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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4. 갑술년(1934년) 무섬의 대홍수: Museom's Great Flood of the Year 1934

Kyuchin Kim 2022. 8. 14. 19:43

나의 일생 4.

 

갑술년 무섬의 대홍수

  무섬에 홍수가 지면 폭 300여미터의 강폭 가득 흙탕 물이 내려간다. 물소리가 무섭다. 

내가 무섬으로 시집오고 나서 이듬해 갑술년(1934) 대홍수가 나서 동네가 물바다가 됐다. 100여 채 가까이 되는 마을의 수많은 집들의 절반 정도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우리 초가 삼간도 떠내려갔다. 간신히 세간은 조금 높은 데로 옮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다. 더러운 황토 물살이 소리를 내며 강변을 집어 삼키다가 마을로 들어와서 차츰 집들을 휩쓸어 가는 모습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가장 무서운 사건이었다. 물살이 공포를 자아내고 무서웠다. 아이들과 어른들도 다 무서워했다. 집안 가축들도 무서워했다. 시집살이 정이 들만 했는데 이런 천재지변이 일어나다니. 이 무슨 변고인지, 이 무슨 재수 없는 운명인지 세월도 야속하고 하늘도 원망스러웠다. 마을 300여 년 동안 처음 있는 수난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안그래도 생활이 고통스러운데 천재지변 홍수 날벼락까지 나다니. 마을이 온통 매란당이다. 사람의 몰골이 가축들의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무섬이 물섬이 되어가는 지 온통 마을 골목마다 진흙탕물이다.  다행이 인명피해가 없었다. 

 억수같은 비가 내리면 산사태도 나고 또 강물에 홍수도 져서 모든 사람이 자연의 재앙에 벌벌떤다.

   영주 읍내에 홍수가서 도시가 물에 잠겼다. 영주천 상류에 있는 영주읍내에 홍수가 안났으면 무섬 동네는 몽땅 물에 잠겼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재난에 마음 놓고 살 사람들이 아니다. 시골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능력이 대단하다. 농번기인 가을이 지나면서 마을 전체가 추수와 집짓기를 병행하였다. 물론 아예 마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시아버지가 이웃동네 대목수와 동네 소목수를 불러서 집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집 짓는 동안 이웃 일가 공터에 움막을 짓고 온 식구가 살았다. 이때가 시집살이 40여 년 동안 가장 힘든 때였던 것 같다. 시골에서 집짓기도 힘들고 어려웠다. 모두 손으로 지게로 소등으로 날라다 해야한다. 

 

               초가 집짓기도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기둥을 세우고 섯가레를 얹으면 혹 비가 오는 것을 대비하여 용마루도 땋고 지붕 이엉도 땋아서 초가 위에 올려야 한다. 손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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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큰 집 보갈 아지뱀께서 지난번 있던 작은 초가집터 보다 더 넓은 땅을 쓰라고 해서 집터를 좀 더 넓게 잡았다. 터는 지난번처럼 뒤로는 나지막한 뒷산이 있고 앞으로 내가 흘러가는 남남서향이다. 멀리 동쪽으로는 월미산이 남쪽으로는 학가산이 보여서 풍광도 좋다. 터를 고르고 그 땅에 지신에 제사를 지낸다. 그래야만 지신(地神)이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재앙을 막고 만복(萬福)이 깃들 게 해 준다고 믿는다. 집 지을 때 드리는 제사도 여느 제사와 별다르지 않다. 제사상에 여러 가지 제물을 차려놓고 시아버님이 술을 제일 먼저 올리고 집터에 고시네를 하면서 술 한 잔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여러 사랑어른들이 술을 차례로 올린다. 잘 차려진 음식과 술은 모인사람들, 특히 일할 인부들이 주로 먹는다. 집 지을 목재와 함께 공사의 시작을 하늘과 땅에 알리고 사고 없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기원을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터 닦기 제사를 지낸 후 기둥 위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올린다.

대들보를 올리고는 축을 읊어가며 상량고사를 지낸다. 시어른이 붓으로 대들보에 상량 년도 날자와 시를 쓰고 상량한 후에 간단하게 의식을 한다. 시아버님이 막걸 리를 한 입 물고 세 번 정도 뿜은 후에 부엉부엉 부엉 세 번 말을 하는 것을 봤다.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지만. 집 짓는데 상량식이 아주 중요한 것만은 틀림없다.

                          집짓고 나서 지신밟기를 해야 집안에 사악한 것이 못들어 온다.

 

 

땅 고를 때 <지신밟기 노래>가 구성지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어야어야 지신님아 어야어야 성주님아

본디고향 어딘란고 갱상북도 봉화일세

춘양마을 본일세라 춘양골에 솔씨받아

여기저기 뿌렸더니 이산저산 낙락장송

춘양목이 자랐구나 배산임수 양지터에

집터닦고 땅다지고 주춧돌에 고정하고

이웃동네 대목장이 작은동네 소목장이

밤낮없이 나무깎아 기둥세워 혓가레도

가로대도 얹는구나 앞집뒷집 머섬들이

붉은진흙 찰진흙을 싸리지게 소바리로

밤낮없이 실어날라 볏짚쑥쑥 썰어넣어

이리치고 저리쳐서 벽짝치고 지붕얹네.

 

어야어야 지신님아 어야어야 성주님아

초가삼간 완성되면 어야어야 지신님아

어야어야 성주님아 이집아들 방석양반

아들아이 낳거들랑 고이고이 잘길러서

신식공부 잘시켜서 출세시켜 부자되고

맏딸아이 낳거들랑 도회사람 부자집에

맏사위로 삼으소서 어야어야 지신님아

어야어야 성주님아 초가집이 지어지면

잡귀신은 내쫓고서 주인어른 건강하고

보화재물 넘쳐나서 부귀영화 자손대대

만만하게 번창하소 이집양반 와란양반

일년하고 열두달에 삼백하고 육십일날

만사태평 무병장수 점지하소 어야어야

어야어야 지신님아 어야어야 성주님아

 

 

다행히 면소재지에서도 지원을 해주고 목수를 데려오고 목재를 해오는 거 하며 온 마을이 집짓기에 분주했다. 소드리 쪽에 있는 일가친척 집안 월미산과 꽃등산에서 소나무 재목을 베고 껍질을 벗겨서 소로 지게로 저 나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재목만 준비하는데도 몇 달이 걸렸다. 지대가 낮아서 다시는 홍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앞 강가 모래를 소바리로, 지게로 퍼 날라서 한 키 정도는 터를 높였다. 터 닦고 집터를 여러 사람들이 며칠 밤을 지새가며 발로 밟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 아낙들은 막걸리를 빚고 참을 준비했다. 농사일도 바쁜 데 집까지 지어야하니 온 식구가 고생이 말이 아니다. 동네사람들은 술을 마셔가며 심지어 노래를 불러가며 땅을 다졌다. 양쪽에 줄이 달린 큰 목재가래와 사까레로 흙을 고른다. 어떤 사람은 돌달고를 가져왔고 다른 이웃은 나무달고를 가져와서 발로 밟고 달고로 땅을 다지며 달고질을 했다. 돌달고는 절구통 같이 생긴 돌에 동아줄을 묶어 동네 장정들이 함께 달고질을 한다. 힘이 드니 노래를 불러가며 장단을 맞춘다. 그중 한명은 작업의 흥을 돋구기 위해서 장구치고 소리 메김을 한다. 그 지신밟기 노래 소리가 구성져서 듣기 좋다.

 

 

                                    달고: 돌에 동아줄을 묶어 동네 장정들이 함께 달고질을 한다

터를 닦고 주춧돌을 구해서 반듯이 놓고 기둥을 세우니 집의 형태가 나온다. 기둥사이에 가로대를 짜 맞추고 진흙으로 미장이 하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집안 참봉댁 뒷산의 황토진흙을 파오는 일도 오래 걸렸다. 소바리에 싣고 싸리 지게로 져 날랐다. 볏짚을 썰아서 넣고 반죽한 진흙으로 지붕에도 덮었다. 벽을 칠하고 구들을 놓고 다시 보드라운 진흙으로 바닥을 다진다. 집의 형태가 갖춰지면 지붕 잇는 것도 또 큰일이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달고 나면 사람 사는 집의 모습이다. 문종이(한지)가 귀해서 벽은 흙벽으로 그냥 마무리했다. 나중에 다시 여유 있을 때 문종이로 바르면 될 것이다.

