투」이야기가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푸쉬킨(1799-1837)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높은 인간적 사랑이며 국민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반에 의해서 국민성 사상성 및 현실성을 꿰뚫는 문학을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예술의 독립을 지켰으나 그 불굴의 태도를 미워하는 자들의 음모 때문에 발생한 결투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의 페테르부르크 시민이 참가했다.
문학카페에서 푸쉬킨과 함께
푸쉬킨보다 10년 연하인 고골리(1809-52)가 고향 우크라이나로부터 페테르부르크로 왔을 때는 이미 푸쉬킨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정치적 자유의 이상은 사회표면에서 사라진 때였다. 그는 푸쉬킨이 아름답고 시적인 면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인데 비하여, 생활 속에서 추악하고 천박하며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예리하게 주목하여 이를 확대시켜 묘사했다. 페테르부르크 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외투」는 가난한 말단관리가 겨우 마련한 외투를 노상 강도에게 빼앗긴 후 절망한 나머지 죽어서 망령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권리가 없고 수모 당하는 이들에 대한 독자들의 세찬 동정을 불러 일으켜 러시아문학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 모두는 그의 「외투」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말했다.
몰로(Fedor Antonovich Moller)이 고골 초상화
인간 혼과 고뇌의 예술적 표현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1821-81)는 페테르부르크 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창작에 몰두했다. 그의 초기작품 「가난한 사람들」, 「백야」등에서는 도시 뒷골목에 사는 빈민의 심리를 비상할 정도로 예리하게 전개했다. 그는 사회주의 이상을 러시아 사회에 실현시키려는 꿈을 꾸며 페트라세프스키 비밀결사에 참가했다가 1849년 체포되어 10여 년 간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이후 무신론을 버리고 깊은 종교적 인간이 되어 「죄와 벌」등 현실비판을 떠나 형이상학의 예술표현에 빠져든다. 그러나 원죄를 속죄한다는 깊은 종교의식이 그의 작품의 불변의 모티브는 아니었다. 그가 매번 도시 뒷골목과 지하실과 천장의 골방사람들, 가난한 학생, 하급관리들 그리고 학대받고 수모 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로다. 이러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그의 형이상학은 그림자를 감추고 그 자신만의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자태를 나타낸다.
푸슈킨의 사랑, 고골리의 풍자,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정 등이 어우러져 있는 레닌그라드. 그러나 이곳 네프스키 프로스펙트(네프스키스키 대로)는 현재 떠돌이 잡상인들이 달러, 마르크, 엔화를 바꾸자고 졸라대는 거리로 변모하고 있다.
호텔입구의 꽃 파는 미녀들의 추파
한편 자본주의화와 자유화 속에 마치 19세기말 작품의 배경을 생각게 하는 부조리한 20세기말의 데카당스가 레닌그라드 밤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술취한 순경과 군인들의 모습과 함께 호텔입구의 꽃 파는 미인들은 연신 추파를 던지고 있다. 그 눈웃음의 의미는 단지 꽃만 파는 것 같지 않았다. 저녁에 네바 강가에서 만난 순진한 여대생과는 대조적이다. 1백 년전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나 나올만한 광경이 지금 脫사회주의 소련의 도시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에서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에도 박물관문화가 잘 정착돼 있었다.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네크라소프, 블록 등의 문학박물관은 작가들에 대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작가의 위대한 생애와 작품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또 그 외의 수많은 역사박물관, 군사박물관, 혁명박물관 등이 있었다. 특히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러시아 민족미술의 보고 「레닌그라드 국립 러시아박물관」이 돋보였다.
「레닌그라드 국립 러시아박물관」의 그림이 준 감동
백야
백야의 연인들
레닌그라드의 「국립 러시아박물관」은 모스크바의 「국립 트레쨔코프 미술관」과 더불어 러시아 민중미술운동의 주체였던 ‘페레드비즈니키’(이동전람회 화가)의 그림이 많기로 유명하다. 국립 러시아박물관은 레닌그라드市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예술광장에 서있는 아니쿠신 작품인 푸슈킨의 동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예술광장은 소 오페라 및 발레극장, 레닌그라드 국립 필하모니 및 코미디 음악극장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다. 이 박물관은 두개의 건축물로 이루어졌다. 즉 로시의 유명한 페테르스부르크 기념비적 건축물인 옛 미하일로프스키 궁전(1815-25년 건설)과 건축가 베노이스의 서쪽 편 건물(1914-16년 건설)이다. 이 푸쉬킨 동상이 있는 예술 광장에서 시인들이 시를 낭독하면 많은 군중이 모여서 즐긴다. 학창시절 스승님이 번역한 푸쉬킨의 시를 한수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시민의 쉼터다. 고 김학수 교수님은 수많은 러시아 명작들을 번역하신 러시아 문학 전문가인데 그 토록 가보고 싶어 하시던 러시아를 가보지 못하시고 작고하셨다. 나는 러시아문학의 고향을 탐방할 때면 늘 은사님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되새긴다.