 

시어른이 집은 식구가 늘어나는 것을 감안해서 3칸 겹집으로 지었다. 중간 마루가 제일 크고 안방이 다음으로 크고, 상방과 사랑방은 크기가 비슷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방 부엌과 마루로 올라가는 좀 여유 있는 봉당(封堂)이 있다. 그 오른쪽에는 더 넓은 안방부엌이다. 안방 들어가는 안문 위에는 시아버님이 문지(한지)에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와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이란 '한문글자를 써서 서로 맞보게 붙였다.

새로 지은 초가집들 중에서는 마을서 꽤 큰 집이다. 사랑방에는 장안을 설치하고 문을 두개 달았다. 오른쪽에는 시아버님의 갓집이 왼쪽에는 사랑어른의 갓집이 있다. 그 외 사랑어른들이 필요한 문서나 물건들을 보관한다. 사랑방의 침구들인, 요와 이불들은 그냥 장안 아래 한쪽 구석에 접어보관 한다. 그 위에 베개들과 목침들도 보관한다. 어른들은 목침을 주로 베고 아이들은 베개를 쓴다. 사랑방과 상방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상방에는 뒤쪽 위로 시렁을 설치하여 세간살이를 얹어 놓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시조부의 글이 들어있는 빛바랜 고리짝이 시렁 위에 있다. 상방의 창문으로 나가면 아궁이가 있고 겨울에 필요하면 거기에 나무를 떼서 따듯하게 하고 손님이 잘 수 도 있다. 물론 집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중간 마루에서도 상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물레질

중간 안마루는 여름에 전 가족이 앉아서 밥을 먹고 쉬는 공간이다. 집에서 가장 큰 공동공간이다. 마루 양쪽 모서리에는 큰 독을 세워뒀다. 곡식이나 세간을 넣어 보관한다. 친정에서 어매가 오면 시어머님과 늘 물레질도 안마루에서 한다. 천정이 높고 사방이 터져 있어 시원하다. 뒷바라지 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빛이 들어온다. 마루 뒤쪽에도 높고 긴 시렁을 만들어 생활도구를 얹어 둔다. 물론 겨울에는 무척 추운 곳이다. 안방에는 다락이 용마루 사이에 있고 용마루 사이로 하늘이 빠꼼히 보여서 낮에는 빛이 다락에 들어와 은은하게 밝아서 호롱불 없이도 다락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집을 '까치구멍 초가'라 부른다. 그러나 밤에는 초롱이 필요하다. 다락에 올라가는 데는 나무 받침대가 세 개나 있다.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다락에는 기제사나 명절제사 때 쓰는 놋그릇을 상자 속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한다. 해마다 초겨울에 딴 꿀을 단지에 넣어서 보관한다. 아이들이 훔쳐 먹기도 한다.

영주 수도리 김규진 가옥 (월미산초당榮州 水島里 金圭鎭 家屋 (月美山草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1

 

시아버님(호: 월미산)이 1934-1935년 지은 까치구멍 초가 옛모습을  지니고 있다.  까지구멍초가이다. 용마루 밑으로 작은 구멍이 있다. 환기도 되고 은은한 빛이 들어와 다락에 불켜지 않고도 물건들을 알아볼 수 있다. 물론 까치는 들락날락하지 않는다. 

 

월미산초당 김규진 가옥은 조선 시대 후기에 있던 집이 수해로 떠내려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살림집이다. 앞면 3, 옆면 2, 6칸의 규모이고,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겹집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 까치둥지와 비슷한 모양의 구멍을 만들어 공기가 잘 통하게 하고 다락방에 은은한 빛을 비추어 주어서 까치구멍집이라 한다.

집의 앞쪽에는 왼쪽부터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 대문 안쪽으로 흙바닥으로 된 출입 공간인 봉당(封堂)과 부엌이 있다. 집의 뒤쪽에는 왼쪽부터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상방이 있고 식구들 공동 공간인 안마루가 있고. 안주인이 생활하는 안방이 있다. 뒤쪽 중앙에 있는 안마루는 앞으로 조금 길게 만들어서 상방, 안방, 사랑방과 모두 통한다. 사랑방 앞면 창문을 통해 나갈 때 편리하게 사용하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안방 창문 앞에도 쪽마루를 설치하여 창문을 드나들 때나 마루 밑에 간단한 가재도구를 놓는 등 편리한 공간으로 사용한다.

김규진 가옥은 다른 까치구멍집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마구간을 두는 자리에 사랑방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구조는 까치구멍집이 변화하는 초기 모습이므로 전통 가옥의 변천 과정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까치구멍집: 태백산맥 일대에 주로 분포하며 특히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 많다. 폐쇄형 가옥으로, 대문만 닫으면 야생동물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도 집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이다.

 

Kim Kyu-chin’s House (Wolmisan Chodang) in Sudo-ri, Yeongju

Gyeongsangbuk-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No. 361

 

This house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in the 1930‘s, modeled after the preexisting late Joseon dynasty (1392-1910) house which had been destroyed by a flood.

The house is made up of 6 sections, 3 sections in the front and 3 sections in the back. The various rooms of the house form a enclosed layout. Houses with this layout typically have thatched roofs with holes made on each end of the roof to facilitate ventilation and provide lighting. These holes are presumed to look like the openings of magpie nests; therefore this kind of house is known as a “magpie hole house.”

The front left section is the sarang-bang, it is a room for men to reside and is also for welcoming guests, the front middle section (where the main entrance is located) and front right section combined is the bongdang. It has a clay floor and a kitchen to the right, and gives the house an impression of a more open space. The rear left section is the sang-bang, it is also a room where men may reside. The rear right is the an-bang, it is a room for women to reside. The rear middle section (hall) has a raised wooden floor called a maru which extends forward and is connected to the three rooms. It can serve as an area for family interaction. The 3 rooms have a traditional heated floor called ondol.

Both the sarang-bang and an-bang have double doored windows (which can serve as an auxiliary entry way) with a small external maru. The small space beneath maru serves as a storage area for tools and household items.

Normally in magpie hole houses there is a stable for cow in the front left section, but this house has a sarang-bang placed instead. This can be considered noteworthy, because it shows the process of how traditional homes develop and change over the years.

 

*Magpie hole house: Usually located across the Taebaek Mountain Range but more common in the northern parts of North Gyeongsang-do province. It is an enclosed structure, so that when the main entrance is closed the dwellers are protected from wild animals and makes it possible to subsist when isolated by heavy snow.

 

시집오고 얼마 안 되어 일본순사가 집집마다 놋그릇과 심지어 조상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와 여러 가지 쇠붙이를 강제로 공출해 가서 제사 때 사용하는 놋그릇들과 손재봉틀을 함께 안방 부엌에 파고 묻어둔 적이 있다. 안방에는 또 장안이 아랫 묵 쪽에 있다. 문이 두 개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나 옷가지 등을 넣어 보관한다. 또 웃묵에는 시렁을 길게 설치했다. 거기에도 바느질함 고리짝 광주리에 담은 여자들의 작은 세간사리를 얹어 놓을 수 있다. 동짓달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메주를 쒀서 짚으로 엮어 안방시렁에 주렁주렁 달아놓는다. 내가 시집 올 때 가져온 작은 옷장은 웃묵 시렁 밑에 놔두었다. 옷가지들을 넣어둔다. 안방 창문은 동향이라 새벽이면 훤하게 밝아 온다. 나는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창문 바깥 추녀 밑에는 해마다 씨앗주머니를 조롱조롱 달아놓는다. 강냉이는 그냥 달아놓고.

                                                          놋쇠 제기들

 

                                                          양은 그릇

 

집이 남향이라 낮에는 햇볕이 잘 들어와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강바람이 불어오면 시원하다. 안방 남쪽에 안방 부엌이 있고 부엌에는 물을 퍼 담을 중단지 하나를 반쯤 묻고 나머지 겉에는 진흙으로 둘러쌌다. 추운 겨울에 얼어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름에 강가 차가운 물을 길러다가 물단지에 넣어놓으면 물이 늘 시원하다. 사랑방 부엌은 마루 앞이라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칸 홑집 옛 초가에 비하면 궁궐 같았다. 대문은 바로 사랑방 아궁이 바로 앞에 대문이 달려 있다. 이 공간을 보통 '봉당(封堂)'이라고 부른다. 가족 모두가 출입하는 제일 중요한 문이다. 대문 밑에는 강아지가 드나들 수 있게 작은 구멍을 만들어 놨다. 대문 위쪽에 바람이 통하도록 만든 나무창살 사이에는 낫을 꼽아 놓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안마루가 높아서 크고 긴 미루나무 둥치를 잘라서 도끼로 다듬어 발판으로 사용한다. 그 당시 동네 앞 강가에 하늘로 치솟아 자란 미루나무들이 많았다. 식구들의 신발을 모두 이 발판에 벗어 놓는다. 그래도 발판에서 마루로 올라가기가 높아서 부엌과 마루와 안방을 여러 번 오가면 다리가 아프다. 그래서 '부엌 팔십리'라는 말도 있다. 안마루 아래는 나무작대기 도끼 사까레 괭이 등 농사짓는 데 필요한 연장들을 보관한다. 물론 쥐들의 서식처도 된다. 겨울 밤 쥐를 잡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마루에 되를 낮은 그릇 위에 얹어 놓고 되 안에 밥풀을 넣어 두면 쥐가 그것을 먹으려다가 되가 앞으로 넘어지면 그 속에 갇힌다. 그러면 자루로 되를 뒤집어씌운 다음에 쥐를 잡는다.

 

안방 부엌에는 밥하는 큰 가마솥과 국을 끓이는 작은 가마솥이 있다. 여기에 불을 넣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면 방이 밤새도록 따듯하다. 안방 부엌 아래쪽에는 닭 둥지 세 개를 달아 놓았다. 보통 해마다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깐다. 산짐승, 살쾡이가 귀신같이 나타나 닭을 잡아먹기 때문에 알 품은 암탉은 늘 부엌 닭 둥지에 품게 한다. 앞마당은 큰집이나 참봉댁 등 골목 안쪽 이웃집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역할도 하고 늦가을 초겨울에 각종 곡식을 타작을 하는 중요한 장소다. 뒷산 너머에서 소로 실어 나른 진흙으로 마당을 잘 만들었다. 앞마당 앞쪽 오른 쪽 끝에는 사랑통시가 있다. 앞집과 울타리하나로 경계를 하고 있다.

             시골 집집마다 사랑통시(뒷간)와 안방통시가 있다. 인분은 모아서 두엄(거름)만들 때 사용한다.

 

 장독대: 시골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된장과 지렁 고치장을 큰독이나 작은 독에 담아서 가지런히 놓는 공간이다. 

 

 

뒤안은 넓어서 장독대가 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된장과 지렁 고치장을 큰 독이나 작은 독에 담아서 가지런히 놓는 공간이다. 거기에도 또한 큰 독에 세간을 보관하기도 한다. 그 주위에 감나무 한 포기가 있다. 뒤안 울타리 너머에는 문전 아지뱀네(성규 씨: 시인 조지훈의 장인)가 살다가 나중에 큰집의 둘째 용수네가 살고 있다. 우리 울타리 사이로 그 집 앵두를 따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 뒤안에는 또 안통시가 있다. 해마다 호박 넝쿨이 통시 지붕으로 올라간다. 뒤안에는 여러 가지 채소를 심을 수 있다. 아이들이 작은 꽃밭을 만들어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 등 여러 꽃을 심고 가꾼다. 뒤안에는 물론 나뭇가리가 있다. 겨울에 산에서 해마다 쌓아 놓은 나무를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땐다. 겨울이오면 김칫독 파묻을 곳에 볏짚으로 작은 움막을 지어서 거기에 보관한다. 뒤안에는 작은 대추나무 하나와 김나무 하나가 울타리 가까이 자라고 있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따먹을 과실나무가 많지 않는 게 아쉽다.

 김칫독 파묻을 곳에 볏짚으로 만든 작은 움막: 11월 말에 김장김치를 해서 땅속에 보관하면 그 다음해 2월까지 먹는다. 

 

  쇠죽을 사랑방 가마솥에서 끓여서 쇠죽겨통에 쇠죽을 퍼준다.  소가 먹고 남은 찌꺼기는 쥐들의 간식이 된다. 쇠죽 끓일 때 닦나무를 얹어서 같이 삶는다. 닥나무껍질을 볏겨 한지 만드는 곳에 주고 한지-창호지를 받아온다.

 

본채 왼쪽 앞에는 마구간과 쇠 죽겨 통이 딸린 아래채가 있다. 아래채와 본채 사이에 작은 싸리로 엮은 삽짝 문을 달아 놓았다. 어미닭들과 병아리들이 마당이나 이웃 텃밭에 못 가게 삽짝 문을 닫아 놓는다. 뒤안 초입에는 낫을 가는 숫돌도 있고, 두부 만드는 맷돌도 있고 마늘이나 고추를 다지는 절구도 있고 팥을 빻는 넓고 평평한 돌판도 있다.

맷돌은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이다. 둥글넓적한 돌 두 개를 포개고, 위에 뚫린 구멍으로 갈 곡식을 넣으며 손잡이를 돌려서 갈게 된다. 맷돌을 돌리는 맷돌의 손잡이를 맷손이라고 하며, 대개 나무로 만들고 윗돌 옆에 수직으로 달아 손잡이를 돌려서 곡식을 간다. 시골에는 집집마다 필수 품이 맷돌이다.

 

절구는 재료에 따라 나무통절구·돌절구·쇠절구 등이 있다. 시아버님은 작은 도자기로 된 약사발 절구에 한약재료로 가루약을 만들어 아이들이 아플때 먹이곤 하셨다. 작은 약절구에 소량의 깨를 깨소금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예로부터 달의 무늬를 보고 절구 찧는 토끼가 있다고 생각했다.

 달 가운데 한 마리 토끼가 있으니, 이를 옥토끼라 한다. '밤이 되어 달빛이 넓은 천공을 비추면, 토끼는 공이를 들고 부지런히 약을 찧는다' 는 이 이야기는 어릴 때 할머니가 여러번 이야기 해주었다. 무섬서는 여름 달뜨는 저녁에 갱변에 누으면 하늘에 은하수 등 별을 소쿠리로 쏟아 부어놓은 것같다. 그리고 보름달이 떠오를 때는 누구나 어릴때 듣던 달나라 계수나무 밑에서 절구 방아를 찧는 토끼 모습을 찾곤 했다.  어릴 때 엄마가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찧는 "토끼노래"도 흥얼거렸다. 우리도 곧잘 따라불렀다.  

 

푸른하날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한마리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업시
가기도 잘도간다 서쪽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내선 어데로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빗최이는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차젓다

 

 

https://youtu.be/QgdB3xVNhNg

아이들이 '푸른하날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라고 노래를 부르며 손바닥을 마주치는 게 신기하다

 

 

마굿간 다락에는 각종 농기구를 넣어둔다. 마굿간에는 또 긴 횃대가 있는데 닭이 20여 마리 올라가서 잠을 잔다. 우리는 늘 암소를 키웠다. 온순해서 다루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앞으로 강가로 나가는 길목에 옛날에 쓰던 연자방아를 반쯤 묻어두었다, 비가 오면 그 옆은 도랑이 된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 때에 도랑에는 가재도 기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걸 잡느라 정신없다. 도랑 건너는 넓은 공터로 거름더미를 만들거나 나락가리를 만들고 한쪽에 돼지우리가 있다. 집은 이듬해 겨울 내내 그리고 여름장마가 시작하기 전에 완성되었다. 집 지을 동안 모든 식구들이 모든 동네사람들이 고생에 고생을 쌔빠지게 했다.

 

                                                                       횃대에 앉아 있는 닭들

 

내가 무섬에 살 때까지 홍수와 태풍 피해가 몇 번 있었다. 기해년(己亥年)인 1959년 가을 추석때 무렵 사라호 태풍도 무서운 경험이다. 많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지붕이 날아가기도 했다. 가을비나 태풍 때문에 논밭의 곡식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올 한해도 배를 쭈구려 살아야한다. 걱정이 태산이다. 마당으로 황토물이 흘러내려가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1934년 경술년(庚戌年) 수해가 생각나서 혼이 났다. 또 집이 물에 떠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대문 밑 개구멍으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천으로 지푸라기를 싸서 막았다. 다행이 물이 자자 지기 시작하고 햇볕이 나기 시작해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마당 끝으로 흘러가는 물은 강변 가득히 흘러가는 물과 합류하여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옆집 점한이네 집이 물에 휩쓸러 갔다. 무서웠다. 지붕위에 닭이 공포에 사로잡힌 채 함께 떠내려갔다.