덧없는 사랑의 꿈속에 흘러가 버린....
덧없는 사랑의 꿈속에 흘러가 버린
나의 청춘의 한 때여,
나는 그대를 애석히 여기지는 않노라.
오오, 감미로운 피리에 찬미되던 밤바다의 신비여,
나는 그대를 애석히 여기지는 않노라.
덧없는 벗들이여,
주연의 화관, 넘치는 술잔이여,
나는 그대를 애석히 여기지는 않노라.
배반한 젊은 계집들이여,
나는 그대를 애석히 여기지는 않노라.
나는 생각에 잠겨 환락을 피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젊은 날의 희망과 그 감동.
마음의 정적이여, 그대는 어디 있느냐?
감격어린 지난날의 열정과 그 눈물.
그대는 어디에 있느냐?.....
나의 청춘의 한때여, 다시 한 번 돌아와 다오!(푸쉬킨 원작, 고 감학수 교수 역)
예술의 도시요, 러시아제국의 수도였지만 19세기말까지 레닌그라드에는 러시아민족 고유의 국립박물관이 없었다. 대부분 왕족의 개인소장품이 에르미타주에 보관되거나 개인소유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 박물관의 창립은 이 도시의 예술생활에 신기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1895년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박물관 이름은 「황제 알렉산더3세의 러시아 박물관」. 에르미타주 컬렉션에서 기증된 러시아민족그림(당시 8작품), 예술아카데미에서 기증된 그림, 알렉산더 궁전에서 기증된 그림 및 기타 개인 소장품들로 시작한 이 박물관은 1898년 3월에 개관됐다. 이어서 1902년 인류사관, 1913년 역사관이 추가됐다. 첫 10년 간 박물관 소장품은 배로 불어났다. 혁명운동의 변혁시기에는 가장 인기 있는 민족문화의 기관이 되었다. 1912년 22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고 드디어 러시아 최대 박물관이던 에르미타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인민 코미사르 위원회의 강령은 예술작품과 골동품의 보호관리를 결정했다. 귀족과 거부의 소장품은 국유화되어 한데 모아졌다. 다른 개인소장품은 국립박물관 기금으로 사들였다. 소비에트 정권 첫 10년 동안 러시아박물관 기금이 몇 번이나 추가 확대되었고 박물관위원회가 이를 관리했다. 2차대전시기와 독일군에 의한 레닌그라드 봉쇄(9백일 동안)때 이 박물관은 수난을 당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박물관을 사수하던 직원들은 굶주림과 폭격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주요한 작품들을 내륙깊이 운반하여 보관했다. 전쟁중인 1944년에는 레닌그라드 전선미술가들의 작품이 전람회에 출품되었고 민중 미술운동가의 기수였던 일리야 레핀의 탄생 1백주년 기념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후 복구와 추가건설작업이 이루어지며 현재는 러시아와 소비에트 그림, 조각작품, 그래픽, 장식 및 응용미술작품, 민속미술품 등 34 여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러시아박물관은 蘇연방내 가장 중요한 예술적, 학술적 기관이며 여러 과정의 교육, 전시회, 작품연구와 각종미술관 관리기술들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매년 1백 50만 명의 관람객과 1만1천 회의 그룹 투어가 이루어지고 2백여 강연회가 개최된다. 「보고서」란 잡지를 발행, 여러 학술적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국립러시아박물관은 많은 해외 전시회에도 참가하고 있다. 필자가 지난 87년 美 시카고大學 미술관에서 본 「러시아, 대지, 인민 1850-1910년 러시아 회화」에서는 러시아문화의 황금시대인 19세기말의 위대한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88년 시카고 시립미술관에서 본 「에르미타즈및 러시아박물관 소장품 해외전시회」를 비롯, 서독에서의 「19세기 전반기 러시아미술」,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시대」, 이탈리아에서의 「미술의 세계」, 일본에서의 「미술과 혁명」, 프랑스에서의 「계몽시대」등 활발한 해외전시회를 펼치고 있다.
궁전광장의 알렉산더 기둥. 동궁(에르미타주 박물관) 앞
에르미타주 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 전시품: 이 박물관애는 약 300만여점의 예술품들이 있다.
페트로브나 공주와 춤을!
18세기 러시아 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