그리고 신축년(辛丑)1961년 또 수해가 났다. 이번에는 무섬 마을은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논밭은 수해가 꽤 깊었다. 수해가 나면 논밭에 모래가 산더미 같이 쌓이기도 한다. 그걸 고르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다 손노동으로 해야 한다. 이럴 때는 삽으로 혼자하기가 너무 힘들어 큰 싸까레 같은 나무가래 양쪽에 줄을 메어서 어른은 가랫대를 잡고 아이들이 양 줄을 잡고 당기면서 모래를 퍼 옮긴다. 혼자서 하는 사까레질 보다 훨씬 쉽고 많이 퍼 올릴 수 있다.

영주읍이 물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주읍이 물에 잠기지 않고 물이 그냥 내려왔으면 무섬동네가 사라졌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해 이후 마을 앞에는 큰 둑을 쌓기 시작하였다. 장마가 끝나고 영주 장에 갔을 때 말이 아니었다. 한절마 사는 형아가 이야기해주는 데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한절마 앞의 강둑이 터져 읍내를 덮쳤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수난을 받았다. 수백 채 집이 물에 떠내려갔다. 무섬 앞으로 집이 떠내려가는 게 보였다.

 

쥐구멍에 빠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입택(立宅)

 

이제 이사하는 일만 남았다. 입택할 때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들이 고사를 지낸다. 이 집에 사는 동안 가족들이 병들지 말고, 사고와 탈 없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라고 천지가신(天地家神)들에게 제사를 깍듯이 올린다. 고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화로(火爐)를 새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화로는 그 당시 모든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의 하나다. 늘 불씨가 그 화로에 살아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화로는 안방에 하나 사랑방에 하나씩 두고 추운 겨울에는 손을 녹이기도 한다. 부엌에서 밥할 때나 쇠죽 끓일 때 굵은 숯불덩이를 골라서 화로에 담고 재로 덮어두면 밤새도록 불기운이 살아 있다. 화로의 불은 성냥이 흔하기 전까지는 대대로 이어왔다. 이른 아침에 밥할 때도 이 화로로부터 불씨를 붙여낸다. 우리 집 안방에서는 시조모님이 작고 둥근 금이 간 항아리 화로를 늘 안고 살았다. 추운겨울에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다. 사랑에서는 시아버님이 좀 더 큰 놋쇠화로를 간수하셨다. 긴 담뱃대에 불붙이기도 수월하다. 겨울철에 화로위에 석쇠를 올려놓고 감홍수를 따듯하게 해서 아이들에게 주기도 한다.

 

                         

                       화로는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불이 사람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듯이

 

새집을 짓고 올리는 이런 고사들은 다 가정이 대대자손 화목하고 자손이 번성해지기를 바라고,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것이다. 지신이나 가신 등 주위의 신령들에게 예를 다하고 겸손해하고 조심해서 살아가겠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드디어 새집으로 들어간다. 움막에서 근 일 년을 살았다. 새집에 들어가니 모두들 기쁨이 넘치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고 대사건이었다. 사람들이 천재지변을 당해도 이렇게 견디고 새로 일어서서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했다. 쥐구멍에 빠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늘 시조모님이 하시던 말씀이 새삼 새롭다. 시조모님은 그날 새벽 강가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러다가 마루 기둥 아래 소반을 차려놓으시고 신령님께 간절히 빌으셨다. 시아버님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순간'이라고 말씀하신다.

 

                                             (삽화: 백승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은혜롭고 신령스런 거룩하신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손모아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정화수와 비나이다

은혜롭고 신령스런 거룩하신 신령님께

새집지어 우리식구 잘사도록 비나이다

은혜롭고 신령스런 거룩하신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귀영화 비나이다

제한몸과 우리식구 무탈하게 비나이다

입을복도 먹을복도 많이주고 비나이다

짧은명은 길게하고 잘사도록 비나이다

갖은병마 물리치고 오래살게 비나이다.

무병장수 무사태평 소원성취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지성으로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무릎꿇고 비나이다

은혜롭고 신령스런 거룩하신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절하게 비나이다

은혜롭고 신령스런 거룩하신 신령님께

저희기도 들으시고 소원성취 비나이다.

 

 

 

겨울의 시작 입동(立冬)

 

이제 새집에 살면서 겨울준비를 해야 한다. 수해가 나고 늦더위가 왔다. 다시 가을이 분주하게 지나가고 찬연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온다. 시골에서는 계절의 순환을 해마다 절감한다. 음력으로 10월 초순이 되면 입동(立冬)이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움츠리는 시기이다. 겨울을 대비해서 어른도 아이들의 옷을 준비해야한다. 할 일이 태산 같다.

 

김칫독 파묻을 곳에 볏짚으로 만든 작은 움막: 11월말에 김장김치 배추김치 무우김치를 해서 땅속에 보관하면 그 다음해 3월까지 먹는다.  

 

이어서 소설(小雪)이 시작된다. 이시기에 무엇보다도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김장을 담그는 일이다. 뒤안에 양지바른 곳에 땅을 적당히 파고 독을 두 개 정도 묻는다. 짚으로 거적을 엮어서 움막을 짓는다. 큰 독에는 배추김치를 해 담고, 좀 적은 독에는 무김치를 해 담는다. 김장김치를 담글 때도 이웃과 함께 서로 품앗이를 한다. 하루 전에 배추, 무우를 들에서 뽑아 와서 씻은 다음 소금에 절인다. 양념도 준비한다. 고춧가루 다진 마늘 파 새우젓으로 양념을 만든다. 그러면 이듬해 3월 초순 봄이 올 때까지 신선한 김치를 먹을 수 있다. 추운겨울에는 독 뚜껑을 열면 살얼음이 끼이지만 괜찮다. 또 강가에 모래를 반키 정도 파서 무우를 묻어두고 겨울에 가끔 파내어 먹는다. 깨끗한 모래 속에서 신선한 무우가 겨울잠을 잔다. 가끔 밤도 함께 묻는다. 집집마다 무우 모래더미가 있다. 무우 잎과 줄기는 새끼로 잘 엮어서 그늘진 곳에 달아서 말린다. 이 씨레기는 겨울에 된장국을 끓여먹거나 정월보름에 나물로 먹기 위해서다. 호박 고지, 가지도 썰어 말린다. 겨울 끝자락에 김치가 떨어질 때가 되면 무우를 잘게 썰어서 햇볕에 말라서 김치가 떨어지는 춘삼월에 마른 고치잎을 불려서 함께 곤짠지를 담가 반찬으로 먹는다. 마른 무우말랭이에서 단맛이 난다

 

김장에 관한 가사를 흥얼거리며 김장을 하면 피로도 덜 한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조기 김치 장아찌라

독 옆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움막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장다리 무우 아람 한 말 수월찮게 간수하소.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중에서

 

11월 초가 되면 나락을 베서 논에서 일차로 말리고 소등이나 사람의 지게롤 운반해서 마당가에 나락가리를 만든다 . 손이 많이 가는 가을 추수가 끝날무렵 이웃을 도움을 받아서 나락을 타작한다.  마당가에나 뒤안 울타리 가에는 타작을 마친 볏짚을 하늘 높이 쌓아올린다. 봄에 싹이 틀 때까지 소가 먹고 살 식량이다. 또 겨울 내내 땔 나무도 해서 나뭇가리를 만든다. 모두 사람의 손으로 베서 사람의 등으로 져서 나르거나 소로 운반해야 해서 여간 힘 든 게 아니다.

            곡식을 거둬들여서 마당 가에 쌓아났다가 다 마르면 타작을 해서 알곡을 가마니에 넣어 보관한다. 10월 후반 소설(小雪)에는 앞강에 살얼음이 끼이기 시작하고 날씨가 차갑다. 땅이 얼기 시작하여 첫 겨울의 징후가 보이며 눈이 조금씩 내린다. 이제 사랑어른이나 시어머니의 솜옷도 준비해야한다. 아이들도 추워서 오돌오돌 떨기 시작한다. 그래도 눈이 내리면 추위도 잊어버리고 강아지처럼 뛰어다니기 좋아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에는 또 산에가서 나무를 해와야한다. 뒤안이나 마당가에 나무가리를 만들어 놓고 일년내내 땔감으로 사용한다. 산에가서 나무를 베거나 주워모아서 지게로 날라와야한다.

 겨울 농한기에 산에가 일년 동안 사용할 나무를 해서 지게로 날라 담벼락밑에 쌓아야한다. 농촌 일은 끝이 없고 쉬운 것도 없다.

 

 

이어서 큰 눈이 앞 강변을 덮는 계절인 대설(大雪)이 음력 11월 초순에 시작된다. 동네 농사짓는 어른들은 이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 풍년이 들고 푸근한 겨울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역시 눈이 오는 계절에는 눈이 많이 와야 하고 비가 올 때는 비가 와야 농촌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

긴 겨울밤이 시작되는 동지(冬至, 양력 1222)가 오면 집집마다 팥죽을 써먹는다. 어릴 때 할매가 붉은 팥죽을 먹어야 집안에 들어오는 귀신을 쫓는다고 이야기를 여러 번 해주었는데 어디가나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시아버님은 붉은 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많이 먹어도 독이 없는 성분 때문에 한약재로서도 쓰인다고 하셨다. 시골에서 시루떡을 만들면 팥고물을 많이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동지에 팥죽에 찹쌀로 만든 새알을 넣어 먹으면 든든해서 배고픔도 덜하다. 아이들은 초가지붕 서까래 사이에 손을 넣어 참새를 잡아먹기도 한다. 화로 불에 감자나 고구마도 구워먹는다. 긴긴 밤에 할매한테 이야기를 해달라고 아이들이 조른다. 

시어맴이 '은혜를 갚은 까치' 이야기를 해준다. 옛날에 호랭이 담배피우던 시절에 무섬 앞에 높은 미루나무가 있었데이. 거기에 까치가 둥지를 지어 놓고 알을 까고 새끼를 키웠지. 어느날 처녀가 물을 길러 오는 데 구렁이가 슬금슬금 까치 둥지로 올라가는 것을 봤지. 까치가 깍깍하고 울어대고 난리가 났지. 처녀가 무슨 일이 일나는지 알고 집에 가서 긴 지게 작대기를 들고 와서 구렁이를 때려 잡아서 거렁에다가 내다버렸지. 까치가 안심을 하고 처녀가 하는 짓을 자세히 보았단다. 그리고 얼마 세월이 지나서 처녀가 밭가에서 뱀딸기를 따먹고 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었는데 또 다른 구렁이가 슬금슬금 처녀한테로 기어 가는 것을 까치가 보았제이. 이를 본 까치 두마리가 휙 내려 오면서 까악까악 소리치고 푸드덕 거리니까 처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큰 구렁이가 저 발밑까지 기어오고 있어서 얼른 일어나서 다시 구렁이를 잡아서 거렁에 던져버렸데이. 아마도 지난번에 죽은 구렁이의 다른 한쌍이었나봐. 그러나 이번에는 까치가 처녀의 목숨을 구해줬지. 이처럼 짐승도 은혜를 갚을 줄 아니 너희들도 자라서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데이.

 

 

                                                             <경노의 심곡> 원본

 

                어머님의 글씨: <경노의 심곡> 사본: 한지가 귀해서 옛 교과서에 옮겨쓰고 자주 읽으셨다.

 

 

 

 

일생 경력을 대강

추억 기록할까 생아 십수년은

존당의 높은 은덕 부모님 양육지은

호가사 생장으로 무산고락 않았으니

십오육세 겨우 되어 성혼이 되었으나

존고의 위중한보 번번이 축수하라

유월염천 삼복증염 경보가 득달하니

천리만길 놀라워라 두서없는 걸음이야

경각에 시댁이라 들어서니 노소분의

창황망조하신 동정 의전격회 새댁온다

 

<경노의 심곡>은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으로 내방가사이다. 작자와 필사자는 미상이며, 창작시기와 필사시기 또한 미상이다. 한글 흘림체의 줄글형태의 연속성을 띠고 있으며, 가독성(可讀性)이 약간 떨어져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많다. 현재 한국가사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노의심곡>은 제목부터가 난해하다. 작품 내용으로보면 한 여인네의 일생을 회고하는 일이 주류를 이룬다. 이로 미루어보아 ‘경노’는 작중 인물의 이름이거나 아니면 지명을 뜻할 수 있으며, ‘의심’은 아마도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뜻하는 ‘회심(悔心)’ 또는 ‘마음을 돌이켜 고치다’라는 뜻의 ‘회심(回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중화자는 여성이다. 부모님 곁을 떠나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그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몇가지 단서가 보인다. 우선 일제강점기 상황을 뜻하는 ‘경술(庚戌)’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합방(合邦)’이라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녀들을 개화의 물결을 따라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6.25 동란으로 인해 전국토가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작중화자의 가정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한탄한다. 그러나 난리통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은덕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상을 잘 모시고 가족이 서로 화합할 수 있을 때 번영과 행복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훈계를 담고 있다. (경노의 심곡 - 한국가사문학관 스마트가이드 (gasa.go.kr)

 

동지 무렵 안방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누가 가사를 읊으면 동네 아지매들이 모여앉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정겹다. 내가 류정승 이야기나 <경노의 심곡>을 읽어주면 이웃 아지매들 보갈댁 서늘기댁 세걸댁 석포댁이 고개숙여 들어준다. 듣기를 저렇게 좋아하니 읽는 나도 덩달아 좋아진다. 듣고 또 들어도 흥미를 자아내는 모양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에 누군가가 애절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가사나 시조를 읊으면 더욱 흥미를 가지고 듣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과 애절함은 동지섣달 긴긴밤 되면 더욱 처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어머니는 가사이야기를 배껴써서 읊으시곤하였다. 종이가 귀해서 헌 신문지에 써서 좀이 먹었다.

독수공방(獨守空房)하는 청상과부가 붉은 인두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며 들끓는 욕망 가라앉혔다는 처절한 옛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가슴 적신다. 산골 양반동네에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펼 수 없어 이야기 속에서 표현하고 그 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글을 깨쳤던 기생 황진이의 시조를 읊으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청풍 이불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온(사랑하는) 님 오신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무섬 양반집 아낙네들은 외간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상상도 못하지만 글 속에 묘사된 것을 생각하고 즐기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황진이 시구에 무섬의 정서를 빗대어 읊기를 좋아한다.

 

낙동강 줄기 내성천아 흘러감을 자랑마라

넓은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못 볼 터니

만월 달빛이 강나루에 가득하니 놀다가거라

 

 

계남댁은 <단종애사(단종전가)>를 애틋하게 소리 내어 읊으면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정이 많은 세걸댁은 눈물을 흘린다. 모두들 듣고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밤은 깊어가고 가사 읊는 소리는 끝날 줄 모른다.

 

일찍이 호열자로 남편과 사별한 하회댁이 어떤 가사에 자신의 처지를 보태어 읊는 가사는 모여 앉은 모든 이의 가슴을 적신다.

 

앞산뒷산 진달래야 꽃진다고 설워마라

명년삼월 봄이오면 너는다시 피련만은

한번가는 우리인생 두번다시 못온단다

시집올때 젊었는데 피지도못하고 시들어 버리는구나

호열자로 떠난낭군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전생에 지은 죄가 이처럼 크단말인가

온갖꽃이 피고지는 봄이가고 궂은비 하염없는 여름이가고

귀뚜리 소리 달밤에 교교한 가을이오고

긴긴 동지섯달 겨울이와도 외로움이 그칠날 없구나

동네벗님네들 모여앉아 하소연소리 들어주니 이내가슴 견딜만하나

속으로 흐르는 눈물은 멈출길 없구나

여기모인 아낙네들 설움이 많다하지만

나같이 청상과부 된 여자 또 있을까

서럽다 서러워 한많은 내인생이 서럽구나

 

법전댁은 시집 올 때 미래의 시아버님의 주문에 의해서 직접 여러 가지 가사를 베껴서 왔다. 법전댁 성품처럼 글씨가 참 곱다. 그 중에서도 즐겨 읽는 이야기책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이다. 이 가사에 나오는 사씨의 남편이 모함에서 풀려나와 첩에 의해서 불행 빠진 사씨를 다시 찾아오고 간교한 책략을 꾸민 교씨와 그녀의 간부(奸夫)를 벌하는 장면에서는 모두들 박수를 친다. 인생에서 모든 게 사필귀정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무섬에서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다. 해마다 긴긴 겨울밤이면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한다. 모두들 내 목소리가 낭랑하다고 읽어보라고 한다. 석유등잔 밑에서 가사를 읽으면 모두들 모여앉아 머리를 기우리고 듣는다. 두월댁은 자기가 쓴 여러 가지 가사를 낭송하면 모두들 무척 재미있어한다. 두월댁 재주가 이만저만 아니다

 

 

 

해방

 

이제 일본이 대동아전쟁에서 미국이 터트린 핵폭탄으로 패망하여 조선이 독립하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1945815일 해방은 무섬마을에도 크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영주 등지에서 독립운동하시다가 마을이 정착하신 어른들과 동네청년들이 구겨진 태극기를 장롱에서 꺼내들고 만세를 부르며 동네가 떠들썩했다. 문전 아지뱀(성규 씨, 동웅이의 부 시인 조지훈의 장인)은 마을 갱변에 작은 책상을 내 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만세를 제창하였다. 우리 아녀자들도 먼발치에서 그런 감격적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한재이 형님 댁 둘째 딸 진영이는 하도 총명해서 그때 배운 해방가를 잘도 부른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까지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어둠아 물러가라 현해탄 건너

눈물아 한숨아 너희도 함께

동포여 두 손 모아 만세 부르자

광막한 시베리아 벌판을 넘어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유구한 오천 년 우리의 역사

앞으로도 억만 년을 더욱 빛내리

동포여 어깨 걸고 함께 나가자

억눌린 우리 민족 해방을 위해

아아 투쟁에 투쟁에 이 몸 바치리

아아 투쟁에 투쟁에 이 몸 바치리

 

https://youtu.be/txh1XGQD1JU

 

이 조용한 외딴 동네에도 아마 내 생애에 느낀 가장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이제 허리 펴고, 한글도 맘대로 배우고 외세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수근 거린다. 그러나 해방 후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뉴스가 이 외골진 동네에도 자주 들려왔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사시사철 농사짓는 것은 똑 같았다. 사람들 생각이 좀 더 여유가 생긴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 만 해도 산에서 소나무에 낫으로 톱으로 자국을 내어 송진을 짜서 받치곤 하던 것을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 순사와 그 앞잡이들이 나타나면 아이가 울음을 그치던 공포 분위기도 사라졌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 압제로부터 풀려났지만 두 동강이가 나서 북한은 소련의 입김이 좌우하고 남쪽은 미국 입김이 좌우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마을의 뜻 있는 분들 일제 때 반일운동 하던 분들은 나라를 위해 다시 큰 일 들을 할 일이 있다고 한다.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공부하던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더 큰 뜻을 품고 바삐 움직인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시골에서 삶을 이어가지만 서울이나 도회에 나들이 하는 사람들은 뭔가 분주히 움직인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여 희망에 찬 모습이기도 하고 어쩐지 초조한 모습이기도 하다.

 

           소나무에 낫으로 톱으로 자국을 내어 송진을 짜서 받치곤했다.  금수강산에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상처를 입은 모습이 애처롭다. 일본의 강압적인 한반도 지배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만하다. 우리민족 다시는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시아버님이 늘 '유비무한(有備無患)'이라고 말하듯이.

 

 

시동생의 비보(悲報)

 

우리 집에서는 해방되기 전에 춘양으로 시집가신 맏시누이가 막내 남동생을 돈 벌이 시킨다고 데려갔다. 아주 잘 생긴 우리 유일한 시동생이었다. 그는 거기 태백 광산에서 희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런 비극적인 소식을 들고 온 춘양형님은 시아버님한테 혼 줄이 나고 다시는 고향에 오지마라고 호통을 받고 쫓겨났다. 춘양형님은 일찍이 남편을 잃어서 혼자 그 당시 아들 둘을 데리고 살았다. 그전에 올 때마다 생선어물을 가지고 와서 돈이나 곡식으로 바꾸어가기도 했다. 그 형님은 바깥세상 소식도 전해주었다. 혼자 살아가기가 무척 힘든 모습이 안 되었다. 우리 집의 사랑어른의 유일한 남동생인 시동생이 그렇게 죽어서 집안 전체가 오랫동안 슬픔에 잠겼다. 시조모는 당신이 덕이 없어 이렇게 손주가 불의의 객이 되었다고 한탄하셨다. 다 타고난 업보라고 한탄하신다. 시조모님은 다 당신이 복이 없어 그렇다고 한탄을 하셨다. 그러나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으니 이왕 일어난 불행을 어떻게 하노 그만 이겨내고 살아가야한다고 하셨다. 시아버님보다 시어머님은 한동안 식음을 드시지도 않았다. 나는 말도 못하고 슬픔을 참았다. 우리 시동생은 사랑어른처럼 키도 크고 마음도 좋았는데. 모든 일도 잘 하고 돈이 무엇이라고 돈 많이 번다는 고모의 말에 따라 갔다가 변을 당하다니 슬프고 슬프다.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내가 시집와서 겪은 가장 큰 불행이다. 먼 훗날 시아버님 모르게 춘양 맏시누이가 동생 사망 위로금을 가져와서 술미골에 밭을 샀다. 안빈(安貧)을 지키시며 살아가시는 시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아들 죽은 보상금으로 산줄 모르셨다. 모르시는 게 차라리 편했다. 늘 시아버님한테는 미안지심(未安之心)이 들었다. 살아생전 잘 보양(保養)도 효도도 제대로 못한 죄가 되어 철천한(徹天恨)이 되었다. 아셨더라면 춘양 형님은 더욱 꾸중을 들었을 테니까. 그 이후 그 밭은 우리가 농사를 지었다. 먼 훗날 그 밭은 춘양고모의 둘째 아들 우리 집 셋째아들 경이와 동갑인 중식이의 몫이 되었다. 이 옛일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때때로 모르고 지내는 게 편할 때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이다.

 

 

 

호열자(호열자) 창궐

 

8.15 해방과 6.25 동란 전후에 전염병도 창궐하고 어른도 어린이도 많이 죽었다. 어떤 친척 집에는 며칠 사이로 호열자(콜레라)로 둘이나 죽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첫아들이 병이 나서 다섯 살 생일도 안 되어 죽었다. 시동생이 죽고 나서 가정에 생긴 가장 큰 불행이었다.

첫 아들을 잃고 슬픔에 젖어있었다.

"시아뱀요, 왜 저는 이런 불행을 겪어야하니껴. 모두 지 불찰이고 천생에 뭐 잘 못한 게 있어 이렇게 우리집안에 불행이 닥쳐온 모양이시더. 죽을 죄를 지은 가보시더."

"야야 걱정 너무 하지 말거레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데이. 병마가 동네를 나라전체를 휩쓸어가니 어디 우리집만 이런 우환이 생기나. 그 가세 좋던 웃마 문전이네도 며칠 내로 줄초상이 나지 않았나.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더 좋은 세월이 올기데이. 니 스스로 복을 타고 나지 않았다고 한탄말거레이. 스스로 노력해서 복을 보태어 살면 된데이. 가난하고 어렵고 못 먹고 살아도 니 마음을 니가 다스리면 된데이. 우리다 그렇게 살아왔데이. 피치 못할 일이 일어나도 니가 니 인생길을 헤쳐 나가면 덴데이. 세상이 우리를 워찌하겠노. 부디 참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살아가거레이. 자식은 잃은 니 마음 다 안다. 니 시조모 니 시어머미 말 안 해도 슬퍼한다."

 

                                   호열자 방역 검문소

                        전염병 호열자 로 여러 사람이 죽어갔다. 호열자로 죽은 엄마 앞에 철부지가 울고 있다.

 

동네 전체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큰 집에서는 호열자를 피해 강 건너 큰 솔밭에 움막을 치고 한참동안 살았다. 호열자의 전염을 피해서다. 마을로 들어오는 뒷길에 평은 지서에서 순사가 와서 지키고 마을 사람들이 나가지도 외지사람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이웃 간에 왕래도 금했다. 면사무소에서 서기가 입과 코를 가린 수건을 쓰고 와서 소독도 하고 마을 전체가 어수선했다. 어떤 이웃 아지매는 호열자가 걸린 집은 귀신이 씌어서 붙은 역병이라고 저주스런 말을 해댔다. 그런 귀신이나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굿을 해야 하든지 나쁜 귀신에게 예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야한 한다는 둥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이로 한집에 초상이 여러번 나기도 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병과 약을 조금 아시는 시어른께서 그런 것으로는 전염병을 막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철저하게 물을 끓여먹게 하고 일체 생야채나 생 음식은 못 들게 단도리를 철저히 했다. 이웃 간의 왕래도 못하게 했다. 호열자로 상을 입어도 아무도 못 가게 했다. 한 육 개월 지나니 병이 잦아지고 사람의 왕래도 있고 마을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 당시 나라 전체에 그런 전염병이 퍼졌다고 한다. 먹고 사는 게 날이 갈수록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시어머니와 누에도 치고 목화도 따고 길쌈도 하고 재봉틀로 동네사람들 옷가지들을 만들어주고 훗날을 위해서 조금씩 돈을 모았다. 당시 목화는 집집마다 재배하여 솜을 만들어 가정에 이불 등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목화를 재배하여 솜을 만들어서 가정마다 이불 등을 만들어 자급자족했다.

 

 

둘째 딸과 셋째 아들 넷째 아들

 

식구들이 첫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을 빨리 잊게 해주었다. 바쁜 농촌생활이 오랫동안 슬픔에 젖어 있지 못하게 했다. 임오년(壬午年, 1942)에 둘째로 태어난 딸 둘매와 병술년(丙戌年, 1946)에 셋째 아들 삼이는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따듯한 아랫목에서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시조모님께서 삼신할매에게 바치는 삼신상을 윗묵에 차리곤 하셨다. 삼신상차림에는 주로 미역 쌀 강가 모래 샘에서 길러온 정화수(井華水)를 떠놓는다. 시어머니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에 올렸던 미역과 쌀로 첫 국밥을 지어 주신다. 미역은 예부터 젖을 잘 나오게 한다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힘들게 아이를 낳고 먹기가 수월하다. 출산 후 3일째와 7일째 21일째도 삼신상을 차려 그 상의 밥과 미역국을 먹는다.

 

                                                                                  삼신할매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 세상에서 아이를 점지하고 어머니 태중(胎中)에서 무사히 길러내며, 출산을 순조롭게 돕고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는 신령으로, 보통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흰머리를 한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삼신할매'라고부른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의 양쪽 기둥 사이에 금줄을 가로로 걸어 아기의 출산을 알린다. 동시에 상가(喪家)를 비롯한 궂은 곳에 다녀온 사람이나 궂은 것을 보고 궂은 음식을 먹은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면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난 신성한 곳임을 나타낸다. 고추가와 솔잎가지와 고드레돌과 하얀 문종이를 걸어놓으면 아들이 태어났다는 뜻이고 솔잎가지와 수껑(숯)과 흰 헝겁을 달아놓으면 딸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21일간 지푸라기로 왼쪽으로 엮은 새끼로 만든 ()을 대문 위에 쳐놨다가 벗기면 삼신상을 더 이상 차리지 않는다. 물론 첫돌 잔치가 다가오면 또 삼신상을 차리시곤 하였다. 첫딸을 낳았을 때는 금줄에 수껑 솔가지와 흰 헝겁을 달고 아들을 낳았을 때는 고추 솔가지 고드레돌과 하얀 문종이를 달아놓았다. 부정 탄 사람이 갓난아기에게 해가 될까봐 출입을 금하는 상징이다. 시집을 오니 첫해에 장을 담근 된장독에도 금줄을 치는 것을 봤다. 물론 된장 독 안에도 수껑과 대추를 넣는다. 이래야 잡냄새를 없앤다고 시조모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늘 삼신상을 시조모님이 차리신다. 안방 방 머리맡에 짚을 깔고 상의 앞쪽으로 밥 뒤쪽으로 미역국과 물을 각기 세 그릇씩 차려놓고 삼신할매가 그 음식을 먼저 먹고 갓 태어난 아기가 탈 없이 잘 크도록 빈다. 시조모님은 삼신할매에게 빌고 또 빌어야 산통도 덜하고 아이가 병도 걸리지 않고 죽지 않고 잘 자란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 친정 할매와 어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할매는 옥황상제가 우리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니 늘 착하게 겸손하게 살아야한다고 옛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했다. 나중에 시조모님이 돌아가시고는 시어머님이 그 자리를 대신하셨다.

둘매는 마침 밭에서 일을 하는데 산통이 와서 하마터면 밭에서 아이를 낳을 뻔했다. 서둘러 집에 오자마자 안방에서 아이를 낳았다. 시조모님이나 시어머님 시아버님 모두 아들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실망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시아버님은 영민하셔서 큰 딸은 살림밑천이 되니 딸이면 어떤노 하시며 위로의 말을 하셔서 속으로 마음이 놓였다. 들에서 산통을 하고 딸이 나와서 이름을 둘매로 지었다. 다음에 아들이 낳으라고. 물론 호적에는 진옥(鎭玉)으로 올렸다.

아이를 낳고 2-3일은 시어머니가 밥도 해주시고 돌봐주셔서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 딸 낳을 때 바라지하는 것은 시어머니가 도맡아하셨다. 그러나 곧 아기 기저기 빨래 등 모든 것을 내가 해야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밥할라네 집안 소지 아기 젖먹이며 돌봐야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다. 이러한 일들은 아이를 낳을 때마다 되풀이되었다. 한번은 친정 어매가 와서 도와줘서 한결 수월했던 적도 있었다. 다행이 친정 어매가 올 때마다 시어머니와는 이야기도 잘 하시고 물래도 함께 저으며 잘 지내셨다. 친정어매와 시어머님은 얼굴도 곱고 들일은 많이 하시지 않았다. 옷차림도 깔끔하게 입으시고 단정하고 깨끗해서 고왔다. 나는 들에서 일을 하느라 그렇게 곱게 차려 본적이 별로 없다. 장에 갈 때 피마자기름을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가면 '아이고 방석댁 곱기도 하지 시장 남정네들이 많아 쳐다볼 끼데이' 하고 이웃아낙들이 칭찬인지 비웃는지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남사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무자년(戊子年, 1948)에 넷째로 태어난 경이는 흉년으로 먹을 게 없어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미음으로 젖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웃집 머섬살이(머슴살이) 하던 문한 어미가 마른 젖을 가끔 물려주어서 젖동냥으로 겨우 살아났다. 시어른이 큰 손자처럼 다칠까 전전긍긍하시며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기침을 하고 열이 나더니 얼굴이 새까매졌다. 돌도 지나기 전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러더니 숨이 넘어갔다. 시어머님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셨다. 차마 보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또 이런 슬픈 운명이 왜 또 내게 일어난단 말인가. 나는 무섭고 겁이 났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삼신할미한테 빌고 또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다니 이 무슨 변고인고. 하느님도 신령님도 원망스러웠다. 저녁을 먹고 사랑어른은 괭이와 삽을 들고 나는 아이를 보자기로 싸서 산에 묻으러 나갈 채비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첫 아들을 잃고 몇 년 만에 또 넷째를 가슴에 묻어야하니. 바람이 몰아치고, 눈 싸래기가 너무 심하게 내리고 추웠다. 시어른이 이봐라 야들아 이 추운데 산에 가면 땅도 얼었을 텐데 그만 방구석에 놔뒀다가 내일 날 밝으면 갔다 묻어라 하셨다. 그래서 안방 웃묵에 보재기로 싼 채 놔두고 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궁금해서 보재기(보자기)를 약간 풀어보니 아이가 얼굴 색깔이 맑아진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시어맴이 시어른을 불러 오셨다. 시어른은 가끔 동네서 침도 놔주시고 한약재로 간단한 약도 지으시는 분으로 병을 잘 다루셨다. 시어른이 귀를 아이의 코에 대시더니 야가 숨을 쉬는 것 같다고 하면서 얼른 보재기를 풀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 넷째 경이는 되살아났다. 그때까지 우리 집에서 일어난 경사중의 경사였다. 죽은 아이가 살아났으니 천지신명이 도우신 모양이다. 시조모님이 안마루 기둥 앞에서 늘 새벽마다 강가에서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 모아 자손들 잘되라고 비셨는데 그런 기원이 보답을 한 모양이다. 미음을 끓여서 먹이고 마을 젖먹이 아기가 있는 새색시한테 젖동냥도 해서 먹이고 해서 우리 경이는 새로 살아났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내내 병치레도 자주하고 몸이 대나무처럼 가느다랬다. 그래도 살아가고 있으니 그보다 더 복된 게 없는 것 같았다.

 

 

경인년(庚寅年, 1950) 6.25 동란의 상흔

 

                                             대한민국 군대

                                     북한 인민군대

 

조용한 마을에도 나라 전체의 운명을 뒤흔든 동란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얼만 전에 끝난 전염병 사태와는 또 달랐다. 해방되고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 지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또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다. 바깥어른들이 왜놈들이 물러가고 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차지하고 조선민족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라 돼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제 때 항일 운동 하던 분들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민족주의 운동을 했는데 전쟁이 나니까 어떤 분들은 북에서 내려온 빨갱이 공산당의 편을 들어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 읍내 뿐 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다. 우리도 안동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다시 물 건너 콩밭에 숨기도 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평은 역 근방 산에서 따발총소리가 연일 들려오고, 쌕쌕이 비행기가 하늘을 지나가며 귀청을 뚫을 것 같은 소리를 내고 하늘에 연기를 기다랗게 남기고 지나가고 어딘가 폭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시대였다. 한 두 사람이 싸우는 것도 무서운 데 이렇게 온 나라가 다 싸우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 우리 대한의 독립군들이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이해가 되었는데 이번의 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하는 싸움은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무서웠다.

 

                                6.25전쟁과 피난민 행렬

나라 전체가 북쪽에서 내려온 공산당 빨갱이 군대가 점령하여서 말이 아니었다. 바깥어른들을 통해서 온갖 뒤숭숭하고 무서운 소식이 전해졌다. 공산당에 가입한 김 씨네 청년들도 있고 박 씨네 청년들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죽이고 하는 희생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다른 지역 다른 마을에서는 서로 간에 몹쓸 짓을 해서 서로 죽이는 참혹한 사태도 벌어졌다는 소식이 파다하고 그런 흉흉한 소식은 무서웠다.

공산당 부대가 낙동강 하류 부산까지 갔다가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유엔군 부대가 남한을 도와 다시 북한 괴뢰군대가 쫓겨 갈 때 우리 마을에도 수십 명의 빨갱이 병사들과 장교들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초라하게 옷을 입고 음식을 조달하고 하루 자고 머무르다 갔다. 닭을 잡아달라고 하고 잡아주면 빨간 전표를 주었다. 나중에 통일하면 돈으로 보상해준다고 하면서. 한번은 이웃집에서 닭을 잡아달라는 데 닭이 마루 밑에 숨어버렸다. 만삭인 그 집 아지매가 배가 불러 마루 밑에 못 들어간다고 하니, 병사가 총을 들고 직접 마루 밑으로 들어가 닭을 몰아내 잡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동네 아지매들과 처녀들은 건너 마을 밭에서 숨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병사들이 여자들을 건드리면 까삐딴이란 대장이 즉석에서 총살한다는 엄한 규율 때문에 여자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나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의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어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큰 사고 없이 닭 잡아먹고 식량 조달해서 읍내로 해서 북으로 갔다.

그 뒤를 쫓는 국군 병사들과 장교들도 마을에 와서 자고 갔다. 엄격한 공산당 군대와는 달리 증표도 주지 않고 닭이랑 개도 마구 잡아먹고 식량을 달라고 해서 가져갔다. 밤에는 여자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떨기도 했다. 어떤 집에 처녀가 있는 줄 알고 데려가려고 밤에 군인들이 와서 수색을 했다. 그 집 할배가 자기 이불 밑에 처녀를 숨기고 콜록콜록 기침을 계속하며 가래를 계속 뱉어냈다. 병사들이 사랑방 문을 열어보고 폐결핵 환자 노인을 보고 그냥 문을 닫고 가벼렸다. 다행이 변을 당하지 않았다. 큰 사고 없이 지나갔다. 전쟁을 하는 양쪽 군대가 마을에 번갈아 지나가도 사람이 크게 희생되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고 사랑어른들이 수근거렸다.

                    육이오전쟁이 끝나고 상이군인들 자주 동네에 와서 쌀이나 다른 곡식을 얻어갔다.

그 전쟁 통에 윗마을 한쟁이 형님 댁에서는 외동아들이 영주까지 온 김일성 장군의 공산군대를 따라갔다가 통일되면 내려온다 했는데 그 후 소식이 끊겨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 집에는 딸만 여섯이나 있었다. 가족의 큰 슬픔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사시는 그 형님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우리아들들이나 다른 집 아들들이 가면 무척 반겨주신다. 우리집 재현이를 양자 삼고 싶다고 하셨다. 그 집 둘째딸을 비롯하여 딸네들이 다들 노래를 잘 한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를 서로 교환했다.

 

 

박 씨네 가족에는 정말 기고 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영주 봉화지구 공산당 대장이 되었다. 밤에는 나타나 무섬마을 사람들을 호도하고 낮에는 산에 숨고 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을 고의로 해꾸지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 일가친척 외손이니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래도 사상보다는 인륜이 앞서서 다행이다. 삼강오륜을 어릴 때부터 배운 동네 전통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공산당 대장을 잡기 위해 쌕쌕이가 마을을 폭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물 건너 콩밭에 숨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 중 바깥출입을 자주하는 분들(우산어른과 석포어른)이 영주 안동 군부대에 찾아가고 대구에 갔다 오고 해서 다행히 폭격은 면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폭격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실행해야 하는 데 무섬 마을 대신 안동 가는 방향 학가산 밑 어디 마을에 야간 폭격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을에는 지금도 하루에 죽은 사람 25명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무서운 소식이다.  신출귀몰하는 그 빨갱이 대장은 나중에 봉화 어디서 경찰 수색대에 걸려 총 맞아 죽었다고 한다. 어느 날 빨갱이 대장을 쫓아서 두 순사가 총을 들고 따라가는데 큰 대문으로 들어가고 곧 이어서 경찰들이 따라갔는데 큰 기와집 뜰이고 집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뒷문으로 나간 흔적도 없고. 몇 분간 수색하다가 포기하고 철수를 했다. 한참 후에 그 순사 중 한명이 뭔가를 잊어버린 것을 찾으러 다시 되돌아왔다. 그 순간 마당 거름더미에서 뭔가가 지푸라기를 덮어쓰고 거름냄새를 풍기며 나오는 데 그게 바로 빨갱이 대장이라 순사가 총을 쏴서 즉사했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무서운 이야기다.

 

                    공산당 대장을 잡기 위해 쎅쎄기가 마을을 융단 폭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른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는 어느 마을에서 달밤에 북한 인민군 병사가 총을 들고 국군 병사를 잡으려고 빈 집들을 수색하는데 밤에 어두운 빈방에 들어갈라이 섬칫섬칫해가 몬들어(못들어)갔재. 그래다가 어두운 방에 들어가니 갑자기 숨어 있던 임신한 아지매가 튀어나오니 엉겁결에 병사가 총검으로 찔러서 애기가 툭 튀어나와서 병사도 까물아져 나자빠져 기절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쟁 이야기 중에서 가장 참혹한 이야기였다. 그 외에 온갖 무서운 이야기가 나돌았다. 전쟁은 무서웠다피난길에 가족이 아이를 한둘 업고 머리에 이삿짐 보따리를 이고 남정네는 등에 지고 처량하게 가는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두 눈만 까맣게 남은 피골이 상접한 다 죽어가는 아이를 버리고 가자는 집도 있었다. 뒤따라오던 가족이 하도 불쌍해서 그 아이를 업고 갔는데 나중에 살아남았다고 한다. 모두들 몰골이 사람같이 않다. 찰나의 순간에 사람이 죽고 사는 전쟁과 피란으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하는 것이 공포스러웠다그래도 무섬마을은 그런 사건을 직접격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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